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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복 (시 73:25-28, 약 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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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복 (시 73:25-28, 약 4:7-8)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우화 가운데 ‘호저 딜레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전신에 고슴도치처럼 가시 같은 털이 난 호저는 서로가 너무 가까이 가면 상처를 받습니다. 서로가 가시로 찌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무 떨어져 있으면 추위에 견디기 힘듭니다. 그래서 상처를 주지 않고,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찔리지 않고 추위도 이길 수 있는 묘안의 거리입니다. 등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동물의 지혜입니다. 이것이 호저의 한계입니다. 만일 사람이 항상 이런 등거리 유지에만 신경을 쓴다면 양쪽에서 다 버림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어느 한 쪽에 가까이 설 수밖에 없는 운명적 존재입니다. 
  
산은 가까이 가면 더 높아 보이지만 인간은 가까이에서 보면 너나 할 것 없이 남루하고 초라한 본색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하인이나 친척에게 존경받는 영웅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이 고향에서 인정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한계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인간에게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 편의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고, 동행하고, 하나님 가까이 두시기 위하여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셔서 닮게 하셨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기 이전에는 이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죄가 인간에게 들어와서 하나님과 사람을 분리하였습니다. 아담이 죄를 지은 이후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과 멀어지고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3:8에는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라고 합니다. 요나서 1:3에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고 합니다. 죄란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가까이 하라고 합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원래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정상입니다. 가장 가까이 하는 것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부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귀를 쫓고, 복을 가져오기 위한 일종의 주술도구입니다. 부적은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석기시대부터 인간에게는 부적이라는 주술도구가 있었습니다. 부적은 종이에 이상한 그림과 글씨를 써서 몸에 지니고 다니기도 합니다. 목걸이같이 걸고 다니기도 합니다. 특이한 형상물을 만들어 지니기도 합니다. 몸에 문신을 새겨 악귀를 쫓기도 합니다. 특히 태국사람들에게 문신은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네크로필리아’란 말이 있습니다. 시신이나 유골에 강한 집착을 가지는 애착증 환자을 일컫습니다. 배우 최진실씨의 유골함을 절도한 사람도 바로 이런 유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시신이나 유골을 애인처럼 곁에 두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것을 가까이 두는 것은 병입니다. 잘못된 것을 가까이 두면 더 잘못되게 마련입니다. 좋은 것을 가까이 둘 줄 알아야 합니다. 가장 좋으신 하나님을 가까이 둘 줄 아는 것이 큰 지혜이며 가장 위대한 복입니다. 
  
물체를 크게 보이게 만드는 방법은 그 물체 가까이 다가가거나 그 물체를 가까이 가져와야 합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가를 알게 됩니다. 크신 하나님, 위대하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알게 됩니다. 크신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가 크게 됩니다. 큰 복을 받습니다. 
  
우리 가까이에 있는 많은 쓸데없는 것들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지혜를 얻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자가 받는 복을 누리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을 멀리 하는 자는 망합니다. 

27절에는 “무릇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하리니 음녀같이 주를 떠난 자를 주께서 멸하셨나이다”고 합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입니다. 생명을 멀리하는 자입니다. 곧 죽음을 가까이 하는 자입니다. 생명과 멀어지면 자연히 사망과 가까워집니다. 이런 어리석은 자는 망하게 됩니다. 어리석음은 사람으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태양계는 태양만이 발광체입니다. 태양만이 빛을 내고 열을 냅니다. 태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춥습니다. 더 멀어지면 생물이 살지 못합니다. 태양계의 가장 먼 위성이 명왕성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지구에서 64억 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명왕성에는 생물이 살지 못합니다. 왜 살지 못합니까? 태양과 멀어서 살 수 없습니다. 명왕성의 온도는 영하 270도라고 합니다. 최근에는 명왕성보다 더 먼 지구에서 128억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행성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이 행성의 이름을 우선 ‘세드나’라고 붙였다고 합니다. 이 먼 곳에 행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체가 살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빛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멀리 떠나서는 모든 생명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의 문맥상으로 볼 때 멀리하는 것은 배교를 의미합니다. ‘음녀같이’라는 말은 자신의 본래 남편을 버리고 떠나 다른 남자에게 간 여자를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버리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를 성경은 음녀와 같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남편을 멀리하고 떠난 여자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다 같은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 호세아의 아내는 고멜이었습니다. 고멜은 성경에 나오는 대표적인 음녀입니다. 자기 남편을 버리고 멀리 가서 다른 남자들과 살아가는 여인이었습니다. 호세아 1:2에는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고 합니다. 음란한 아내를 통하여 하나님께 대한 음란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호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남편을 버리고 멀리 떠나 있는 여인을 하나님은 반드시 망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잘 될 수 없음을 알게 하시는 것입니다. 
  
사라의 여종이었던 하갈은 아브라함의 아기를 임신하게 되었습니다. 몸종이 임신을 하게 되자 주인인 사라를 업신여겼고, 사라는 몸종인 하갈을 구박했습니다. 이에 하갈을 사라를 피하여 멀리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멀리가면 고통을 면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갈을 광야에서 만나셔서 하갈에게 가서 사라의 수하에서 주인에게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탕자가 아버지를 멀리 떠나면 자신의 힘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멀리 떠나는 것이 죄이며 고통입니다. 빌레몬서는 바울이 빌레몬에게 보내는 서신입니다. 빌레몬의 종인 오네시모가 주인의 돈을 훔쳐 도망쳤다가 바울을 만나 예수를 믿게 되어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면서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잘 봐달라고 하는 내용입니다. 오네시모는 돈만 있으면 주인을 멀리 떠나도 편안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주인을 멀리 떠나면 그 자체가 고통이며 죽음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에 나오는 데마, 그레스게, 디도를 보세요. 바울을 멀리 떠나 세상으로 가면 즐거울 것 같습니까? 그들이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바 없지만 분명히 세상으로 가서 끝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하면 절대로 좋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원래자리로 가야 합니다. 그 자리로 가지 않으면 망합니다. 
  
골로새서 1:21에는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잘 보세요. 멀리 떠나면 원수입니다. 죽음입니다. 망합니다. 다시 돌아와 그리스도와 화목하게 되면 다시 살리심을 받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을 멀리 떠나는 구체적 행위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하나님을 떠나게 됩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상숭배는 하나님이 아닌 위엄의 존재에게 절하고 섬기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도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야곱의 삼촌 라반의 집에도 드라빔이라는 우상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도 우상숭배와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아합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바알과 아세라를 들여와서 백성들에게 우상을 섬기게 하였습니다. 옛날 로마신화에도 풍요의 신 ‘옵스’가 있는데 신을 섬겨야 풍요롭게 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섬겼습니다. 옛날 헬라에는 ‘아데미’라는 신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다이아나’ 신에 해당되는 신인데 다산을 상징하는 모신(母神)입니다. 여인상에 가슴을 많이 만들어 놓은 여신이 바로 아데미입니다. 
  
우리 민족도 우상숭배에 아주 능숙한 백성입니다. 우리 민족에게는 정령숭배사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 동물, 자연에게는 정령이 있다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아무 것에나 절하고 섬기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큰 나무, 바위, 산, 강, 바다도 숭배하려는 충동이 항상 있었습니다. 정령숭배는 초기신앙의 일종입니다. 
  
일전에 어느 신문 논설위원이 쓴 글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의 붉은 악마 열풍을 ‘거리의 굿판’이라고 한 민속학자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샤머니즘, 굿판, 무속이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종교심이나 심성에서 땔 수 없는 것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무속은 한국인의 영원한 신앙이라고 하였습니다. “잘 살아보세”, “빨리빨리”도 다 물질주의에 근거한 무속의 영향이라고 했습니다. 뿌리 깊은 한국인의 신앙을 보면 한국인 심성의 중심이 애니미즘 즉 무속신앙입니다. 그래서 한국은 무속천국입니다. 

최근 한국의 무속인 수는 약 20만 명입니다. 연간 약 2조 원 가량이 무속인에게 들어가는 돈이라고 합니다. 우상숭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멀리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면 망한다고 했는데 이것만 보면 한국은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이 찬송은 한국 전쟁 후 어려울 때 한국교회의 주제가였습니다. 이전에는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원했지만 요즘은 더 멀리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것은 멸망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입니다. 

28절에는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내가 주 여호와를 나의 피난처로 삼아 주의 모든 행적을 전파하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멀리하는 것이 멸망입니다. 이것과 대비해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왜 복입니까? 하나님이 복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이십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가까이 함은 복입니다. 좋은 것을 가까이 두는 것은 인생의 큰 지혜입니다. 무엇을 가까이 두느냐, 누구를 가까이 두느냐 하는 것은 인생의 운명을 결정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맹자의 교육을 위하여 세 번씩 이사했다는 말입니다. 처음에 묘지 곁에 이사를 했더니 상여를 매고 곡성을 내는 흉내를 내더라는 것입니다. 가시 저자 곁에 이사를 했더니 장사하는 흉내만 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서당 곁에 이사를 했더니 글 읽는 흉내를 냈습니다. 무엇을 가까이 하느냐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최근에 고위공직자 임명을 위한 공청회를 할 때마다 보면 높은 사람들은 위장전입이 단골 메뉴입니다. 총리나 장관 지명자에게 위장전입은 기본인 듯 보입니다. 답변은 거의 다가 부동산투기가 아니라 자녀교육용이라고 합니다. 학군이 좋은 데로 옮기겠다는 욕망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학교, 좋은 주변시설, 좋은 환경 가까이 사는 것은 복입니다. 
  
하나님은 반석이시며 분깃이십니다(26절). 시편 18편에는 하나님은 힘이십니다. 반석이며, 요새이시며, 건지시는 이시며, 바위이시며, 방패이시며, 구원의 뿔이시며, 산성이십니다. 이렇게 든든한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복입니다. 더구나 시편의 기자처럼 이런 하나님이 “나의” 곁에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내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곁에 계시는 것만으로도 무한한 복입니다. 
  
자동차 옆 거울에 보면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가까이 계십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저 멀리 계셨습니다. ‘너무나 먼 당신’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에는 ‘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를 말했지만 루터는 ‘계시된 하나님’(deus revelatus)을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멀리 숨어 계시다가 가까이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멀리 계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두셨습니다. 내 곁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느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게시는 ‘나의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가까운 하나님으로 만드신 것이 복입니다. 
  
아빌라의 테레사는 “내가 나에게 가까이 있는 것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시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사랑하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고백하는 이것이 복입니다. 장 바니에는 ‘희망의 사람들 라르슈’에서 “마치 떠나신 것처럼 보일 때도 그분은 항상 거기 계십니다. 가장 멀리 계신 것처럼 보일 때 오히려 가장 가까이 계시기 때문입니다”라 썼습니다. 이것이 복 있는 자의 마음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경우를 보세요. 마르다는 멀리서 일하는 사람이었고, 마리아는 가까이에서 말씀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은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고 칭찬하셨습니다. 더 복 있는 사람은 은총을 사모하는 사람입니다. 
  
‘대부’라는 영화 2편에 보면 마피아 두목 마이클 콜레오네가 “친구들을 가까이 하되 적은 더욱 가까이 하라”고 충고합니다. 사실은 가장 가까이 해야 할 존재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복이 옵니다. 하나님이 나의 복이시니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4:8에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고 합니다. 반면에 성경은 “우상에서 멀리하라”,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음녀에게서 멀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함이 우리에게는 지혜요 하나님의 복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힘은 예수님 때문에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중보로 얻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4:16에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가까이 함으로 누리는 복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결론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있는 방법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평안이 있습니다. 은혜가 풍성합니다. 축복이 넘칩니다. 복음성가 가사에는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 가운데 너를 지키는 자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 말라 네 손 잡아 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네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는 좋은 노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가까이 합시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는 사람으로 삽시다. 하나님이 손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것으로 삽시다. 세상의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을 멀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복 가운데 사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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