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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에 성숙된 신앙생활 (약 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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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 성숙된 신앙생활 (약 3:1-12)


말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판사가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하면 죄수는 사형을 당합니다. 아무리 실력이 없어도 회사 사장이 “오늘부터 우리 회사에 나와 근무하라”고 하면 그날부터 그 회사 직원이 됩니다. 얼마나 말의 힘이 강한지 제가 가까운 사람을 통해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저와 함께 문학회에 속해 문학 활동을 했던 분이 계셨습니다. 이대를 나오셨습니다. 시집도 내었습니다. 

그런데 50대에 그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아들 둘이 있었는데 큰 아들은 공부를 잘하고 작은 아들은 조금 못한 것입니다. 부부가 작은 아들에게 무참히 살해 되었습니다. 신문을 읽어 보니 작은 아들이 어릴 적부터 부모로부터 무시와 모멸을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S 대학을 가지 못한 것을 꾸짖는 아버지에게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가 “평소 아버지는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며 꾸지람을 계속하였고 어머니는 청소년기부터 밥을 못 먹게 하는 것은 물론 머리가 나쁘다고 구박해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고 범행동기를 밝혔습니다. 

군대를 제대한 뒤 “스스로 돈을 벌어 복학하라”는 아버지 말에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말의 씨가 사람의 마음에 떨어지면 얼마나 큰 영향력을 주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대부분 말이라는 것은 한 번 말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씨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자라 말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씨가 어느 때는 사람에게 심겨져 활기를 줍니다. 용기를 줍니다. 절망을 극복할 힘을 줍니다. 슬픔을 이길 기쁨을 줍니다. 삶에 행복을 주는 씨가 됩니다. 그러나 어느 때는 절망을 심어 줍니다. 우울하게 합니다. 슬픔과 고통을 주고 사망의 씨로 심어집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우리 속담처럼 말은 씨가 되어 열매를 맺습니다. 말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말이지만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서는 그 말의 위력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1. 말의 위력 

1) 말은 우리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 줍니다(4). 

오늘 성경에 보면 말의 위력에 대하여 세 가지 비유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 4절에 보면 그 큰 배를 키 하나가 움직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배일지라도 키에 의해 방향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말을 하게 되면 사람은 그 말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물론 말에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말이라는 것이 사람의 마음에 심어지면 사람은 그 말을 아무리 무시하려해도 그 말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말을 하면 긍정적이게 되고, 적극적인 말을 하게 되면 적극적이게 되고, 낙관적인 말을 하게 되면 낙관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말을 하게 되면 부정적이게 되고, 소극적인 말을 하게 되면 소극적이게 되고, 비관적인 말을 하면 비관적이게 됩니다. 

MBC에서 한글날 특집(2009) 말의 힘에 대하여 실험한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실험 대상자들에게 30개의 단어 카드를 주며 5분 안에 3개의 문장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한 그룹에게는 노인을 연상하게 하는 단어를 한 그룹에게는 젊은이를 연상하게 하는 단어를 준 것입니다. 실험자들은 아무도 자신의 변화를 눈치 채지 못했지만 노인을 연상하게 하는 단어를 본 사람은 노인과 같이 느려졌고 젊은이를 연상한 사람들은 젊은이처럼 활기찼습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말이 들어가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사소한 한 마디가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엄청나게 바꾸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 극단적인 예사 유고의 티토 대통령입니다.

유고의 작은 시골마을 천주교 성당에서 신부가 미사를 집행할 때에 수종드는 아이가 잔을 떨어뜨려 포도주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그러자 신부는 그 아이의 뺨을 때리면서 "다시는 제단에 나타나지 말아라."하며 꾸짖었답니다. 그 아이가 바로 커서 반 기독교인이 된 대통령이 된 티토라고 합니다. 신부가 다시 미사를 집행하였는데 다른 수종드는 아이가 또 잔을 떨어뜨려 포도주가 엎질러졌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너는 커서 신부가 되겠구나."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그 아이가 바로 유명한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사실까>를 쓴 풀턴 쉰 신부라고 합니다. 말 한 마디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 것입니다.

2) 말은 내 소유를 파멸시킬 수도 있습니다(5-6).

작은 불씨이지만 그 불씨가 많은 나무를 태우게 되는 것처럼 말은 순식간에 우리의 모든 것을 태워 버릴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지만 말은 대단한 파괴력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쌓은 권력과 명성, 재물을 하루아침에 잃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말한 마디 잘못하여 정치적 권세에서 물러나는 정치인, 인기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연예인들을 보게 됩니다. 

중국의 고사성어 중에는 "촌철살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치밖에 안 되는 바늘을 가지고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말 한마디가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가 그 사람의 인격과 생애에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납깁니다. 

끔직한 살인 기계 역할을 했던 지존파 김기환씨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가 법정 최후 진술에서 털어 놓은 것은 17년 전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1977년 창 밖에 눈이 허옇게 덮여 있는 한 겨울날 초등학교 교실에서 그는 크레파스를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선생님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욕을 듣고 따귀를 맞고 벌을 서게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형장으로 가기 위한 법정의 최후 진술에서 "재판장님, 저는 그때부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미웠습니다. 모두 죽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사망의 씨로 박혀 한 시골 아이를 처절한 인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말은 무서운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3) 말은 우리의 행동을 통제하고 결정해 줍니다(3). 

3절을 보십시오. 말을 타는 말의 입에 물린 재갈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재갈을 조그마한 것이지만 말의 행동을 결정해 주고 통제하는 것입니다. 말은 힘이 없는 것 같지만 말함으로 자신이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말에 따라 살게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잠6:2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인간의 행동은 그의 언어에 지배를 받는 것입니다. 

MBC에서 밥풀 실험을 하는 것을 시청한 성도님들 계실 것입니다. 한 병에는 “고맙습니다”가 쓰인 종이를 붙이고 고운 말로 매일 말을 걸었고, 다른 한 병에는 “짜증나”를 적어놓고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4주 후 뚜껑을 열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병에서 하얀 곰팡이가 구수한 냄새를 피우는 반면, 짜증나 병에선 거무스름한 곰팡이가 심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습니다. 밥도 그런데 사람은 얼마나 더 그러겠습니까?

이렇게 말은 말의 재갈처럼 배의 키처럼 산불의 불씨처럼 통제력이 있고 영향력이 있고 파괴력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신앙인으로 이 말을 어떻게 다스리고 잘 활용하여 성숙한 신앙인답게 언어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답을 몇 가지 주고 있습니다.


2. 성숙한 언어생활

1) 우리는 타락한 언어의 속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6-8)/변화
6절부터 나오는 말씀은 혀의 부정적인 면 세가지를 말씀합니다.

첫째 혀는 불이요 불의(악)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6절). 말은 그만큼 파괴력을 가지고 있는데 본질적으로 악을 지향한다는 것입니다. 불의의 세계라고 말씀합니다. 혀는 진리의 세계 아니라 불의의 세계입니다.(요7:18, 롬2:8; 살후2:10,12) 이 말은 "허위와 기만의 세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온 몸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말씀합니다. 영원히 끌 수 없는 지옥불과도 같은 것입니다. 삶 전체를 망치게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혀는 길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7-8상)
능히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아주 단정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통제가 안된다는 것입니다. 온갖 종류의 짐승과 새와 기는 것과 바다의 생물은 사람에게 길들여질 수 있고 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나 혀를 길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말입니다. 혀는 스스로 제어하기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혀는 쉬지 않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8하)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혀는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인정하십니까? 혀 뿐 아닙니다.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일삼으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롬3:10-14)” 인간의 전적 부패를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없이 우리 혀가 내어 놓는 모든 것은 수치와 악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래도 나는 말에 의로운 사람이야 이렇게 생각하시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말의 근본적인 속성은 죽이는 것이고 파멸시키는 것이고 분열시키는 것이고 힘을 잃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연구가 한사람이 하루에 사람이 사용하는 단어의 수를 조사해 보았답니다. 남자가 하루에 사용하는 어휘 수는 약 1만 2000개이고, 여자는 약 2만 5000개라고 합니다. 일생동안 말을 하는 시간을 합하면 13년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말 중에 선한 말, 살리는 말, 용기를 주는 말은 얼마나 될까요? 

사람은 16세까지 자신에 관해 17만 3천개의 부정적인 메시지를 받는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긍정적인 메시지는 1만 6천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루 평균 29.6개의 부정적인 메시지에 겨우 2.7개의 긍정적인 메시지를 받는 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그대로 방치해 두면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것보다 부정적인 말을 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우리 인간은 하루에 5만∼6만 가지의 생각을 하고 그 많은 생각 중에 75%는 부정적인 생각이고 25%는 긍정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합니다. 

MBC에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15개의 좋은 말 나쁜 말을 들려 주니까 66%가 나쁜 말을 더 많이 기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합니까? 인간의 생각은 관리하지 않고 가만히 놓아두면 누구나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적으로 놓아 두면 부정한 말, 악한 말, 저주하는 말, 죽이는 말, 상처주는 말, 음란한 말, 호색하는 말, 비판하는 말을 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남을 칭찬하기 보다는 헐뜯기를 좋아 합니다. 그러므로 성숙한 언어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말도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 마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말의 주권을 주님께 내어 주어야 합니다. 언어생활을 잘하기 위해서는 새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말은 결국 마음의 표현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 15:18)”

마음의 자아가 왜곡되고 깨어진 거울처럼 되어있다면 그 마음의 자아에 반사되어 나오는 말은 자연히 왜곡되고 깨어진 말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러움에 내어버려둔 마음"(롬 1:24), "상실된 마음"(롬 1:28),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둔 마음"(롬 1:26)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바꾸어 져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근본적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타락한 언어의 속성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 성령의 사람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2) 언행일치의 생활을 추구하여야 합니다(1-2).-온전

오늘 본문은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선생은 선호하는 직분입니다. 그런데 왜 선생이 되지 말라고 했습니까? 오늘 성경은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1절에서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더 큰 심판이라는 것은 심판의 차등성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만큼 더 조심하라는 경고성 교훈입니다. 마12:36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심판의 날이 오면 각자가 지껄인 쓸 데 없는 말을 낱낱이 해명해야 하리라. 네가 한 말에 따라 너는 옳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도 하고 죄인이라는 판결을 받게 되기도 할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고 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2절에서 우리가 다 실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자신도 포함시켜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면 아무래도 말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말에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생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문자적으로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씀이겠습니까? 그러면 아무도 선생이 되지 않으면 누가 가르칩니까? 성경은 교사를 얼마나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까?(롬12:6-7; 고전12:27-29; 엡4:10-14)

야고보서는 행함에 대하여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지금 3장 1절 부터는 성숙된 신앙생활에서 말과 행함을 다루는 부분입니다. 행함이 없이 말만 많이 하는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현대어 번역에서는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남의 결점을 들추어내는 일에 열을 올리지 마십시오. 우리는 누구라 할 것 없이 다 많은 과오를 범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판단력을 가져야 할 우리 교사들이 악을 행한다면 더 큰 형벌을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약 3:1)"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말만 많이 하고 행함이 없는 선생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선생은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사명 속에서 살지만, 그것을 다 실천하면서 가르치기가 어렵기 때문에 야고보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합니다. 말로만 선행을 말하지 말고 행함으로 선행을 실천하라는 교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보편적 원리는 바로 언행일치의 성숙한 언어생활을 하라는 교훈입니다. 말하기는 어떤 면에서 쉽습니다. 남을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그렇게 행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말한 만큼 살 수 만 있다면 그 사람은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화려한 말파티 보다는 말한 만큼 실천하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그대로 행하였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목숨을 주시기까지 사랑을 실천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참 부족합니다. 우리는 몸으로 실천하는 것보다 남에게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누구나 말로는 좋은 경기를 할 수 있지만, 실제로 경기를 잘 하기란 훨씬 더 어렵습니다. 

가수 조영남의 어머님은 권사님이었다고 합니다. 남편이 병석에 눕자 어머니는 갖은 고생을 하며 3남 2녀를 키웠답니다. 어머니가 한 부업 중에는 가짜 꿀을 만들었답니다. 가짜 꿀을 만들면서 '내 주를 가까이'를 불렀고 휘휘 저으면서도 '주여, 주여' 기도를 했답니다. 훗날에 어머니에게 비양심적일을 따지니까 어머니가 "길케 안 하문 방세를 못 받는데 어카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국민일보가 설문 조사한 바에 의하면 '한국 교회 성장 둔화의 1차적 원인은 어디에 있다고 보는가'란 질문에 응답자의 35%가 '성도들의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꼽았습니다. 

"사람들에게 '성경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이렇게 행하십시오' 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나 자신이 그렇게 못할 때가 참 많습니다. 삶과 신앙의 불일치 문제는 전 세계 크리스천 모두가 싸우고 있는 실제적인 문제일 것이다. 

어느 부흥 목사님의 글을 보았습니다. 시골 교회에 부흥회 갔는데 새벽기도를 무려 4시간 동안이나 하는 할머니가 있었답니다. 며칠 후 밖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그 할머니였답니다. 4시간동안 새벽기도를 하고 귀가하는 길에 된장찌개에 넣어 먹으려고 남의 집 담장에 열린 호박을 따려다가 들켜서 싸우는 것이었답니다. 

실행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이라는 책으로 ''코비 신드롬''을 일으켰던 스티븐 코비박사가 정작 자신의 컨설팅 회사 ''프랭클린 코비'' 경영에서는 ''7가지 습관'' 을 실천하기는커녕 정반대로 행동, 주가가 폭락하고 회사 경영에서도 제외되는 등 망신살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비판하기를 코비는 판매 전문 ''약장수''라고 비꼬았습니다. 

말한대로 실행하는 것이 어렵다고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 9:23)” 우리 안에 지금도 살아계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슥4:6)”

3) 죽이는 언어가 아니라 살리는 언어생활로 훈련되어야 합니다(9-12). 

9절을 보십시오. 혀의 이중성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으면 변화된 혀를 가집니다. 전에는 찬양을 몰랐지만 찬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한 입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을 저주합니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 이유를 11-12절에서 말씀합니다. 

첫째는 샘이 한 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을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단물을 내는 샘이면 단물만 나온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화가 나무가 감람열매를 맺거나 포도나무가 무화과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결국 말을 통하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을 살리는 언어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말은 크게 나누면 죽이는 언어와 살리는 언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죽이는 말을 하면 자신을 죽일 뿐 아니라 그 말을 듣는 사람을 죽입니다. 
“노랫말 따라가는 가수운명”이라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산장의 여인을 부른 권혜경씨는 자기가 부른 '가사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 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있네…병들어 쓰라린 가슴을 부여안고/ 나홀로 재생의 길 찾으며 외로이 살아가네' 

이 노래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불과 2년 뒤 28세의 젊은 나이에 심장판막증에 걸리고 이후 후두암까지 얻었다고 합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고 명문학교를 나와 부러울 것 없던 그가 작사가 반야월 선생님을 찾아가 "하필 왜 내게 슬픈 노래를 줬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뺨이 몹시도 그리웁구나'라고 부르던 차중락은 낙엽이 지는 11월에 32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비에 젖어 한숨짓는 외로운 사나이가 서글피 찾아왔다 울고 가는 삼각지'지를 부른 배호도 안타깝게 29살에 요절했답니다. '내 곁을 떠나가던 날 가슴에 품었던 분홍빛의 수많은 추억들이 푸르게 바래졌소'를 불렀던 천재 음악가 유재하는 불과 25살에 죽었고, '하늘에 편지를 써'를 부른 서지원은 20살 나이에 세상과 이별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쨍하고 해뜰 날'의 송대관은 문자 그대로 노래한 곡으로 '쨍하고 해 뜬'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에게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살리는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수1:9)”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렘31:3)”

아내에게도 남편에게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어떤 아내가 자신은 교회에 나가고 남편은 교회에 나가지 않았답니다. 교회에 나가자 해도 술 때문에 나오지 못한다고 했답니다. 목사님이 술 먹도 된다고 했으니 교회에 나가자고 해도 안나가는 것입니다. 하도 조르니까 약속을 했답니다. 그런데 토요일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 온 것입니다. 교회 갔다오는 아내를 달래주기 위해 운전 연수를 시켜 주겠다고 했답니다. 차를 가져 오지 못해 차있는 곳에 가기 위해 나갔는데 앞서가던 남편이 갑자기 무단 횡단을 했답니다. 지나가던 트럭 운전사가 깜짝 놀라 남편에게 소리를 질렀답니다. "야~ 이 바보, 멍청이, 얼간이, 머저리, 쪼다야! 길 좀 똑바로 건너!" 이 말을 들은 아내가 남편에게 물었답니다. "당신 아는 사람이에요?" "아아니." "그런데 당신에 대해 어쩜 그렇게 잘 알아요?"

운전 연수를 시키는데 남편이 화를 내는 것입니다. 서로 기분이 상한 상태로 돌아오는길...
마침 차창 너머로 개한마리가 지나갔다고 합니다. 남편이 "당신 친척 지나가네. 인사라도 하지 그래~"라고 했답니다. 그러자 부인이 개를 향해 "그동안 잘지내셨어요~ 큰아주버님~"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죽이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패려한 자의 말과 말장이의 말(잠16:28)로 자기 의지만 고집하는 말버릇과 가시가 있는 말, 남을 흉보는 말(잠26:22), 저주하는 말이나 교만한 말 그리고 거짓말(시59:12), 과격한 말(잠15:1b), 악하고 더러운 말(엡4:29-31), 형제를 비방하는 말(약4:11)을 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말은 비수가 되어 상대방을 우울하게 만듭니다. 용기를 꺾어 버립니다. 삶의 소망을 없애버립니다. 열심을 떨어뜨립니다. 소극적이 되게 합니다. 비판적이 되게 합니다. 감정을 상하게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킵니다.

미국에서 어느 조사기관이 약 8,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연봉 10만 달러 이상의 고소득자가 연봉 2만5천 달러 이하의 빈곤층보다 2배정도 더 사과를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답니다.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손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이에게 "너는 왜 그렇게 머리가 나쁘니? "너 같은 아이는 내 자식이 아니야" "너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별일이네,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뜨겠구나"라고 하면 죽이는 말입니다.

5만번 이상의 기도응답을 받은 기도의 사람 조지 뮐러, 3000명 이상의 고아를 기른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뮐러도 청소년 시절에는 동네에서 부랑자였답니다. 아버지의 돈을 훔치고 거짓말을 일삼고 친구와 어울려 유흥업소와 경찰서를 자기집처럼 들락거리다가 결국 교도소를 다녀오기도 했답니다. 이런 그의 마음을 잡게 해서 오늘날 기독교사에 빛나는 성자가 되게 한 것은 말 한마디였답니다. “조지! 나쁜 버릇을 하루아침에 고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한번 택한 자녀를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낙심하지 말고 노력하면 넌 반드시 훌륭한 사람이 될 거야.” 어느날 동네 목사님에게 상담하러 간 그에게 목사님이 한 말이었답니다. 이 말이 조지 뮐러를 변화시켰습니다.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거짓이 없는 진실한 말(엡4:25). 선한 말(엡4:29). 칭찬하는 말, 용기를 주는 말, 선행을 격려하는 말, 감사의 말, 세워 주는 말, 위로의 말, 긍정적인인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은 믿음이 담겨 있습니다. 꿈이 담겨있습니다. 섬김이 있습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용기를 주고, 향기가 있습니다. 말이 행복을 만듭니다. 칭찬을 하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야, 참 잘한다.” “대단한데, 네가 최고다.” 긍정적인 자아상을 만들어 줍니다. 무식한 베드로였지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엡5:4).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이 아니라 감사의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긍정의 말을 해야 합니다. “안된다” “못한다” “어렵다” 보다는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도우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젓과 꿀이 흐르는 땅은 할 수 있다는 말을 한 사람만 들어갔습니다. 인정해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너는 중요한 사람이다. 너는 특별한 사람이고 하나님의 자녀이다. 앞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할 사람이다”라고 꿈과 소망을 심어 주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무시하고 창기를 무시하고, 병자를 무시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인정해 주고 소망을 주었습니다. 가정에서 "아빠는 훌륭한 사람이야." "당신을 만나서 행복해요." “너 때문에 엄마는 행복해” 이런 말을 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장에서 "우리 팀에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 다행이야." "김 대리는 내가 믿지."

그러기 위해서는 말하는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먼저 그 말이 사실인가를 확인해야 합니다. 단순히 자신의 감정이나 느낌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려고 해야 합니다. 둘째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상대에게 유익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셋째 그것이 사실이고 상대에게 유익을 준다고 하더라도 공동체의 덕을 살리는 말을 해야 합니다. 

잠언 18:21절은 말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에베소서4:29)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10-11절에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며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에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쫒으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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