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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말이 없는 구원 (막 16: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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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이 없는 구원 (막 16:14-20)


옛 사람들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생각하고 땅이 끝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마는 항해사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또 옛날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돼서 우주가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했지만 갈릴레오 같은 과학자들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고 그뿐만이 아니고 우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광대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시간이라는 개념도 성경은 시간이 끝나는 시점이 온다고 말하고 그것을 종말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과연 시간이 끝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오리라고 말씀하셨지만 이천년이 지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여전히 미래를 향해서 흘러가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재림이 여전히 지연돼서 앞으로 천년이 흐르고 이천년, 오천년, 만년이 흐르게 된다면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종말이란 무의미해지는 것이 아닐까. 이건 어떤 상징적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신다는 말씀은 요원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냐.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 뿐만이 아니고 성도들의 부활도 요원한 것이 되고 하나님 앞에 성도들이 다시 만나는 것도 요원한 것이 된다는 얘기냐. 이 모든 것을 종합할 때 종말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알 수 가 있는 것입니다.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이런 모든 것을 다 깨닫기에 인간은 너무 작습니다. 인간은 하루살이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천 년 앞은 고사하고 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에게는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지만 우리는 하루하루 사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우리가 깨닫기에는 너무 스케일이 큽니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홍수로 세상을 심판하리라고 하신 후에 몇 년이 지나서 비가 쏟아졌는지 아십니까. 백년이 지났습니다.

노아는 백 년 동안 방주를 지으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몇 년이 지나면 홍수가 올지를 하나님이 미리 말씀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냥 내가 비로 세상을 심판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는 언제 종말이 올지 알지 못하지만 믿고 순종하면서 방주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노아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생각됐을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마저도 아버지를 의심하는 때가 없지 않았을 것이고 노아 자신도 내가 얼마만큼 더 기다려야 되느냐 내가 착각한 것이냐, 잘못 안 것이냐, 내가 오해한 것이냐, 정말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루어질 것이냐를 수도 없이 물어봤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년이 지나서 정말로 비가 쏟아지고 그 홍수가 세상을 심판하게 될 때 그때 비로소 노아의 믿음과 순종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이 된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결국은 그것이 이루어질 때 그것을 믿었던 사람의 믿음이 변증되는 것입니다. 

믿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우리 자신이 지키고 남들에게 좀 더 자신만만하게 증명하고 싶어도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신다고 믿지만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내가 나를 높일 수 없고 원수 갚는 일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하시지만 그때가 되기까지는 우리가 원수를 용서하고 내가 스스로 원수 갚으려고 하지 않고 미운 마음이 나를 다스리지 않게 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인내할 수밖에 없는 그런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오실 줄 믿지만 그 때와 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그 때가 내일이 될 수도 있고 백년 후가 될 수도 있고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세월이 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래라 저래라 요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의 마지막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제자들은 그때가 언제인지를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여 주의 나라를 이루실 때가 이때니이까’ 시간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언제 이루어질 것이냐에 대해서 여쭤봤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아주 엄격하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시와 때는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이게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인데 얼마나 엄합니다. ‘그 때와 시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건 하나님이 정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다만 성령이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그 때와 시는 알 수 없지만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리라 예수님 약속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성령이 오셨고 성도들이 권능을 받았고 그리고 아직 다 끝나지는 않았지만 땅 끝을 향하여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이 옳은 것을 보면 다른 말씀도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스케일이 작습니다.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저는 경제 신문을 즐겨 읽는데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들도 금융위기, 경제위기를 극복할 지 아니면 더블 딥 위기가 올지 어떻게 될지 헤맵니다. 이것이 인간이에요. 주가가 올라갈지 내려갈지 금값이 더 올라갈지 부동산 값이 폭락할지 아무도 몰라요. 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한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정상입니다. 인간은 모르는 존재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다 깨닫지 못한다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한에 속한 것은 하나님이 이루실 줄을 믿고 우리는 우리의 할 일을 하면 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케네스 헤이건 이라는 목사님이 요한계시록으로 설교를 하는 중에 시간의 성경적인 정의를 발견했습니다. 시간을 과학적으로 정의할 수도 있고 물리학적으로 철학적으로 시적으로 정의할 수도 있지만 성경적인 의미에서 시간이란 무엇이냐. 

특별히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시간은 첫째는 유예기간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그때 심판하실 수 있었는데 심판하지 않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어요. 그렇기 때문에 유예기간입니다. 

덤으로 주신 기간이라는 뜻이고 둘째로 시간은 인간이 문명을 더 발전시키고 과학이 발전하고 우주를 탐사하기 위한 기회로 주신 것이 아니고 궁극적으로 시간은 사람이 회개하고 믿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게 시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말이라는 것은 이제 그 기회가 끝났다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성경이 종말을 말할 때는 이제까지 믿지 않은 사람은 이제 기회가 없다는 뜻이고 이제 심판이 온다는 얘기입니다. 성경말씀에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다음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어요. 

오늘날 기독교를 말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기독교를 모르면 지성인이 아니에요. 기독교를 모른다면 지금까지 동굴 속에서 산 사람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를 알고 예수님을 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정말로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은 천국과 영생과 죄사함과 구원을 말하지만 동시에 심판과 정죄와 멸망과 죽음과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심판이 없다면 구원이라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돼 버립니다. 만일 정죄가 없다면 죄사함은 불필요한 것이 돼 버립니다. 정죄하지 않는데 죄사함이 무슨 유익이 있다는 얘기입니까. 

만일 멸망이 없다면 영생이라는 것도 불필요한 것이 돼 버립니다. 예수님 말씀에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셨는데 멸망이 없다면 영생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구원이라는 것은 구조-rescue, 어디에서 구조한다는 뜻입니다. 화재가 났는데 화재로부터 사람을 구제하고 가난으로부터 사람을 구호하고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건지는 것이 구원이에요. 그런데 우리를 건질만한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무늬만 구원이지요. 무의미한 것이 돼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심판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실존적이거나 심리적인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마음에 평강을 얻고 인생에 보람을 얻고 그래서 의미 있게 살자, 인간답게 살자, 이걸 위하여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것이 우리의 목적의 전부라면 예수님 없이도 우리는 얼마든지 평강을 얻을 수 있고 얼마든지 보람 있는 삶을 어떻게 해서든 찾아나갈 수 있습니다. 그걸 위해서 예수님이 오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없어도 사람은 얼마든지 평강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진짜 구원이에요. 노아의 홍수가 있었던 것처럼,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멸망시키셨던 것처럼 심판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처럼 분명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16절에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이보다 더 분명할 수 없습니다. 이보다 어떻게 더 구체적으로 말합니까. 정죄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 구원이라는 것은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신앙고백은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고백에 있어서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사도신경을 외울 때 사도신경은 믿음의 고백이지요. 내가 이것을 믿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거기에 종말론적인 신앙고백이 들어있습니다. ‘저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신앙이요 심판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예수님이 처음 오셨을 때는 구세주로 오셨지만 재림하실 때는 심판주로 오십니다. 산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 오십니다. 그 뿐만이 아니고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영생, 몸의 부활,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죄사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건 종말론적인 신앙고백이에요. 

내가 세상을 떠나면 천국 가는 것을 믿는 것 뿐만이 아니고 역사의 흐름, 시간의 흐름에 끝이 오고 심판하는 날이 오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날이 올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앙고백뿐만이 아니고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가사도 유심히 보면 마지막 절, 거의 대부분의 찬송가의 마지막 절은 종말론적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어린이찬송가라고 생각하는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주일학교에서 많이 부르는 노래 아닙니까. 

그렇기 때문에 주일학교용이고 어린이용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 찬송가의 마지막 절을 보면 ‘나를 사랑하시고 나의 죄를 다 씻어 하늘 문을 여시고 천국가게 하시네’라는 고백이 있습니다. 이건 종말론적인 신앙고백입니다. 제가 장례 예배를 많이 인도하면서 병원 영안실에 가면 교회 다니는 상가들이 많이 있어서 예배드리는 것을 보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제가 느끼는 것은 장례예배를 드릴 때 거의 장례용 찬송가만 부르는 교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전 그걸 보면서 평소에 찬송가를 안 불렀기 때문에 저렇지 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굳이 장례식용 찬송가를 부르지 않더라도 일반 평소에 부르는 대다수의 찬송가에는 천국에 대한 신앙고백과 종말론적인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의 4절을 보면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찬양 하리라’ 이건 천국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또 40장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찬송가 같은데 4절을 보면 ‘내 주 예수 세상에 다시 올 때 저 천국으로 날 인도하리’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또 찬송가 470장 ‘내 평생의 가는 길’ 4절을 보면 ‘저 공중의 구름이 일어나며 큰 나팔이 일어날 때 주 오셔서 세상을 심판해도 나의 영혼은 겁 없겠네’ 많은 사람들은 종말을 두렵게 생각합니다. 종말 하면 사람들은 재앙 ․ 지진 이런 식으로 두려워하는데 믿는 사람에게 종말은 두려운 것이 아니고 기쁜 것입니다. 

춘향전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수년 전에 신문을 보니까 어떤 분이 춘향전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해서 상당한 종말론적인 메시지가 담겨져 있다고 분석을 했는데 정말로 그렇습니다. 춘향은 교회를 상징하고 멀리 떠난 이 도령은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변 사또는 세상의 임금입니다. 세상의 임금이 믿는 자를 핍박하고 변절을 요구하는데 춘향은 이 도령에 대한 그 사랑을 변치 않고 온갖 핍박을 견디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침내 이 도령이 과거에 급제해서 암행어사가 되어서 올 때 변 사또에게는 두려운 일이지만 춘향에게는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과 심판과 종말도 이와 같습니다. 변 사또에게는 두려움이에요. 그야말로 끝이에요. 그러나 예수님의 신부인 교회에게는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말이 ‘마라나타’였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은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는 뜻입니다. 요한 계시록이 마라나타 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냥 ‘주여 오시옵소서’가 아니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이것이 예수 믿는 사람의 소망이에요. ‘예수님 어서 오시옵소서. 예수님 얼굴 뵙기를 원하고 예수님 만나기 원합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에요. 내가 이 세상에서 돈을 벌수도 있고 공부를 할 수도 있고 복을 받을 수도 있지만 결국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니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너무 정들면 안돼요. 이 세상에 너무 친해지면 안돼요. 세상이 너무 좋아서 예수님이 늦게 오셨으면 좋겠다, 그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서 성공할 수도 있고 출세할 수도 있고 복을 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집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천국 백성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혜로운 처녀들처럼 기름을 예비하고 신랑 올 것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오시는 때를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때는 분명 잔치하는 날이요 기쁜 날이요 상 받는 날입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마다 엔딩이 있지요. 제가 수년전에 왜 사람은 문학을 읽는가, 스토리를 읽는가 하는 수필을 읽었는데 사람이 스토리를 읽고자 하는 이유가 엔딩이 궁금하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엔딩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작품에서 엔딩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위로를 얻고 힘을 얻는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화를 볼 때나 책을 읽을 때 해피엔딩이 될까 세드엔딩이 될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저의 아이가 즐겨보기 때문에 저도 같이 본 최근에 종영된 구미호라는 드라마가 있는데 마지막 에피소드까지 해피엔딩이 될지 세드엔딩이 될지 사람들이 궁금해 하던데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해피엔딩이다를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해피엔딩 잘 끝난다를 말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잘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잘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시고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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