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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부 사람들의 원망과 불만을 조심하라 (느 5: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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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사람들의 원망과 불만을 조심하라 (느 5:1-19)


요즘 느헤미야서를 나누고 있는데, 느헤미야가 유다백성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벽을 쌓아올릴 때 그들에게는 비전과 믿음과 희망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비전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못합니다. 믿음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못합니다. 또 우리에게 보이는 희망이 없고, 천국이 없으면 하나님의 일을 못합니다.

유다백성들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환경을 뒤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성벽을 쌓았습니다. 특별히 외부 세력의 공격에 두려워하지 않고 열심히 성만 쌓았습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습니다. 직업이 없다는 게 아니라, 자기 인생 가운데 해야 할 일, 죽을 때까지 이뤄야 할 목표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돈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건강이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닙니다. 자기 인생 가운데 할 일이 없기 때문에 불행한 것입니다.

유다백성들이 성벽을 계속 쌓아 올리는 것만큼 외부 세력의 공격도 심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비전과 믿음과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어렵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외부 세력보다 더 심각한 공격은 내부 세력의 원망과 불평입니다. 마음 가운데 있는 원망과 불평은 사탄보다 더 무서운 것입니다. 사탄은 믿음과 기도와 말씀으로 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부에 있는 원망과 불평을 이기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연약함을 하나님도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하면서 슬그머니 넘어가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위기입니다.

원망의 소리가 커진 백성들

1절부터 5절까지 읽겠습니다. “그때 백성들과 그 아내들 사이에 그들의 유다의 형제들을 원망하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에게 자녀가 많다. 우리 자신을 비롯해서 많은 식구가 먹고살기 위해서는 곡식을 얻어야 한다’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우리는 기근 동안 곡식을 얻기 위해 우리 밭과 우리 포도원과 우리 집을 저당 잡혔다’라고 말했으며 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세금 낼 돈을 꾸기 위해 우리 밭과 포도원을 잡혔다. 우리는 우리 친척들과 한 몸이요, 한 핏줄이다. 보라. 우리의 자식들은 그들의 자식이나 다름없는데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종으로 내주게 됐다. 우리의 딸 가운데 일부는 이미 종으로 팔렸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남의 것이 됐으니 우리는 그들을 속량할 힘이 없다.’”

이 일은 느헤미야 시대에만 있는 게 아니라 지금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일입니다. 불만에 대해 처음에는 말을 안 하다가 심해지면 원망과 불평으로 변해 집단적으로 이런 말을 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아내와 다투기 시작했습니다(1절). 주로 아내들은 살림을 하고 남편들은 일을 합니다. 남자는 비전으로 살고 여자는 현실 속에 사는 것입니다. 성벽을 쌓느라 일을 못한 남편들이 돈을 벌어다주지 않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에게 “오늘 쌀 떨어졌소. 오늘 애들 밥 먹일게 없소”라고 얘기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남편들이 “지금 어느 땐데 그런 말을 하시오. 지금 우리가 성벽을 쌓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배가 고프더라도 참아야지”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부부싸움을 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벽을 완성하는 기간은 52일입니다. 남자들이 52일 동안 돈을 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남편의 실수도 아니고 부인의 실수도 아니고 하나의 상황입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는 기근 동안 곡식을 얻기 위해 우리 밭과 우리 포도원과 우리 집을 저당 잡혔다”고 말합니다. 사실 히브리인들은 이방인들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같은 동족끼리는 이자를 못 받게 돼있습니다. 율법에 저촉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생활이 너무 어려워지니까 돈 있는 사람들과 돈 없는 사람들 사이에 간격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주면서 ‘이자를 내라. 저당을 잡혀라’고 요구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관리 등 상류층입니다. 그들은 돈을 빌려주면서 백성들의 집을 모두 뺏고 땅도 뺏고 이자도 받았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의 생활이 너무 어려워져 자녀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됩니다. 특히 딸이 팔려가 종처럼 사니까 백성들의 불만과 원망의 소리가 커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

이 얘기를 듣고 느헤미야는 화가 났습니다(6절). 왜냐하면 틀린 말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거룩한 분노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분노에는 하나님의 분노와 사람의 분노가 있습니다. 정의라는 것도 인간의 관점에서 보는 정의가 있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정의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정의는 모두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는 정의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보고 상을 뒤엎고 채찍을 휘두르면서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거룩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이 오죽했으면 노아 홍수를 일으켰겠습니까. 오죽했으면 소돔과 고모라를 유황불로 심판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분노는 심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느헤미야가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를 들었을 때 인간적인 분노를 표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7절부터 8절까지 읽겠습니다. “내가 속으로 이것들을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귀족들과 관리들을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지금 각기 자기 형제에게 폭리를 취하고 있소!’ 나는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 큰 집회를 열고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방 민족들에 팔려 갔던 우리 유다의 형제들을 힘닿는 대로 속량해 오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당신들은 여러분의 형제들을 또 팔고 있단 말이오.’ 그들은 할 말이 없어 침묵했습니다.”

화가 났지만 곰곰이 생각했다는 것은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 지 하나님께 물어본 것입니다. 그리고 얻은 결론은 관리들이 자기의 직업과 권력을 이용해 백성들의 재산을 착취를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귀족들과 관리들을 꾸짖습니다.

느헤미야는 꾸짖기 전에 기도하고 준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하고 준비된 얘기를 하면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듣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는 것도 영적 권위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들리면 서로 싸우지 않습니다. 특별히 우리 목회자들이 영적 권위를 잃어버리면 아무 것도 못합니다. 영적 권위 때문에 성도들이 순종하고 따라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가진 자들을 책망하는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기도한 후에 귀족들과 관리들을 불러서 “당신들이 지금 각기 자기 형제에게 폭리를 취하고 있소”라고 꾸짖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큰 집회를 열었습니다.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귀족들이 자기 직책을 이용해서 폭리를 취하고 있는 것에 대해 화가 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역사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보게 합니다. “우리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있을 때 우리 유다의 형제들을 힘닿는 대로 속량해 오지 않았소? 그런데 지금 당신들은 여러분의 형제들을 또 팔고 있단 말이오”라고 꾸짖습니다. 요즘도 전 세계에 흩어져있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려오기 위한 사역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로 귀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돈이 없어서 귀환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위해 우리 교회도 비행기 값과 배 삯을 보내주는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서울에 상상할 수 없는 물폭탄이 터졌습니다. 그래서 광화문 일대가 물바다가 되었고 강서지역 등 몇몇 지역 주민들이 수해를 입었습니다. 주로 저지대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부자들은 모두 높은 데 살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면 피해를 당하는 사람은 주로 서민들입니다. 지하에 사업장이 있는 영세업자들도 수해를 입어 서민경제가 더 어려워진 실정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

느헤미야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렇게 지적하기 쉽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정치적 현실을 알면서도 자기 정치적 생명을 내놓고 지적한 것입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계속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하는 일은 옳지 못하오. 이제 여러분이 이방 민족들의 비방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하지 않겠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기도를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아닙니다. 주변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 억울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2장 25절을 읽겠습니다. “네가 네 곁에 있는 가난한 내 백성 가운데 누구에게 돈을 꿔 주었다면 너는 그에게 빚쟁이가 되지 말고 이자도 받지 마라.”

레위기 25장 35절을 읽겠습니다. “네 형제가 가난해져서 네 가운데서 먹고 살기가 어렵다면 너는 그를 먹여 살려야 한다. 나그네와 임시 거주자가 네 환대를 받으며 함께 거하듯이 그는 너와 함께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해보면 알겠지만 유태인 중에는 거지가 없습니다. 유태인 사회에서는 거지를 용납하지 않는답니다.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주변에서 먹여 살리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그들을 도와주고, 돈을 빌려줬더라도 이자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누르면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이 느헤미야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정의

우리가 느헤미야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첫 번째, 하나님의 영광을 회복하기 위해 성벽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한 단계 나아가 사회 개혁을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집만 짓는 것이 비전이 아닙니다. 공정한 사회가 되도록 개혁을 하는 것입니다. 후반부로 가면 종교 개혁이 일어납니다. 종교가 썩으면 사회가 부패하고 경제가 망하게 됩니다. 어느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방법은 교회가 정직해지는 것입니다. 교회가 정의를 행한다는 것은 가난한 자, 불행한 자들을 돌보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신명기 23장 20절을 읽겠습니다. “이방 사람에게는 이자를 물려도 되지만 네 형제에게는 꾸어 주고 이자를 받지 마라. 그래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들어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네 손이 닿는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다.”

여러분 모두 복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진정한 복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복이야말로 영원한 것입니다.

정치란 권력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권력이란 돈과 명예를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지도층이란 권력과 돈과 명예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조심해야 할 것은 교회가 커지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겸손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작은 교회들이 살아납니다. 절대 내세우지 말고 조심히 일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어렵게 가진 사람들을 꾸짖었는데 이스라엘의 귀족들이 “말씀하신대로 다 준행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순종했습니다(12절). 여기서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영적 권위고, 영적 리더십의 핵심가치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얘기를 합니다. “나는 유다 땅 총독으로 임명되던 해, 곧 아닥사스다 왕 20년부터 32년까지 12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지만 나와 내 형제들은 총독의 몫으로 나오는 녹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14절). 그리고 전에 총독들은 백성들에게 힘겨운 세금을 물리고 백성들의 재산을 갈취했는데 자신은 하나님을 경외했기에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15절).

12년 동안 권력의 중심에 있었는데 월급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횃불트리니트신학교 총장이 됐을 때 학교가 어려워서 총장 월급을 받지 않았습니다. 교회에서 월급을 받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받을 필요가 없어서 지금도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계속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관행을 깨지 않으면 개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느 사회나 어느 종교집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관행을 깨야 합니다.

절제하는 리더십

16절부터 18절까지 읽겠습니다. “나는 땅 한쪽도 사지 않고 오직 이 성벽을 쌓는 일에만 헌신했고 내 부하들 역시 성벽 쌓는 일에만 마음을 썼습니다. 또한 150명의 유다 사람과 관리들이 내 상에서 음식을 먹었고 또 주변 나라에서 우리를 찾아온 이방 민족들도 함께 먹었으므로 날마다 나를 위해 황소 한 마리와 좋은 양 여섯 마리, 닭 여러 마리 그리고 10일에 한 번은 온갖 종류의 포도주도 풍성하게 마련해야만 했습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나는 총독의 몫으로 나오는 음식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요구가 백성들에게 큰 짐이 됐기 때문입니다.”

눈물 나는 이야기입니다. 느헤미야 자신은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리더로서 외국에서 손님이 오면 대접도 해야 되고 부하들도 대접해야 하지만 자기에게 정당하게 주어진 음식도 모두 요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고도의 절제요, 청빈이요, 모범적인 리더십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런 리더십으로 가득차기를 바랍니다. 일본도 느헤미야와 같은 리더가 정치를 하고 사회를 이끌어 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축복이 그 나라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19절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이여, 제가 이 백성들을 위해 한 선한 일을 기억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소서.”

느헤미야가 쓴 소리를 하고 나서 마지막에 한 것은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 하나님 도와주시옵소서”라는 기도입니다.

개혁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서서히 일어나지만 끊임없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가 투명해지고 깨끗해지고 사회에 모범이 될 때 사람들이 크리스천들을 존경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를 떠나려던 사람들도 교회로 되돌아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올 것입니다. 여기에 부흥의 비결이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온누리교회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교회가 되고, 그런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용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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