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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셉의 DNA (창 41: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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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DNA (창 41:46-52)

   
지난 9월 초, CBS기독교방송에서 옥한흠 목사님 추모특집 좌담회를 가졌습니다. 사회자가 내게 고인(故人)과의 추억이나 가르침, 다짐 등을 말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에서 그분의 설교를 들었던 기억, 무척산기도원에서 단둘이 토론했던 기억, 사랑의 교회에서 훈련받은 기억 등을 말하며, 앞으로 그분을 닮아 이렇게, 이렇게 사역을 하겠노라는 다짐을 피력했습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분이 대뜸 ‘방금 목사님이 옥한흠 목사님을 닮아 그분과 같이 되겠다고 했는데 그것은 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분과는 유전자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순간 무척 당황스러웠습니다. 물론 그 자리는 추모하는 자리니까 그러려니 생각했지만 유전자로 친다면 거기 있던 사람들 중에서 내가 그분과 제일 가깝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유전자(遺傳子)라는 것이 있습니다.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됩니다. 유전학의 창시자인 그레고어 멘델은 부모로부터 물려받는 유전적 형질이 자식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1940년대 DNA라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DNA란 유전형질을 전달하는 복잡한 유기화학적 분자구조를 뜻하는데 모든 살아있는 세포에는 다 존재합니다. DNA란 그 생명체의 ‘생명체됨’을 규정짓는 뿌리, 근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DNA의 특징은 긴 사슬로 이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세포를 형성하고 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DNA가 긴 사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DNA구조를 사슬형태로 창조하셨을까요? 그것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 행동, 모습 등은 어떤 식으로든지 관계와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체,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인간, 그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속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재창조된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 그것은 관계입니다.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요셉이야말로 특별한 DNA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요? 요셉, 그는 도대체 어떤 구조의 DNA를 가지고 있었을까요? 어떤 관계가 튼튼하고 건강했을까요? 드디어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보통 총리가 아닙니다(창 41:42-43). 바로의 말대로 그가 요셉보다 높은 것은 왕좌뿐이었습니다(창 41:40). 그가 얼마나 실권자였는지는 ‘사브낫바네아’란 이름에서도 묻어나고 있습니다(창 41:45). 그 뜻은 ‘세상의 구원자’입니다. 요셉, 그는 명실 공히 온 애굽의 최고 실권자로 등극했습니다. 그야말로 특이한 유전자, DNA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첫째, 그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가는 수많은 군상들 속에서 그는 코람데오(Coram Deo)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잘 유지했습니다. 상황에 따라, 환경과 처지에 따라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선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는 것입니다. 입을 열었다하면 그래도 하나님입니다. 오해를 받아도, 모함을 받아도, 구렁텅이에 떨어져도, 배신을 당해도 하나님입니다. 첫째를 낳아도, 둘째를 얻어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끝까지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습니다. 

둘째, 타인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했습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를 도와주기는커녕 하나같이 그에게 해를 입히려는 자들이 아니었습니까? 하지만 요셉은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어떤 이는 시기, 질투, 모함, 배신을 하지만 요셉은 결코 마주 대항하거나 복수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이게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요셉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언제나 중요하게 생각하며, 그들이 어떤 태도로 나오든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이것이 그의 DNA입니다. 

지난 금요일, 각 교단의 총회장을 위시한 한국교계지도자 40여명과 통일부 장관 및 대북(對北) 관계자들이 모처에서 대북지원정책포럼을 가졌습니다. 정부의 통일정책을 듣고, 교계에서는 북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결국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로마서 12장의 ‘원수’(롬12:19)에 대한 성경해석까지 등장했습니다. 결론은 ‘10월 3일이 통독(統獨) 20주년인데 독일 통일이 어느 날 갑자기 온 것이 아니라 40여 년 동안 교회가 동독(東獨)을 꾸준히 도왔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이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쪽으로 모아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요셉은 자신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했습니다. 계속하여 실패하고, 하는 일들마다 풀리지 않습니다. 한두 해도 아니고, 무려 십년이 넘도록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을 자학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시기 전까지는 절대 끝이 아니다. 전반전은 끝났지만 후반전이 아직 남아 있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내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선다. 이 시련을 통해 더 빨리 간다. 성장한다. 열매를 맺는다. 나는 내 비전에 전부를 건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이다. 여기 이곳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렇게 그는 자신과의 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 이웃, 자신과의 관계가 건강했습니다. 이런 DNA를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일까요? “요셉이 그의 장남의 이름을 므낫세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내게 내 모든 고난과 내 아버지의 온 집 일을 잊어버리게 하셨다 함이요 차남의 이름을 에브라임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이 나를 내가 수고한 땅에서 번성하게 하셨다 함이었더라”(창 41:51-52). 고대(古代)인들은 자식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마음, 심중을 드러냈습니다. ‘므낫세, 잊는다. 에브라임, 결실한다’란 뜻입니다. 이 두 이름이야말로 요셉의 인생철학, 좌우명이었습니다. 

이렇게 살았던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3-14). 이 사도 바울의 고백 속에서 잊어버림, 그리고 번성에 대한 외침을 발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셉의 DNA를 이어받기 원합니까? 요셉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 이웃,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가 튼튼하길 원합니까? 매일 매일 수없이 ‘므낫세’, ‘에브라임’을 반복하여 외치십시오. 분명 DNA, 즉 관계가 튼튼해질 것입니다. 관계가 튼튼해지면 분명 요셉의 복이 나에게도 찾아올 것입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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