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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겨울이 오기 전에 (딤후 4: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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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오기 전에 (딤후 4:9-22)


I. 시간

「자연은 인생의 스승」이란 말이 있습니다. 자연의 흐름속에서 우리는 자연의 일부인 인생의 흐름을 배울 수 있지요. 예수님께서도 자연을 보면서 진리를 가르치곤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겨울을 통해 인생의 종말을 가르쳐 줍니다. 계절에 겨울이 있듯이 인생에도 종말이 있습니다. 오늘이 당신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 무엇을 가지고 설 수 있을까요?

충청도 사람들이 좀 느리고 여유가 있어서 죽는 것도 천당가는 것도 천천히 갈 것 같다고 어떤 사람이 농담을 했더니 아니랍니다. 죽음에 관해서는 충청도 사람이 제일 급하답니다. 경상도 사람은 “고마 돌아가셨다 아입니까” 전라도 사람은 “아따 돌아가 버렸당께” 충청도 사람은 한마디로 끝내버린답니다. “갔슈”!!

너도 가도 나도 가고 빠른 사람도 가고 느린 사람도 가고 우리 모두다 가게끔 되어 있습니다. 

겨울을 보내는 동물들의 지혜를 보면, 
첫째 철새나 사슴처럼 자신들이 살기 좋은 곳으로 이동하는 동물들이 있고 
둘째 먹지도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죽은 듯 땅속에서 동면하여 겨울을 나는 동물이 있는가 하면 
셋째 털갈이를 통해 두툼한 털을 만들어 도망가지도 피하지도 않고 겨울을 직면하는 동물들이 있습니다. 

인생의 겨울을 맞이하는 사람들도 우선은 철새형, 동면형처럼 부정적으로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두려워 떨기만 하는 사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웅크리고만 있는 사람, 세상과 쾌락으로 도망가 살아보겠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가치관의 털갈이, 우선순위의 털갈이, 믿음의 털갈이를 통해 종말을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준비합니다.

헬라어로 시간이라 할때 크로노스란 말이 있고 카이로스란 말이 있습니다. 

크로노스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속하는 시간을 말합니다. 반드시 겨울은 옵니다. 한번 태어난 인생 반드시 한번은 죽습니다. 이건 크로노스입니다. 그러나 시간속에는 내가 요리하고 지혜롭게 쓸 수 있는 카이로스가 있습니다. 이 카이로스는 동면으로 시간을 버릴 수도 있고 털갈이로 직면할 수도 있는 나만의 시간입니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도문 중에 이런 기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고칠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고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고 고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냉정함을 주시옵소서. 또한 고칠 수 있는 것과 고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인생의 봄에 부지런히 씨를 뿌리고 준비한 자가 여름날 인생의 성장을 경험할 수 있고 가을에 추수하여 행복한 겨울을 보낼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쌀살해지는 가을의 문턱에서 인생의 가을 나아가 인생의 겨울이 있음을 기억하여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우리는 한해의 마지막 주일을 보내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이 「겨울이 오기 전에」입니다.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4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긴 매카트니 목사님은 매년 가을이나 연말 이 본문을 가지고 꼭 같은 설교를 했는데 「인생의 겨울이 오기 전에」이 설교를 하는 날이면 입추의 여지없이 시민들이 몰려와 그 설교를 들었다고 합니다. 

II. 왜  겨울 전에?

오늘 본문 9절을 통해서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21절에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사도 바울의 애절한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는 겨울 전에 어서 오라’는 간절한 전보를 보내야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① 그것은 사도 바울이 여기 기록한 대로 “자기의 최후가 임박한 것을 예감한 까닭입니다.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워진 것을” 그는 스스로 깨달았습니다. 자기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즉 순교를 하기 전에 자신의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를 보고 싶었고 또 최후로 친히 만나서 하나님이 그에게 부어주신 은사도 나누고 부탁할 말씀도 있었을 것입니다. 

② 거듭해서 오라고 하며 특별히 겨울 전에 오라고 재촉했습니다. 그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그때는 지중해를 겨울엔 항해할 수 없었습니다. 가을에 배가 떠나지 않으면 겨울을 지나서 적어도 넉 달 후에야 다시 배가 지중해를 항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디모데가 가을에 오지 못하면 4-5개월 후에야 로마에 오게 될텐데 그 동안에 자기 신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겨울 전에 오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옛날엔 겨울이 오기 전에 준비해야 할 일이 참 많았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김장외엔 별로 준비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의 겨울도 준비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간관리의 지혜를 잃어 버렸습니다.

여기 겨울 전에 오라는 말은 기회가 지나기 전에 오라고 하는 말입니다. 기회가 지나기 전에 할 일이 있습니다. 인생이 무엇인가? 인생은 곧 기회입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많이 왔는데,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기회는 금방 지나 갑니다. 
힘써 공부하고 멋진 내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전도서 3장을 읽어보면 만사에 기한이 있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항해할 수 있는 때가 있고 항해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여행할 수 있는 때가 있고 여행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일할 수 없는 때도 옵니다. 공부할 수 있는 때가 있는가 하면 공부할 수 없는 때도 옵니다. 씨를 뿌릴 때가 있고 추수할 때가 있고 추수할 수 없는 때도 있습니다. 인간생활의 성공과 실패는 이 기회를 바로 포착하여 할 일을 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기회가 있을 때에 기름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신랑이 더디 올지라도 넉넉히 기름을 준비한 까닭에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다섯 처녀는 등은 준비했지만 기름을 충분히 준비 못했다가 신랑이 더디오니까 불이 꺼졌습니다. 그때에야 기름을 구하러 나갔습니다. 그 사이에 신랑은 왔고 문은 닫혔습니다. 손님은 다 들어갔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이 문을 열어 달라고 아무리 두드려 보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기름을 준비할 기회에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은 신랑을 맞지 못했습니다. 

천국 갈 기름을 준비할 수 있는 때가 있고 더 이상 준비할 수 없는 때가 있습니다. 문이 열려 있는 때가 있고 매달리고 애원해도 열리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기름 떨어진 줄 알았더라면 부지런히 채웠을 것을! 
여러분은 기름 떨어진 줄이나 알고 사십니까?
여러분의 기름 등은 충만하십니까?

그러므로 여러분 천하만사에 다 기회가 있습니다. 영적 준비나 사역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이 기회는 지나갑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야 합니다. 세상일에만 분주하신 분들! 늘 자신의 기름 등을 점검하십시요. 은혜 받을 때 은혜를 받고 믿음이 자랄 때 성장을 해야 합니다. 헛된 세상사에 시간 다 보내고 하나님 나라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는 늘 인색 하기만한 초라한 삶을 살지 맙시다.

III. 기회는 지나간다

회개에도 기회가 있고, 성공에도 기회가 있습니다. 주어진 기회를 붙들 그릇이 되지 못하면 그 기회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수없이 많은 성공의 아이디어, 축복의 기회들이 지나가고 있으나 그것을 붙들지 못하면 내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는 하루 24시간 동안에 10만 가지 이상의 기회가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답니다. 엄청난 기회가 우리 앞을 지나가고 있지만 그것을 붙잡지 못해 별 볼일 없이 인생을 허비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꿈이 없는 백성은 방자히 행한다고 안타까와 했습니다. 비전이 없는 사람은 하루를 보내도 시간을 방자히 사용합니다. 심지어 자기 몸도 함부로 관리합니다. 애인을 사귀고 친구를 만나도 생각없이 사귑니다. 

초대교회 전설에 의하면, 디모데는 겨울이 오기 전에 오라는 스승 사도 바울의 편지를 받고 즉시 떠나지 못하고 교회에 쌓여진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지중해로 나갔더니 이미 겨울 찬바람에 항해가 중단되었습니다. 하여, 그 이듬해 이른 봄에 스승을 찾아 갔으나 바울은 이미 옥중에서 순교하였고 디모데는 스승의 무덤을 끌어안고 울고 또 울었지만 후회와 한을 풀 수 없어 천추의 한이 되었더랍니다.

속히 오되 겨울 전에 오라는 바울의 부름에 디모데가 응답했더라면 디모데는 스승 바울의 영력을 전수받고 아니 갑절의 성령을 받아 디모데의 영향력으로 인해 초대 기독교의 모습은 아주 달라졌을 것이라는 것이 후대 사가들의 말입니다. 넉넉한 임파테이션을 경험하므로 또 다른 자신의 제자들에게 그 임파테이션을 나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기회는 순간입니다. 그래서 기회의 신은 앞머리는 풍성한데 뒷머리는 대머리라고 합니다. 내 앞에 있을 때 붙잡아야지 지나고 나면 붙잡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부탁하고 있습니다. 활동하기에 불편한 겨울은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 시간은 크로노스의 시간입니다. 인생의 겨울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겨울이 오지 말 것을 기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고 오히려 겨울을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카이로스를 준비하는 겁니다.

IV. 용서의 기회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 앞서 6, 7, 8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할 당시 그의 나이는 약 70세쯤으로 추측됩니다. 그는 이제 인생의 겨울을 맞이한 것입니다.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고 전제와 같이 부음이 되고” 부음이 되었다는 것은 피를 쏟아서 준비된 제단에 부었다는 뜻입니다. 

“피를 쏟아 붓는 제사가 이미 드려지고 나의 생은 이것으로 끝난다” 이 말은 이미 순교 - 즉 생의 마지막 순간을 내다보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두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 점점 추워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런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옷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그는 육신적인 의미에서 만의 겨울을 맞이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고독한 겨울을 맞이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났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으니 이제는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주위에 있는 이들이 모두 가버린 뒤 혼자 겪는 외로움이 그를 더욱 춥게 만든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자기의 생을 반성하며 마가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었고 사도 바울이 제1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에 따라 갔었습니다. 그러나 도중에 병에 걸려 보름정도 꼼짝 못하고 고생하였습니다. 이때 사도 바울은 마가를 간호하느라고 애를 썼을 뿐만 아니라 그를 위하여 주야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마가는 병이 겨우 완쾌되자 무슨 까닭인지 사도 바울과 동행할 것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때 바울은 몹시 당황스러웠고 섭섭했었습니다. 

그후 2차 전도여행을 다시 떠나려 할 때 마가는 바울을 찾아와서 동행할 것을 간곡히 부탁하게 되었습니다. 마가가 이번에는 도중하차 하지 않고 끝까지 동행할 것을 아무리 맹세를 해도 사도 바울은 끝내 허락하지 않고 거절하였습니다. 이 일로 이번엔 마가의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제 겨울이 다가오고 최후의 날이 가까워 오자 바울은 마가와의 일을 괴로워하며 매우 마음 아파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그는 이 시간 그를 만나 화해도 하고 또 그를 격려해 주고도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마가를 데려오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겨울이 다가올 때 꼭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찾아가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서로의 잘못을 가리기 이전에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사실입니다. 꼭 만나서 화해하고 용서해 주어야 할 사람은 없습니까? 

내가 섭섭하면 반듯이 상대에게도 상처가 있습니다. 내 가슴만 생각하지 말고 상대의 아픔도 헤아려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그것이 유익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남아프리카의 바벰바 부족사회에서는 반사회적인 범죄행위가 좀처럼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시 그런 행위가 일어날 경우, 그들은 우리와는 달리 상당히 흥미로운 의식으로 죄지은 사람을 계도합니다. 규범에 어긋난 행위를 저지른 부족원을 마을 한가운데에 세웁니다. 그러면 모든 부족원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그 부족원 주변으로 모여듭니다. 어린아이도 빠지지 않습니다. 모여든 모든 부족원들은 그 부족원을 둥그렇게 에워쌉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가운데 세워진 부족원이 그동안 베풀었던 선행을 한가지씩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의 건설적인 속성과 능력, 선행, 친절한 행위 등 모든 것이 빠짐없이 열거됩니다. 거짓말을 하거나 과장하거나 우스갯소리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의식은 며칠을 두고 이루어집니다. 부족원 모두가 죄지은 사람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어 칭찬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불만이나 무책임하고 반사회적 행위에 대한 비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족원 전체가 잘못한 그 부족원의 칭찬거리를 다 찾아내면 의식이 끝나고 즐거운 축제가 벌어집니다. 그리고 잘못을 했던 부족원은 다시 부족의 일원으로 환영받으며 되돌아오게 됩니다. 이처럼 부족원 모두가 참여하는 긍정적 형태의 심판은 실수한 부족원의 자존심을 최대한 살려 주면서 그로 하여금 부족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살도록 만드는 효과를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러한 색다른 심판 때문에 이 사회에선 범죄행위가 없다는 겁니다. ( 󰡔아주 특별한 우표 한장󰡕 중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용서의 첫 단계는 상대방의 실수와 허물을 덮어주는 것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한 것을 알고도 상대방을 덮어주려 할 때에 상대방은 비로소 변하게 된다고요.”

창세기 9장에서 노아가 술에 취한 적이 있습니다.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잠을 자는데 함이라는 아들이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떠들며 아버지를 힐난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함을 저주해 버렸습니다. 그 다음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기 위하여 등을 지고 뒷걸음질쳐 들어가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줍니다. 그때 성경은 “하나님께서 셈의 하나님이 될 것이다”라고 축복하였습니다. 왜요?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덮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덮어주는 사람들입니다. 

남의 허물을 들추어서 비웃는 사람은 저주받은 함의 후예요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하는 사람은 복받은 셈의 후예들입니다. 

이 겨울이 오기 전에 김장독을 덮듯이, 노아의 하체를 덮듯이 덮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겨울이 오기 전에 덮어 줍시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듯이 나도 이웃에게 용서를 선언하십시다.

세계적인 영성학자인 헨리 나우웬이 교통사고로 죽음의 경계까지 갔다가 회복해서 쓴 「거울 너머의 세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산다는 것보다 죽는 것은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죽을때 나도 죽음으로부터 자유해야 하지만 내 죽음을 통해서 나와 관계맺은 모든 사람도 자유케 해야 한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억울하게 만들고, 나에게 섭섭하게 했던 그 사람들까지도 풀어 주어서 내가 죽은 이후에 그들이 자유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죽음에서의 또 하나의 해방이다.”

참으로 놀라운 얘기입니다. “내가 남과 화해하고 죽는 것은 내게도 자유지만 그 사람을 용서하고 죽는 것은 그 사람에게도 자유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에게 자유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넓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자기를 죽이는 원수들에게 “아버지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들의 죄를 사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도 자유지만 저들에게도 자유를 주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닮았던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을 때 “주 예수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저들의 하는 짓을 저들은 알지 못하옵니다”하고 죽었습니다. 저들을 용서해 줌으로 스데반도 용서의 주님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들도 나중에 회개하고 자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귀하지 않습니까? 

내 입에서 비난과 상처의 말들이 난무합니까? 당신의 가슴이 지옥이라 그렇습니다. 
내 입에서 늘 감사, 칭찬, 격려, 남의 장점을 살려 주는 말이 나옵니까? 당신의 마음이 천국이라는 뜻입니다. 

V. 말씀 앞에 서야 할 시간

또한 바울은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 가죽 종이란 헬라어로는 “비블리아” 곧 바이블, 성경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가져오라고 합니다. 지금은 인쇄술이 발달하여 성경책을 갖고 다니기가 편하지만 그 당시의 성경은 가죽 두루마리로서 너무 무거워서 갖고 다니기 불편하였기 때문에 안면 있는 집에 부탁해 놓고 다녔습니다. 임종이 가까워짐을 느낀 바울은 이제 맡겨 놓은 그의 성경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합니다. 임종이 가까워 오니 이 성경을 다시 한번 더 보아야 겠다는 겁니다.

금년 시작할 때 잘살아 보리라 결심했는데 또 헛되이 한해를 보내게 생겼습니다. 남은 시간 선용하여 멋진 한해를 보냅시다. 지난 일년간 우리의 삶을 말씀 앞에 세워 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남겨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까지 가지고 갈만한 뭐가 좀 남아 있습니까? 허무한 것들 뿐입니까? 성경을 가지고 오너라. 성경의 거울 앞에 서 보고 싶었던 게지요. 

겨울이 가까워졌을 때에 과연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시겠습니까? 하고 싶은 말을 소리질러 해보고 싶습니까? 오히려 귀를 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겨울이 가까이 올수록 더욱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하겠습니다. 죽음이 가까이 오면 이것 저것 해야 할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사도 바울처럼 멀리 둔 성경책을 찾아다가 좀더 진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겠습니다.

조용히 말씀 앞에 무릎을 꿇어 보십시다. 성경책을 가까이 하십시다. 거기에 겨울을 이길 수 있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다. 겨울을 아는 사람은 영적인 일에 힘을 씁니다. 영원한 세계, 하늘 나라를 준비할 줄 압니다. 말씀이 능력입니다. 그 말씀으로 천지가 창조되었고 그 말씀 앞에 귀신은 놀라 도망가고 그 말씀 안에서 새 역사가 일어납니다. 비전채플에서 함께 살 새가족 한명도 얻지 못하고 이 해를 보내시겠습니까? 부끄러운 일입니다. 전도하십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본문 14절은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라고 말씀합니다. 구리 세공업자란 옛날에 구7리로 우상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이 우상을 만들어 장사하는 사람들이 사도 바울로 인하여 장사에 막대한 손해를 보았기 때문에 바울을 심히 괴롭혔습니다. 바울에게는 그의 목회사역을 방해하던 아주 원수와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괴롭히던 사람들에 대하여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하며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내가 더 이상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께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너도 그를 주의하라”고 얘기할 뿐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의 고담이나 역사에 보면 자기 자식들에게 ‘자기의 원수를 갚아 달라’고 유언을 하고 죽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식들은 원수를 갚느니라고 일생을 모두 허비해 버리고 마는 이야기들... 이 얼마나 허망한 인생들입니까?

사도 바울은 “전에 나를 괴롭히던 사람들이 있으니 너도 그들을 주의하라. 그러나 주께서 그들이 행한대로 갚아 주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모든 것을 주께 맡겨 버려라.” 우리들에게 당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에게도 한해의 겨울, 인생의 겨울, 역사의 겨울이 다가와 오고 있는데 아직도 남을 비판하고 내 모든 운명의 잘못이 남에게 있다고 원망을 해야 합니까? 결코 국가나 사회나 가정이나 환경을 탓하지 맙시다. 허물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지도 맙시다. 오히려 감사해야 할 사람들을 찾아보고 감사하는 기회를 가져 봅시다. 내가 불평하는 그 사람들과 입장을 한번만 바꿔 생각해 보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가을, 과일 몇 개라도 사들고 감사해야할 사람을 찾아 보는 여유를 가십시다. 
눈 감으며 후회하지 말고. 

∙ 사장에게 불평했습니까? 내가 사장이라면 나 같은 사람 쓰고 싶을까? 감사하자!
∙ 내가 남편이라면 나 같은 아내로 만족할까?  감사하자!
∙ 내가 부모라면 나 같은 자식 두고 행복해 하실까?  부모님께 감사하자!
∙ 내가 며느리라면 나 같은 시어머니를 좋아할까?  그래 감사하자!
∙ 현재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의 은혜요 감사할 뿐입니다.
∙ 살아온 인생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 아픔 통해 하나님을 만났고 내 영이 깨끗해졌습니다.
∙ 원한을 품고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버리십시오. 
   모두 - 겨울이 오기 전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입니다.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말입니까? 아이들은 자라고 있고 나도 나이가 들어갑니다. 이제는 남의 허물 속에서 나를 보십시다. 시비 걸려고 하지말고 허물을 남에게 묻지 마십시오. 자식이나 남편에게 잘못이 있어도 내 탓이라고 하십시오. 실수는 그가 했지만 원인은 내게 있는 것을.

어느때까지 그 인간 타령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인격을 망가뜨리겠습니까?

이 한해동안 내가 겪은 일, 내가 만난 사람, 내가 경험한 사건에 긍정적으로 반응하셨습니까? 언제나 사건보다 중요한 것은 사건에 대한 해석이요 반응입니다.

역사상 위대했던 인물들은 모두 부정적 환경을 긍정적으로 대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VI. 겨울은 온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랑하고 겨울이 오기 전에 멋진 일을 하십시다. 

가정생활에도 겨울이 옵니다. 또 부부가 20년 30년 함께 살다보면 서로가 서로를 귀한 줄을 모릅니다. 남편은 저녁에 집에 들어가면 아내가 맛있는 밥을 지어놓고 기다리지요. 아내도 으레 저녁이 되면 남편이 돌아오는 것이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날엔가 저녁에 돌아와야 할 남편이 없어 쓸쓸한 벽이 당신을 반기는 날이 옵니다. 서로 귀한 줄 알고 서로 아끼고 서로 속썩이지 말고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랑하십시다. 젊은이 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도 곧 당신 곁을 떠납니다. 효도하세요. 속썩이지 마세요. 예배에도 겨울이 옵니다. 이처럼 은혜로운 예배를 그리워 할 날이 옵니다.

교회에서도 주일 봉사하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셀을 섬기고 비전을 이루고 심방을 하고 찬양대에서 찬양하던 그 일에도 겨울이 옵니다. 찬양대도 보면 나이드신 권사님, 장로님들이 옛날 생각하고 찬양대에 앉아 보는데 자꾸 음이 플렛이 되고 샵이 됩니다. 바이브레이션이 심해집니다. 그땐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시간입니다. 더 늙기 전에 열심히 하세요.

우리 인생은 일방통행입니다. 한번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합니다. 겨울이 옵니다. 오늘 본문 마지막 21절을 유심히 살펴보면 겨울 전에 오되 “너는 어서 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 몰라도 너만은 어서 오라는 간곡한 부탁입니다. 너만은, 너라도 겨울 전에 와야 합니다. 디모데만이라도 겨울이 오기 전에 바울을 만나야 했습니다. 겨울이 옵니다. 사역도 생명도 끝날이 있습니다.

너도 가고 나도 갑니다. 진실하게 성실하게 사십시다. 비전을 이루는 일에 성실하십시다. 헌신도 건강할 때, 헌금도 있을때 천국에 쌓으세요. 겨울이 옵니다. 

하나님의 앞에 나를 드리는 일에도 이제는 성실하고 진실하십시다. 
사람들 앞에서도 그 초라한 모습 벗어 던지고 진실하고 성실하십시다. 
당신은 존귀한 존재입니다. 존경받고 존귀함을 받는 사람이 되십시요.
「인생의 겨울이 영광스러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앞에서 잘 산 사람입니다.」(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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