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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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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 여호와를 알자 (호 6:1-3)


필립 얀시(Philip Yancey)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 이란 책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스페인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남미 대륙에 도착했을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스페인 선원들이 탄 돛배가 아마존 강 상류에 도착했습니다. 강폭이 너무 컸기 때문에 선원들은 아직 대서양에 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때 선원들 중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죽음의 원인은 갈증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짠 바닷물 위에 떠 있는 줄로 알았기 때문에 물을 떠 마실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풍부한 생수의 한 복판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갈증으로 죽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바다와 물에 대해 최고의 지식을 자랑했던 스페인 선원들은 안타깝게도 바다와 물에 대한 무지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들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가장 기본적인 지식을 알지 못한다는 교훈을 알려 줍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BC 750년에서 북왕국이 멸망한 BC 722년경까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여로보암 2세가 죽고 난 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패역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아는 4장 1-2절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뒤이음이라.” 여기의 ‘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야다(yada)인데 ‘체험적으로 안다’ 는 뜻입니다. 

즉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았고, 열심히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았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 머리로 교리적으로만 알았지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울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도 살지 못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왜 하나님의 선지자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엇을 알라는 말씀입니까?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헤세드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녀와 같이 방탕한 생활을 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합니다. 고멜과 같이 세상 연락을 좇아 음란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신실하신 사랑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주께 돌아가기에

필립 카츠(Philip Katz)는 컴퓨터 파일을 압축하는 집(Zip)기술을 세계 최초로 개발하여 엄청난 돈을 벌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2000년 4월 14일 미국 중서부 위스콘신주 밀워키의 싸구려 호텔방에서 시체로 발견 되었습니다. 마시다 만 위스키 병이 왼손에 쥐어져 있고 머리는 무엇에 부딪혀 한쪽이 움푹 패어 있었습니다. 한때 수백만 장자로 돈 많은 재벌이었던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몰골이었습니다. 그는 23살에 획기적인 압축프로그램을 개발했고 PK웨어라는 회사를 차려 Microsoft와 IBM등 세계적인 회사들을 고객으로 확보하여 일순간에 백만장자로 뛰어 올랐고 주체할 수 없이 돈을 벌었습니다. 

미국의 메스컴이 연일 그에 대해서 말하고 모든 사람들이 천재라고 칭찬했습니다. 그렇게 돈을 많이 벌었지만 그는 자기 인생을 절제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술을 마시고 방탕하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있지 아니하여 술 중독에, 섹스 중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완전히 술과 여자로 재산을 모두 탕진했습니다. 그 결과 몇 년 후에 빈털털이가 되어 싸구려 호텔방을 전전하다가 37세의 젊은 나이에 비참하게 죽고 만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을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통제를 받을 때가 가장 행복할 때입니다. 주님의 통제를 받고 주님 품안에서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합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하나님의 통제를 받지 않고 살려고 하십니까? 불편하고, 싫어도 하나님의 통제를 받고 사는 것이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면 다 용서하시고, 하나님이 가지신 온갖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입혀 주십니다. 

본문 1절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이라” 돌아가는 것은 방향전환을 의미합니다. 즉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돌아가자고 피 끓는 호소를 하고 있습니다. 주께로 돌아가는 것만이 삶의 길이라고 외칩니다. 신앙생활은 중심을 찾아가는 과정입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를 알게 된 후 이전에 소중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갈지자 행보를 계속하는 까닭은 아직 중심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이 죄를 깨닫고 당신을 찾기까지 기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돌아오기만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욕심과 죄의 유혹에 이끌려 어둠 속을 방황했던 이들이 돌이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힘써 알아 돌아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둘째로 주 앞에 살기에

외솔 최현배(崔鉉培) 선생은 일제 때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3년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옥고를 치르고 나온 후의 일입니다. 외솔 선생의 집 앞마당이 항상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습니다. 매일 새벽에 마당을 쓸고 가는 낯선 청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이웃 사람이 청년에게 매일 아침 마당을 쓰는 까닭을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함흥 감옥에서 선생님과 한 방에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배탈이 나서 크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저를 보시고 굶으면 낫는다고 하시며 혼자는 어려울 터이니 같이 굶자시며 종일 저와 함께 굶으셨습니다. 

선생님은 밤늦게까지 저의 아픈 배를 어루만지면서 정성껏 돌봐 주셨지요. 아무도 돌보아 주는 사람이 없는 감옥에서 받은 은혜를 어떻게 해서라도 갚고 싶었지만 가진 것이 없는 처지라 선생님의 집 마당이라도 쓸어 드리자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살려주면 그의 앞에 있는 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은 오히려 일으켜 세워놓으면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속담처럼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놓으면 보따리 내 놓아라는 배은망덕한 사람도 있습니다. 

본문 2절입니다.“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그의 앞에서란 말은 그의 얼굴 앞에서란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까닭은 그의 얼굴 앞에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사라지면 하나님은 불편해하십니다. 섭섭해 하십니다. 죽을 걸 살려줬더니 자기 욕심대로 사는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죽을 걸 살려줬으면 그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프레드릭 마이어(F.B. Meyer)는 말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자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일으킴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영원히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으킴 받은 자의 자세입니다. 일으키면 하나님 앞에서 살고, 하나님 앞에서 살 때 가장 아름다워집니다. 여호와를 힘써 알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살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를 맞이하기에

동화작가 권정생(權正生)은 ‘우리들의 하느님’ 이란 그의 저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번은 시내에 나갔다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완행열차를 탔더랍니다. 기차 안에서 아주머니가 자리를 내주며 앉으라 했습니다. 곧 내린다며 사양 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어코 권선생을 앉혔습니다. 권선생은 자리에 앉아 무심코 아주머니께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반색을 하면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해하면서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아주머니는 의성에 있는 시골교회 집사인데 십년 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습니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던 아주머니는 귀찮은 생각에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 가보라’며 거지를 내쫓았습니다. 그런데 돌아서 나가는 거지의 뒷모습을 보니 놀랍게도 예수님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멈추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퍼서 달려 나가 보았으나 거지는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예수를 진리와 생명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이 마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까? 언제 예수께서 오신다 해도 맞이할 수 있도록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권선생은 이야기 끝에 여태껏 들은 설교 중에 진짜 설교를 들었다고 덧붙이고 있습니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은 이야기 말고, 예수 만나 삶이 변화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의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본문 3절입니다. “새벽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호세아는 우리 가운데 오시는 주님의 모습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은혜는 예기치 않게 찾아옵니다. 마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은 사람은 알아차릴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심코 지나칠 것입니다. 삶이 어려울수록 하나님은 먼 데 계신 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힘써 하나님을 알 때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익숙한 모습으로도 다가오시지만, 때로는 아주 낯선 모습으로도 다가오십니다. 아니 주님은 벌써 우리를 향해 오고 계십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 때 주님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은 노년에 기억상실증에 빠져 이름도 몰랐습니다. 나이도 몰랐습니다. 답답해하던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이 알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입니까?” “내가 다만 아는 것은 두 가지인데 나는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님이 내 구주시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힘써 알아야 합니다. 힘써 주님을 아는 것만이 사는 길입니다. 삶의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가을의 길목에서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 앞에서 사는 길입니다. 그 길만이 하나님을 맞이하는 길이 됨을 믿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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