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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엡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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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에서 새 사람으로 (엡 4:17-24)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을 진행하는 동안 그가 일관성 있게 활용한 화두는 ‘변화’(change)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국민들의 이런 변화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한 새 시대의 리더로 선택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선거 캠페인 동안 사용한 문장 중에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 문구들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변화에 굶주려 있습니다.”(We are hungry for change) 
“우리는 변화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We are ready to change) 
“예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Yes we can) 
“예 우리는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Yes we can change) 

그는 투표에서 그의 승리가 확정되는 순간 그의 당선 스피치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의 승리 그 자체가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는 아닙니다. 오늘의 승리는 우리에게 변화의 기회를 제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우리는 변화를 가져올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는 여러분이 없이는 가능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우리는 함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될 수 있습니다.(Yes, we can. We can change. Together We can change.)”

변화는 인간의 가장 깊은 갈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거 때마다 정치인들이 우리가 기대하는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줄 뻔히 알면서도 또다시 변화를 기대하며 한 표를 던집니다. 그만큼 변화는 포기될 수 없는 인간의 갈망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변화-정말 가능할까요? 사실은 성경도 인간의 변화를 낙관하지는 않습니다. 

렘13:23에 보면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표준 새 번역은 이렇게 옮기고 있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자기의 피부 색깔을 바꿀 수 있느냐? 표범이 자기의 반점들을 다르게 바꿀 수 있느냐? 만약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죄악에 익숙해진 너희도 선을 행할 수가 있을 것이다.” 매우 비관적인 전망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본문은 복음을 전합니다. 인간이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옛 사람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러면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길-무엇일까요? 본문은 우리가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기 위해 알아야 할 변화의 정보를 제공합니다. 

1. 옛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옛 사람의 본질을 크게 세 가지로 묘사합니다. 그는 무엇보다 마음이 허망한 사람이며, 총명이 어두워진 사람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1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하지 말라” 

여기 ‘사용된 ‘허망’이란 단어는 본래 희랍어의 mataiotes인데 ‘결과가 없는 헛된 것’ 영어로 vanity, futility란 단어로 번역되는 말입니다. 하나님 모르는 이방인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헛되고 헛된 것입니다. 결국 솔로몬 왕처럼 인생의 마지막에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들에 사람들은 목을 매고 삽니다. 내가 모아들인 재물, 내가 추구한 권력, 내가 추구하는 오락이 나의 삶에 정말 의미를 주고 후회하지 않을 보람을 안겨다 줄 열매일까요? 결국 마지막에 내가 왜 이런 것들에 목을 매고 살아왔을까 후회하게 하는 헛된 것은 아닐까요?

옛 사람의 또 하나의 특성은 총명이 어두워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믿지 않는 사람도 믿는 사람 이상으로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그들은 전적으로 어두워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스티븐 호킹도 그런 사람 중의 한 사람에 불과 합니다. 이것은 영적 어둠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해 보면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들이 왜 그렇게 영적인 일에는 무지한지 모르겠다는 안타까움이 가슴을 치게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예수님도 유대의 최고의 지성, 철학과 종교를 가르치던 랍비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어머니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영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바울은 결국 그 원인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18절을 읽겠습니다.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성경은 한마디로 이방인 곧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상태를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런 영적 죽음의 한 원인은 마음의 굳어짐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영적인 일에 반응하지 못합니다. 시체가 반응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체는 웃지도 울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도 성령의 역사에도 반응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옛 사람, 하나님을 모르고 희망 없이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결국 그들은 결과적으로 이 땅의 쾌락에만 매달리는 자포자기 인생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자포자기>의 뜻을 아시나요? “자기가 할일은 포기하고 자기가 하지 말아야 할 일에는 기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19절의 증언입니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이런 옛 사람의 삶에 계속 머물러 계시겠습니까? 아니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런 삶에 머물러 있도록 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들이 새 사람을 입도록 도와주시겠습니까? 


2. 새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흠모하는 변화된 사람의 본질을 한마디로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본래의 인간, 하나님이 맨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기대하셨던 사람됨의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의 만물의 창조 역사가 진행되면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그 종류대로>라는 단어입니다. 새는 새 같이, 말은 말같이, 개는 개같이 지으셨다고 말입니다. 소위 ‘종’에 의한 창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과학이 만물을 그 종대로 분류하고 ‘종의 기원’을 탐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에 오면 달라집니다. 인간은 인간 같이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을 닮은 존재 곧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 Imago Dei)대로 지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의 독특성이며 인간을 모든 종과 구별하는 인간의 존엄성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사람은 새로운 종의 출현이 아닌 본래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을 닮은 존재에로의 회복인 것입니다.

본문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새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선 그는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새 사람이 되면 의를 갈망하며 의가 실현되기를 기도하며 사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새 사람은 또한 진리의 옷을 입은 거룩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진리 그 자체이시고 진리로 인생을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도 진리로 무장하고 거룩한 영향을 끼치는 자로 한 평생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당신의 제자들을 위한 마지막 기도의 제목을 아십니까? 요17:17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그렇습니다. 본래의 인간 그리고 하나님이 새롭게 하고자 하시는 사람은 “아버지의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세속의 유혹을 극복하며 거룩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곧 진리의 거룩함을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새 사람됨을 사모하지 않으시는 지요?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이 또 한 이런 새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소원하지 않으시는지요?

3.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 길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 변화의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21절이 그 해답을 들려 줍니다.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 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여기 강조된 단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그에게>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다는 것은 단순히 설교나 성경 공부의 강의를 청취하는 수준이 아닙니다. 

요5:25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참으로 듣는 순간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부활 영적인 소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도 롬10:17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가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면 그는 새로운 생명을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고후 5:17을 기억하십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우리가 성자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순간이 그렇게 오래동안 기다리던 변화의 시작을 제공한다는 말입니다. 미 합중국 대통령 오바마는 자신이 정권을 잡는다고 해서 한 순간 변화가 실현되지는 않을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우 주의 깊게 당선 스피치에서 그는 그의 당선 그 자체가 변화를 담보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변화의 시작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변화는 시작됩니다. 그러나 그 변화의 속도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진리의 말씀을 얼마나 진지하게 배우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제대로 배워야 한다고, 21절에서는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받아야 한다고 역설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순간이 우리가 옛 사람의 옷을 벗는 순간이 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새 사람다운 새 옷을 입고 아무도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약속하지 못한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본문 22-23절의 약속이요 권면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 주일 우리는 수지 성전에서 시작하여 <블레싱 축제>를 시작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웃들에게 변화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한 축제입니다. 오바마가 미국인들에게 과연 그들이 기대한 변화를 제공할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진지하게 경험한 모든 사람들은 이런 분명한 변화를 간증합니다. 

1900년대 초 미국 오하이오주에 살던 맥 다니엘(1914,McDaniel) 이란 분이 자기 둘째 아들을 졸지에 읽고 깊은 상심에 빠졌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위로가 되지 못한 채 그는 다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삶의 중심에 계시기를 구하는 영접의 기도를 드리면서 놀라운 회복을 경험합니다. 

이 때 쓰여진 유명한 찬송 시가 바로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라는 찬송입니다.(찬289장, 통일208장)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하여 새 사람 되고/내가 늘 바라던 참 빛을 찾음도/주 예수 내 맘에 오심 (2)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머리 털 보다도 더 많던 내 죄가 눈보다 더 희어졌네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이런 고백을 목격하고 싶다면 우리가 할일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복음의 말씀, 진리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에 올수 있도록 초대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 주일입니다. 수지 성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의 사랑하는 이들을 축복의 자리로 인도하십시다. 그들로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이 되는 축복을 경험하게 하십시다. 할렐루야!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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