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안전지대 (시 12:5, 시 46:1-3)

  • 잡초 잡초
  • 655
  • 0

첨부 1


안전지대 (시 12:5, 시 46:1-3)


I. 이 땅에 안전지대는 없다. 

유명인사 남편과 이혼한 맥은 딸 사라와 함께 뉴욕 맨하튼의 한 고급 주택으로 이사를 옵니다. 그 집에는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자신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는 안전공간 - 패닉룸(Panic Room)이 있습니다. 그 방은 어떤 충격에도 견딜 수 있을만큼 견고한 벽으로 둘러 쌓여있고 방안에는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을만큼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습니다. 심지어 집안 구석구석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는 모니터, 그리고 경찰과 연결할 수 있는 특수 전화 등이 구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모녀가 이사온 그날밤 세 명의 괴한이 침입합니다. 그 집 전 주인이었던 할아버지가 남긴 막대한 유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손자녀석이 그 패닉룸의 설계사와 특수 절도범을 데리고 침입한 것이었습니다. 맥과 사라는 그들을 피해 가까스로 안전공간 패닉룸안으로 들어가지만 괴한들이 찾는 유산이 바로 그 패닉룸안에 숨겨져 있었습니다. 방안의 모녀는 외부로 연락할 수단을 잃게되고 딸의 당뇨병 때문에 모녀는 그 방안에 마냥 머물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때부터 모녀와 세명의 괴한이 벌이는 공포스럽고 스릴넘치는 한판 승부가 펄쳐집니다. 

조디 포스터 주연으로 얼마전 개봉 상영된 패닉룸이라는 영화이야기입니다. 여기서 패닉이란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 상황"을 말합니다. 이 영화는 가장 안전하다는 방이 오히려 공포와 두려움의 방으로 변하는 역설을 통해 이 땅에는 네가 꿈꾸는 안전지대란 없다는 사실을 세상에 선언하고 있습니다. 

국어 사전에 보면 "안전지대"란 「도로를 횡단하는 보행자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곳」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요. 아이러니컬하게도 보행자들의 안전을 위해 정해 놓은 그 안전지대 안에서 가장 빈번하게 가장 큰 사고들이 발생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게 세상의 모순입니다. 이 모순된 세상에서 인간들은 자신의 안전지대를 오늘도 찾고 있습니다. 

근간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열망이 가히 광적이라 할만 합니다. 최근 한국사회가 병들어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 - 둘이 있습니다. 자살과 해외이민 신청자의 급증입니다. 최근 자살로 죽은 사람이 고통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많아졌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나라도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메달권에 들어선 모양입니다. 우리주변에 이민을 가고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이 기하 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민 상품이 T.V. 쇼핑의 대박상품이 되었고 이민 박람회가 열리면 수천 수만의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모양입니다. 이민 열풍, 이민 광풍이라고들 합니다. 왜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전문가들의 진단은 사회가 마냥 불안해졌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서 있는 땅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낄 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북한의 핵무기를 포기시키기 위해 별의별 노력과 회담을 해보지만 여전히 불안하기만 합니다. 음식도 농산물도 마음놓고 사 먹을 수가 없습니다. 가축들은 무슨 놈의 병이 그렇게도 많은지 언제 어떤 보도가 나올지 모릅니다. 직장도 사업도 안전하지 못합니다. 중동에서는 또 어떤 소식이 전해질지 초조해 집니다. 내일 아침 신문엔 우리를 짜증나게할 어떤 부정과 부패 소식이 전해질지 모릅니다. 

이는 우리나라 우리사회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는 미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의 자존심은 무너졌고 미국이란 나라는 이제 안전의 나라가 아니라 아주 위험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매일같이 병기 난사 사고가 일어납니다. 언제 어디서 어떤 테러가 발발할지 모릅니다. 생화학 무기 테러에 대한 공포심 때문에 방독면이 미국에서는 불티난 듯 팔린다고 합니다. 

기억하십시다.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는 없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 가정은 대한민국에서는 전쟁공포증 때문에 살 수 없다고 가산을 정리하여 오래전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슈퍼마켓을 하다가 남편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한국이 불안하다고 한국을 떠났는데 이제는 미국이 불안하다고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성경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성경은 환란과 재난을 피할 수 있는 어떤 특별한 장소가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특별한 장소 즉 지명을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상 많은 요새들이 더 많은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곳으로 피했던 사람들이 더 많이 죽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전이란 지리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세계 최고의 등반가하면 이탈리아의 라인홀드 메스너를 꼽습니다. 그는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을 무산소 등정했던 사람이요 세계 8,000m 이상되는 모든 산을 정복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자기집 담장 3m를 오르다 낙상하여 발목골절상으로 병원 신세를 졌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II. 안전지대를 찾는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지대는 우리인류의 소망이요 꿈입니다. 

이 땅에서 풍파를 겪어본 사람은 풍파없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좋은 것인가를 알지요. 중병을 앓아본 사람은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사업이 무너지고 가정에 큰 아픔을 겪어본 사람은 안정된 생활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압니다. 교회생활의 갈등을 겪어본 사람은 행복한 교회생활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안전지대를 원합니다. 가정이 교회가 사업이 경제가 국가가 안정되기를 얼마나 바라며 살아왔습니까? 그러나 시시때때로 슬픔과 실망의 광풍이, 실패와 환란의 모진 바람이 우리를 무자비하게 내려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산넘어 남촌에는 행복이 있고 안전지대가 있을 것 같습니까? No! 이 땅은 마치 바다와 같아서 풍랑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고해라 하지 않았습니까? 갈수록 태산이란 말도 있습니다. 걱정 그칠 날이 없고 숨이 다하는 날까지 바람 잘 날 없는 곳이 우리가 사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풍랑을 어떻게 직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수선하고 어지러울 때마다 사람들이 세상을 대하는 태도 - 그것이 곧 신앙의 태도입니다. 

믿음 좋은 며느리가 믿지 않는 시어머니의 핍박속에서도 늘 눈물로 시어머니의 영혼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늘 즐겨 부르던 찬송이 395장 "너 시험을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시험을 이겨 새 힘을 얻고"하는 노래였습니다. 목사님이 때가 되었다 싶어 그 시어머니에게 전도를 나갔습니다. "어머니 예수 믿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시지요. 자부가 시어머니를 대단히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눈물로 기도를 많이 하는지 모릅니다." 그랬더니 시어머니가 화를 버럭내며 그렇게 말합니다. "내숭이여, 매일 제방에서 노래하는 것 다 들었어. 내가 다 적어 놓았다구. 목사님 들어 보실래요. 「너 시어밀 당해 범죄치 말고 너 용기를 다해 늘 물리쳐라. 너 시어밀 당해 새힘을 얻고 주 예수를 믿어 늘 승리하라.」 시어밀 물리치는게 그 사람 소원이여." 

그래요. 시험을 당해도 새힘을 얻고 우리는 살아갑니다. 어떤 문제에 부딪혔다 할지라도 우리는 파괴주의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타협주의자도 아닙니다. 도피주의자도 아닙니다. 크리스챤은 문제앞에 창조적인 태도를 가집니다. 이들은 우선 허물된 역사현실을 그대로 인정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낙담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 희망을 선포합니다. 새로운 돌출구를 찾아냅니다. 잿더미 위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건설해 냅니다. 어두운 현실속에서도 역사를 밝은 눈으로 바라봅니다. 이게 바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경건한 사람의 삶은 달걀을 삶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삶을수록 허물허물 액체가 됩니다. 그러나 달걀은 삶을수록 단단해 집니다. 문제속에 집어넣었을 때 범인들은 대게 허물허물 풀어져버립니다. 편안할 때는 강한 듯 온유한 듯 겸손한 듯 하던 사람도 어려운 일을 만나보면 쉽게 무너져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마치 달걀을 삶는 것처럼 고난의 가마솥이 뜨거우면 뜨거울수록 그 삶이, 신앙이 단단해집니다. 그래서 지금도 유대인들은 고난의 날을 기념하는 절기가 되면 삶은 달걀을 나눠 먹는다고 합니다. 


III. 안전지대가 있습니까? 하나님 

성도 여러분, 세상이 불안할 때에, 온통 무너지고 썩어갈 때에 여러분은 현실을 어떻게 직면하십니까? 선진국이나 중립국가를 찾아 이민이라도 가시겠습니까? 세상 다 썩었다. 함께 썩어 버리자. 먹고 마시고 즐기다 너도 죽고 나도 죽자 포기하시겠습니까? 몽땅 부수고 공산주의 국가라도 건설해 보시겠습니까? 

이럴때 일수록 성경을 보십시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다. 

시편 12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안전지대에 두시겠다"고 약속했고, 

시편 46편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란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고 했습니다. 

왜요? 7절 11절,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고 했습니다. 포기하지 마십시요. 낙심하지 마십시요. 도피하지 마십시요. 분명 인생의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안전지대가 어디입니까? 

오늘의 본문을 보십시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안전지대에 두신다! 할렐루야! 

특히 시편 46편은 교회사적으로 대단히 유명한 시입니다. 

칼빈은 성경 원문을 불어로 번역하면서 첫 번역으로 시편 46편을 번역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종교개혁이 위기에 부딪히고 어려워졌을 때 시편 46편을 읽다가 큰 은혜를 받고 힘을 얻었습니다. 그때 받은 은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른 곡이 찬송가 384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하는 곡입니다. 

독일 사람들은 이 찬송을 국가보다 더 애창한다고 합니다. 많은 신학교에서는 교가로 이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안전지대이시라. 하나님은 우리의 도피성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이 과실로 살인을 했습니다. 피해자 가족들이 그를 죽이겠다고 추적을 하면 이 사람은 일단 도망을 쳐서 도피성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도피성에 있는 제사장은 과실 여부를 판단해서 고의로 지은 죄가 아니라면 용서를 받도록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도피성 - 피난처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그리스도의 그림자였습니다. 영원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였습니다. 

우리가 정신적 긴장과 고민에 쫓길 때 그리고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 때 어디로 피할 수 있겠습니까?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나는 하나님께 피하였다!" 이 선언은 나는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자신의 무력을 발견하고 전능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국제관례상 망명자는 보호를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로 피한 자를 하나님께서 버리시겠습니까? 특히 구약성서에서 말하는 피난처라는 말의 뜻 가운데는 "높은 곳"이란 뜻이 있습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면 땅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안전지대는 낮은 곳에 -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 있다. 하늘에 있다. 하나님이 안전지대이다. 이 말입니다. 

성경상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의 모진 환란과 혼란속에서도 높은 곳에 안전지대를 두고 살았습니다. 

십자가 그늘 밑에 나 쉬기 원하네 
저 햇빛 심히 쬐이고 또 짐이 무거워 
이 광야 같은 세상에 늘 방황할 때에 
주 십자가의 그늘에 내 쉴 곳 찾았네 

십자가 그늘 밑, 주님의 품 그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우리의 안전지대가 어디뇨? 하나님의 품 안입니다. 십자가 그늘 밑입니다. 


IV. 내가 있는 곳 거기가 안전지대 

또 다른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 땅 어디에서 안전지대를 찾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구요. 오히려 진정한 안전지대는 바로 내가 있는 그 곳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내가 어디엘 가나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안전지대 되시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한 내가 서 있는 그곳이 안전지대가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복을 받아 가정에 가면 가정이 안전지대가 되고 내가 직장에 가면 그곳이 안전지대가 됩니다. 

시편 46편 7절과 14절을 잘 살펴보십시다. "야곱의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시로다" 그 이유를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한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당황해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주님은 믿음이 없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중대한 사실 하나를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배 안에 함께 계시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풍랑을 만납니다. 환란은 피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면제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그 풍랑을 만나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배 안에 계십니다. 공동운명체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곳 - 그 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예수와 동행하는 당신이 있는 그 곳 그 자리 - 거기가 안전지대입니다. 

본문 시편 46편 5절에서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성소가 어디입니까? 제 마음속에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여러분 모두의 마음에도 부활하신 주님이 살아 계십니다. 우리 모두 가운데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가는 그곳이 하나님이 동행하시고 함께 하시는 안전지대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안전지대가 어디뇨? 두번째 안전지대는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이 있는 바로 그 자리입니다. 안전지대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늘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요.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당신이 있는 그 곳 - 거기가 안전지대입니다. 


V. 안전지대 : 경건한 삶 

이제 결론이 분명해졌습니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자리를 안전지대로 삼는 비결이 이제 분명해졌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경건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하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올 때마다 해결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죄가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 앞에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 과거의 모든 죄, 현재 지금 짓는 모든 죄, 미래의 모든 죄를 깨끗이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처럼 옮겨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기억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 보혈의 피로 이 시간 깨끗이 씻김 받기를 축복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며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려고 하지 마십시요. 성령을 근심하게 하는 일입니다. 지금 이 시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포하시기 바랍니다. 쓴뿌리 견고한 진들이 모두 물러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십시요. 기도하는 자리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찬양마다 찬양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시간마다 여러분 모두가 이 예배의 영광을 체험하는 예배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그 곳이 경건의 자리요 그 곳이 우리의 안전지대입니다. 

당신은 안전지대를 어디서 찾았습니까? 오직 경건한 삶을 사는 것 뿐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방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방패로 우리를 지키시고 날개로 우리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사는 한 언제나 그곳은 안전지대입니다. 

그렇습니다. 최고의 안전지대는 경건한 삶입니다. 

초대교회시절 크리소스 톰이란 감독이 황후 유독시아의 간교로 귀양 살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 가운데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 - 제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명인 걸요. 이 땅 어디에서 쫓거나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이 땅에서 쫓겨나면 하늘 땅이 나를 기다립니다. 나의 소유를 빼앗기는 것이 두렵습니까? 내가 가져본 것 무엇이었습니까? 모두 빼앗겨도 하늘에 쌓일 뿐입니다. 저들이 나를 산으로 몰아내면 나는 엘리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구덩이에 던지면 나는 예레미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바다에 던지면 나는 요나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돌로 치면 스데반이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매로 치면 나는 사도 바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이 땅 모든 곳을 안전지대로 알고 살았던 담대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까? 안전지대가 어디뇨? 진정한 안전지대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그 곳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바로 그 곳입니다. 


VI. 궁극적 안전지대: 하늘나라 

나아가 우리에겐 영원한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궁극적인 안전지대가 있습니다. 

하늘나라입니다. 중립국가에도 질병이 있고 태풍이 있습니다. 미국에도 죽음이 있고 재해가 있습니다. 나폴리에도 시드니에도 사고가 있습니다. 그곳은 안전지대가 아닙니다. 계시록에 보면 오직 하나님 나라에 만이 사망이 애통이 질병이 없다고 했습니다. 슬픔이 절망이 흑암이 없다고 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안전지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곳을 바라봅니다. 사모하며 소유하기를 힘씁니다. 하늘나라의 시민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왜 예수를 믿습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고상한 윤리 도덕을 가르치는 설교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건전한 시민 정신이나 사회정의를 외치는 것도 내 몫의 일부라고 분명히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게 맡겨진 성도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면 저는 실패한 목회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크고 튼튼한 아파트도 가지십시요. 건강한 사회도 함께 만들어 가십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일은 천국 안전지대를 확보하고 사는 일입니다. 

오래전 미국에서 유학생 셋이 70층 빌딩 엘리베이터 청소를 하는 일을 하며 옥상 수위실에서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날 시가지 전체에 정전사고가 있었습니다. 마냥 기다리기만 할 수가 없었던 세 학생은 함께 얘기를 나누며 계단을 올라갑니다. 한 20층까지는 철학도가 인생 철학을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50층까지는 경영학도가 성공 비결을 얘기했습니다. 나머지 70층까지는 신학도가 성경 얘기를 했습니다. 막상 문 앞에 다달았을 때 수위실에 맡겼던 열쇠를 그냥 두고 올라왔습니다. 배도 고프고 지칠대로 지친 세 학생은 문도 열지 못하고 문 앞에서 다리를 뻗고 잠을 자야 했습니다. 

우리가 천국 문에 섰을 때에 당신의 고상한 인생철학이 그토록 빛나던 성공비결이 당신의 인격에 도움을 주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천국문을 열 수 없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안전지대는 어디뇨? 마지막 안전지대, 영원한 안전지대는 하늘나라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안전지대가 어디입니까? 하나님이 우리 안전지대입니다. 

묻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 자리, 안전지대입니까?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면 당신이 어딜 가든지 그 곳이 안전지대입니다. 

오늘 이 시간이 당신 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의 영원한 안전지대 천국이 준비되어 있습니까? 천국에 들어갈 확신이 있습니까?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