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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없이 걸어가야 할 사명자의 길 (삼상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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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없이 걸어가야 할 사명자의 길 (삼상 6:7-15)


일반적으로 어떤 자리나 상황에서 느껴지는 기분을 가리켜서 분위기라고 합니다.  이 분위기는 모든 자리, 모든 상황에 존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어떤 분위기냐 하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는 들어갔더니 그 집안 분위기가 밝고 생명력이 있습니다.  반면에 어떤 집에는 들어갔더니 그 분위기가 어둡고 침침하고 답답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분위기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는 그 분위기에 짓눌려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분위기를 창조적으로 바꿔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거실의 커텐도 밝은 색으로 바꾸어보기도 하고, 집안의 가구 위치를 바꾸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아무리 주변 환경을 바꾸어본다고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성경은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기 때문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바꾸기 전에 먼저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그리고 사단이 가라지처럼 던지고 간 어두운 분위기에 짓눌리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그 분위기를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1819년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뒤 미국 시카고의 트리니티 신학교를 졸업한 조셉 스크리번(Joseph M. Scriven)이라고 하는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그의 첫 번째 약혼녀가 물에 빠져 죽게 되자 그는 캐나다로 건너가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의 두 번째 약혼녀마져도 결혼 직전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멀리 떨어진 스코틀랜드에 사는 그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때 그가 쓴 찬송이 369장입니다.  이 찬송의 주제는 우리 인생의 모든 것을 기도로 주님께 가져가는 것입니다.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부질없이 낙심 말고 기도 드려 아뢰세
이런 진실하신 친구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 약함 아시오니 어찌 아니 아뢸까"♬

이 찬송에서 스크리번은 우리가 당한 모든 괴로움을 기도를 통해서 주님께 가져가기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닥친 어려움은 지금 내가 기도할 수 있는 기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당하고 있는 괴로움이 무엇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겪고 있는 어려움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들을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아뢰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5-16)

그렇습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오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래서 지금 여러분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좌절감과 실망감과 낙심의 분위기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떨쳐버리십시오.  우리가 낙심의 분위기에 짓눌리면 안됩니다.  실망의 분위기에 넘어지면 안됩니다.  절망의 분위기에 무너지면 안됩니다.  

그런 분위기가 내 마음 한 쪽에서 강하게 밀려올 때 즉시 일어나 주님 앞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주님을 의지하고 찬송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분위기를 창조하십시오.  내 안에 있는 어두움의 영들을 몰아내고 성령으로 충만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울 때 정말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비록 실개천 같은 믿음이라고 할지라도 여러분에게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포기하지 마십시오.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의 내 환경이 어떻든, 내 여건이 어떻든, 내 상황이 어떻든, 그런 것은 상관하지 마십시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안에서 믿음의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꿈을 꾸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심령에 믿음의 꿈을 꾸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심령에 아직 이 땅에 나타나지 않은 하나님의 도성과 하나님의 세계를 믿음으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께서 믿음으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함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정말 주님의 이름을 부르십시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주여, 우리를 도와주옵소서"  그리고 다시 주님을 붙들고 꿈을 꾸십시오.

우리가 일단 태어났으니 이 세상을 좀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일단 시집을 갔으니 좋은 가정을 만들어 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일단 그 집의 자녀로 태어났으니 그 가정을 뭔가 좋은 가정으로 만들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일단 언양 영신교회의 교인이 되었으니 이 교회를 뭔가 아름답게 만들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가슴을 펴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사명을 붙잡으십시오.  하나님은 사명이 있는 자를 축복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명을 붙잡은 자와 함께 일하십니다.

오늘 본문에는 시대적인 분위기에 상관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했던 이름 없는 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에는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이스라엘을 가장 괴롭혔던 나라가 블레셋이었습니다.  이 나라와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번번히 실패를 했습니다.  이번 전쟁에서도 여지없이 패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던 엘리의 두 아들이 궁여지책으로 법궤를 전쟁터로 끌고 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은 내용 없는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존귀히 여기지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법궤만 전쟁터로 가지고 가면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법궤는 블레셋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렸습니다.

법궤를 빼앗은 블레셋 사람들은 빼앗은 법궤를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당에 갖다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에 가서 보니까 큰 다곤 신상이 엎어져 목뼈가 부러지고 허리가 잘라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박살나 있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법궤를 갖다 놓은 블레셋의 아스돗이라는 마을에는 온역이 번져 여기 저기서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스돗 사람들은 너무 급한 나머지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라는 마을로 옮겨 놓았습니다.  그런데 가드에도 역시 무서운 독종이 임했습니다.  그래서 법궤는 다시 에돔이라는 마을로 옮겼습니다.  거기에도 무서운 재앙이 임하여 많은 사람들이 독종으로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잔뜩 겁을 먹은 블레셋의 통치자들이 모여서 의논했습니다.  이 심상치 않은 일이 정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내린 재앙인지, 아니면 우연한 일로 생긴 것인지 좌우간 흑백을 가려보자.  그래서 그들은 이제 갓 새끼를 뗀 암소 두 마리를 구해서 새 수레에 메워서 그 위에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의 벧세메스로 가게 합니다.  그래서 그 소가 곧장 벧스메스로 가면 정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고, 소가 좌우로 치우치면서 그 길로 가지 아니하면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것으로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머나먼 길이었습니다.  가보지 않은 길이었습니다.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소는 똑바로 향하여 벧세메스에 도착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법궤는 오늘날 교회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입니다.  구원의 장소입니다.  법궤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교회를 모르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쁨으로 봉사할 수 있는 교회를 찾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을 때에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믿음의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으로 섬길 수 있는 교회를 만났을 때에 우리는 행복한 신앙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났을 때 끝이 나고, 신앙의 방황은 좋은 교회를 만났을 때 끝이 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를 사랑하고 기쁨으로 헌신하면서 좋은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두 가지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성도'라는 이름입니다.  여기에서 성도라고 불리워지는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성도가 되어 주님과 더불어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을 가리켜서 '집사'라고 부릅니다.  이 집사는 아무에게나 붙여지는 하나의 형식적인 이름이 아닙니다.  교회의 계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영원의 승리자들에게 붙여주는 영광스러운 이름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10장 43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라고 했을 때, 여기에서 섬기는 자는 헬라어로 '디아코노스' 즉 '집사'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천국에서 크고자 하는 자는 교회를 메고 가는 집사가 되라고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직분을 잘 감당한 자는 아름다운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존경받고 아름다운 지위를 얻는 자는 교회를 잘 섬긴 집사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구원을 공짜로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악의 짐을 다 걸머지고 가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예수를 믿기만 하면 은혜로 구원을 받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요 주님이시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못하신 분들은 오늘 이 시간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여시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이고, 그분이 살아나심은 나를 살리시기 위하여 부활하신 부활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나고 죽었을 때에 저 영원한 천국의 백성으로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하늘 백성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고백하면 영원한 천국에 갑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는 것과 천국에서 우리가 어떤 지위를 얻을 것이냐는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기억하십시오.  천국에는 보상심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 교회를 어떻게 섬겼느냐, 우리의 연약한 이웃들을 어떻게 섬겼느냐의 여하에 따라서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방인을 섬기는 나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자랑했던 것입니다.(롬11:13)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로부터 받은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직분에 부끄럽지 않는 믿음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에서의 직분은 내 기분에 따라서 뗐다가 붙였다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에 많은 소가 있지만 법궤를 멘 소처럼 존귀함을 받는 소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 많은 수레가 있지만 법궤를 실은 수레만큼 영광스러운 수레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에는 많은 멍에가 있습니다.  직장의 멍에, 가정의 멍에, 사회적인 멍에….  그러나 그 많은 멍에들 가운데서도 주님의 몸인 교회의 멍에를 메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것은 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영광이요 자랑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84편 10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의 신앙고백이요, 간증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블레셋 방백들은 벧세메스 경계선까지 따라 가니라."

이 암소가 왜 울었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울음의 이유를 나름대로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갓 젖을 뗀 저 어린 송아지를 떼어놓고 가야만 하는 어미 소의 울음이요, 어머니의 눈물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때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명자의 길은 눈물의 길일 수 있습니다.  어린 송아지를 버려야 했듯이 주님을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서 내려놓아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버려본 경험, 포기해야만 했던 경험이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가 주님을 위해서 자신이 가장 아꼈던 것을 포기해야만 했던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주를 위해서 눈물을 흘려야만 했던 경험들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외아들을 버려야 했습니다.  모세는 애굽 바로 공주의 아들 자리를 버려야 했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양식을 버려야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물과 가족을 버려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버리셨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외아들을 버렸던 아브라함은 바다의 모래알과 같은 믿음의 자손들을 얻었습니다.  왕자의 자리를 버렸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하늘의 영광된 보좌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양식을 주의 종을 위해서 내놓았던 사르밧 과부의 기름통은 마를 줄을 몰랐습니다.  가족과 그물을 버렸던 베드로는 하늘나라의 영원한 가족과 천국 그물을 얻어서 초대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얻으리라."

기억하십시오.  무릇 얻고자 하는 자는 버려야 합니다.  찾고자 하는 자는 잃어야 합니다.  부활의 영광을 얻고자 하는 자는 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내가 죽을 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영원한 부활의 영광을 주십니다.  그런 점에서 법궤를 멘 소는 고난의 소가 아닙니다.  불행의 소가 아닙니다.  이 소는 영광의 소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동물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새들이 하나님 앞에 와서 불평을 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다리도 길고, 등에 아무 것도 없어서 곧잘 달려가는데 우리는 왜 다리도 짤막하고, 등에 뭔가 날개라는 것을 매달아 놔서는 무거워서 걸어갈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새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날개를 펴라.  그리고 훠어이 훠어이 한 번 저어 보아라."
새들은 날개를 쫙 폈습니다.  훠어이 훠어이 저어 보았습니다.  그 순간 새들이 창공을 향하여 힘차게 솟아오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때부터 땅에서 뛰는 어떤 짐승들보다도 빠르게 날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신 직분과 사명은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접어둔 채 짊어지고만 있으면 무거운 짐이 되지만 이 직분들과 사명들을 펼쳐서 훨훨 저어보면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올라가는 것과 같이 우리의 믿음이 힘차게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이 직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믿음이 성숙해 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저 천국을 향하여 힘차게 날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자자손손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축복들을 누리는 믿음의 조상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여 직분이 무겁다고 느껴보신 적이 있습니까?
셀리더의 직분이 무겁고, 집사의 직분이 부담스럽고, 기관의 임원직이 힘이 들 때가 있습니까?
언제 영광스러운 직분이 무겁게 느껴지든가요?
그 순간만큼은 적어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식어졌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불평이 생겨나는 것입니까?
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면서 내 가슴속에 원망하는 마음이 자리잡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가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십자가가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가 보일 때 우리는 울며 감격하면서 이 직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이 길이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사명의 길이기에 기쁨으로 짊어지며 가게 될 것입니다.  송명희 선교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을 사랑하면 감사하게 되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가슴 깊은 곳에서 사랑하게 되면 감사한 마음으로 이 직분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생각해 보면, 이제 갓 젖을 뗀 어린 송아지를 떼어놓아야 하는 아픔의 눈물은 별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헌신과 희생은 애착을 가져옵니다.  친구의 피를 본 등반가는 등반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산에 더욱 깊은 애정을 갖는다고 합니다.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사랑이 더 애절한 것은 아들을 얻을 때에 피 흘린 사랑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주님께서 이 교회에 이토록 애착을 갖는 것은 피 흘려 이 교회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위해 울어본 사람, 교회를 위해 값진 땀방울을 흘려 본 사람, 교회를 위해 희생해 본 사람, 이 성전에 피를 묻혀 본 사람, 교회를 위해 희생하고 바쳐 본 사람은 교회에 애정과 애착을 갖게 됩니다.  언양영신교회!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게 되는 것입니다.  먼 길을 돌고 돌아서 언양 영신교회 위에 높이 세워진 십자가만 보더라도 눈물이 핑 돌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 교회를 위하여 땀 흘릴 수 있고, 이 교회를 위하여 울 수 있고, 이 교회를 위하여 희생할 수 있고 피를 묻힐 수 있는 것은 나의 최대의 영광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자손손이 자랑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12절을 잘 보십시오.  이 소는 처음에 벧세메스 길로 향하여 갈 때에 울었다고 했습니다.  어린 송아지를 두고 떠나야 하는 어미 소의 아픔이요, 눈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소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울면서 떠나야만 하는 길이었지만 자기의 길을 마쳤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성되게 자신의 사명을 감당했던 이 소가 종착점에 도착했을 때에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지 않았습니다.  먼길을 왔기 때문에 배가 고팠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사람들이 융숭한 대접을 하지도 않았습니다.  종착점에 도착한 이 소는 말없이 자기의 몸을 불태워 번제물이 되었습니다.  미련한 소라구요?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미련한 소로부터 우직한 충성을 배워라!"

사랑하는 여러분, 소라는 동물은 변덕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밭 갈고 짐 끌고 농사를 짓지만, 소가 먹는 것이라고는 볏짚과 콩깍지, 그리고 옥수수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대접이 소홀하다고 불평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죽어서 살은 푸주간에, 큰 뼈는 사골탕으로, 작은 뼈는 단추로, 껍질은 가죽으로 사용되어 집니다.  살아도 주인을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인을 위해서 죽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소는 결코 자기를 위해서 사는 법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왜 불평이 생깁니까?  그 일이 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 일은 대가를 바라지 않습니다.  칭찬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불평이 없습니다.  그저 감사함뿐입니다.  그러나 일꾼은 대가를 바랍니다.  손님은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신다면 여러분은 대가를 기대하지 않고도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불평 대신에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원망 대신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함으로 헌신하고 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일꾼, 법궤를 멘 소의 충성을 보십시오.  포기해야 하는 아픔 때문에 때로는 울지만 그래도 말없이 묵묵히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그 사명을 따라 충성되게 감당하는 그 사람이 천국의 주인공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이 교회에 주인공이 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만을 위하여 순결하게 사명의 길을 걸어갔던 주기철 목사님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마지막에 주님 얼굴에 침 뱉지 않기 위하여, 신사에 참배하지 않기 위하여 주기철 목사님은 쇠못이 박힌 길을 걸어갑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못이 발등을 찌르면서 올라옵니다.  그걸 뽑기가 힘에 겹습니다.  쓰리고 아픕니다.  피와 살점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는 울면서 그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를 통하여 수많은 우리 믿음의 자손들이 그 길을 걸어가야 하겠기에 주기철 목사님은 그 길을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길을 말없이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눈물 없이 못 가는 길 피 없이 못 가는 길
영문 밖의 좁은 길이 골고다의 길이라네
영생 복락 얻으려면 이 길만은 걸어야해
골고다의 험한 고개 나도 가게 하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했던 사람,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우기를 원했던 사람,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짐을 짊어지고 말없이 묵묵히 걸어갔던 사람, 그러면서도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 번제로 자신의 몸을 기쁘게 드렸던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찾으시는 사명자의 모습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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