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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함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딤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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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딤후 2:11)
  
 
딤후2장11절로12절 함께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딤후 2:11-12)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아버지가 이브자리를 펴는 가정에서 자라난 신부와 어머니가 자리를 펴는 가정에서 자라난 신랑이 신혼 여행을 다녀와서 서로 자리를 펴라고 하다가 결국 한 사람은 침대에서 한 사람은 바닥에서 자기를 일주일 쯤 하다가 드디어 이혼을 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폴란드 바사 공작과 부인 카타리나 자겔로의 사랑은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린다 합니다. 폴란드의 에릭 왕은 바사 공작에게 반역죄를 적용해 '종신형'을 선고합니다. 그때 카타리나는 왕을 찾아가 애원합니다. '저도 남편과 함께 복역할 수 있게 선처해 주십시오' 왕은 깜짝 놀라서 카타리나에게 말했습니다. '부인은 종신형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소.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무서운 형벌이오. 아무 죄도 없는 당신이 왜 옥살이를 하려는 거요' 카타리나는 손가락의 반지를 빼서 왕에게 보여주며 애원했습니다. 그 반지에는 '모스 솔라(Mors sola)'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오직 죽음만이 둘의 사랑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라틴어 문구에서 일부만을 인용하여 연인들의 사랑하는 글귀로 사용하는 말로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의 뜻이라 합니다. '종신형을 받았어도 남편은 여전히 저와 한 몸입니다. 결혼식 때의 약속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저를 감옥에 함께 넣어주십시오' 결국 카타리나는 남편과 한 감방에 투옥돼 17년을 복역했습니다. 에릭 왕이 죽자 부부는 함께 석방됐습니다. 이 부부는 결혼식 때의 약속을 끝까지 지켰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욱 우리를 신부 삼으시고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실 뿐만 아니라 영원토록 함께 왕 노릇하는 영광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이는 롬 6:3-8에서 세례와 연관되어 나타납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 6:6)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 노릇 하지 아니하려 함이니(롬 6:7)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음이라(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세례받을 때 불려지던 찬송으로 추측하기도 합니다(Scott).

'죽었으면'은 그리스도인들이 현재 삶을 영위하면서 갖는 자기 부정(self-denial)의 삶을 가리킵니다(Scott).
이런 삶은 죄에 대해 옛 사람이 죽은 것뿐 아니라(Gealy, Lock)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Hendriksen, Bernard).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됩니다.
이것은 미래의 부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을 또한 가리키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 살아났음을 시사합니다

(롬 6:8)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롬 6:11)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노스 캐롤라이나 주에 사는 사무엘 맨이라는 사람은 노만 빈센트 목사를 만나 “구원받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하고 그의 체험담을 이야기 했다합니다. 

어느 날 그는 시골에서 지름길로 가다가 늪에 빠졌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꽤 단단한 모래 땅 같아서 밟고 들어섰는데 어느 한 지점에서 발목까지 쑥 말려 들어 갔습니다. 사방에 아무도 없었기에 소리를 질러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무릎까지 올라오는 무겁고 긴 장화를 신고 있었습니다. 옆에 갈대가 보였습니다. 그것을 잡기만 하면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그는 온몸과 팔을 뻗어 갈대를 잡았습니다. 그러나 힘을 주어 당겼을 때 오히려 갈대만 뽑히고 몸은 그대로였습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지극히 간단한 이치가 떠올랐습니다. 장화를 신은 채 나오려고 발에 힘을 줄 것이 아니라 갈대에 의지하면서 장화를 벗어 버리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다시 한 번 팔을 뻗어 갈대를 한 웅큼 잡고 발의 힘을 빼고 신발에서 벗어났습니다. 자기를 죽음의 길로 붙잡아 내리고 있는 것은 수렁이라는 불가항력의 힘 같지만, 사실은 자신이 신발에서만 벗어나도록 발의 힘을 빼고 갈대를 의지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의지함으로 옛 생활을 벗어 버림으로 죄악의 수렁에서 벗어나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지와 싸우며 성화를 이루기 위해 성결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19세기 미국의 성령운동은 사라 랭포드라는 여인의 화요성결집회에서 시작되었다합니다. 사라는 경건한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13세 때 회심한 후 그는 웨슬리의 ‘기독자의 완전’을 읽고 성결한 신자가 되기로 결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그는 많은 경건서적을 읽었는데 그중 헤스터 앤 로저스의 말은 큰 도전이 되었습니다. “너 자신이 죽었다고 생각하라. 참으로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생각하라(롬 6:11). 그러면 그 순간부터 너는 하나님에 위해 살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그렇게 인정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그렇게 믿어라. 그러면 너는 그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사라는 여기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오,주님! 나는 믿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 1835년 5월21일 오후 2시30분부터 나는 분명히 나 자신을 죽은 몸으로 간주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온전히 헌신하고 이것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옛 사람이 죽었다는 아무런 감정적인 변화가 없었습니다. 

7일 후에 당시 유명한 감리교 목사인 머릿이 그의 집을 방문해서 성결을 경험했냐고 물었습니다. 사라는 여기에 대한 대답 대신 자신은 담대히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순간 모든 의심이 사라지고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에 그의 육적인 세력은 그의 영적인 능력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결의 체험을 한 것입니다. 

그후 사라는 이곳저곳에서 여성들을 위한 기도회를 인도했습니다. 사라는 여러 곳에 다니면서 집회를 인도하는 것보다는 자기집에서 정기적으로 모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1836년 2월 첫번째 화요성결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라는 이날의 집회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드디어 저녁시간이 되자 사람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약 40명이 모였습니다. 간단한 순서 다음에 간증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때 한 자매가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이 여인은 무릎을 꿇은 채로 뛰면서 “예수는 나의 주님이며 나의 완전한 구세주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 다음에 다른 여인이 나와서 “오늘 저녁 나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간증하였습니다. 이 화요성결모임은 19세기 성결운동의 요람이 되었습니다.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참으면(휘포메노멘)은 참다 견디다(휘포메노)의 현재시제로 참는 행위의 계속성을 나타냅니다.
이것은 현재에 겪고 있는 고난에 대해 끝까지 견뎌내는 것을 시사합니다.
인내로 모든 고난을 이길 때 모든 환난과 핍박에서 구원을 얻습니다

(마 10:22)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승리를 얻었을 때 노예를 한 명 뽑아 그를 3일 동안 왕으로 앉히는 풍습이 있었다합니다. 그들은 그 노예에게 왕복을 입히고 그가 원하는 모든 쾌락들을 누리게 한다합니다. 그러나 3일이 지나면 그는 제단에 바쳐지는 제물로써 죽게 된다합니다.
세속 역시 이처럼 단명합니다. 세상의 축제가 끝나면 손님들은 단지 '독이 든 음식을 먹은 사람들' 또는 '재를 먹은'사람들이 될 뿐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면 영원토록 왕 노릇 합니다.
'왕 노릇함'은 현재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서 누리게 되는 왕권으로서 그리스도인의 삼중직 즉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권리를 회복하고 누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재림시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왕처럼 영광을 누립니다.
왕 중의 왕이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살면서 자신에게 매여 함께 죽고 함께 살며 인내해 온 인생을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결코 부인하지 않으시고 함께 왕이 되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참는 성도들은 장차 주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주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인간인지라 고난은 그것이 순간적인 것일지라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박해가 닥치면 때로는 육체적 고난과 함께 정신적 고통이 주는 어려움을 참지 못하여 배교의 길을 가기도 합니다.

모든 성도가 베드로처럼 순교의 각오로 주를 따르겠노라고 고백하지만 막상 고난이 닥치면 그 고난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피해 가고자 하는 사람이 많으며, 또는 고난을 참지 못하여 영광의 약속에 이르지 못하기도 합니다.
주를 시인하느냐 주를 부인하느냐 하는 이 두 가지 중 하나의 선택이 성도의 참 신앙을 가름하는 기준이 됩니다.
이것은 곧 생사와 관련된 핍박의 관건이 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의 높은 기상과 생활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숱한 순교사에서 보듯이 그리스도인 선조들은 고난이 정치적 박해와 함께 다가올 때 신앙의 공적인 고백을 통하여 생명을 내어 놓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리고 순교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순교자 자신의 복과 교회의 부흥이 뒤따랐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난이 다치면 꼬리를 감추고 '나는 그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하거나 이전에는 잘 몰라서 그를 따랐으나 이제는 오히려 그를 저주하고 따르지 않겠노라고 말하며 침을 뱉는 사람들이 더 많이 나타나게 됩니다.

고난을 참고 주를 시인하는 성도보다 고난을 두려워하여 주를 부인하는 성도가 더 많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이처럼 주를 부인하는 행위는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행위요 믿음을 떠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떠난 자들은 최후의 심판에서 주로부터 거부를 당할 것입니다.

(벧후 2:1)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정치적 박해와 물질적 힘에 의해 강제로 주를 부인하고 떠난 자들도 주님으로부터 거부될 것이지만, 또한 스스로 거짓 선지자들을 따르며 구원의 주님을 부인하는 자들도 최후의 심판에서 거부를 당하고 멸망을 당할 것입니다.

(유1:4)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성도는 끝까지 고난을 견디며 스스로 이단 사설에 넘어가지 아니하도록 그리스도를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신실성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도 주로부터 거부를 당할 것입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성도 중에는 직접 예수를 부인하지 않지만 생활로 예수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즉 믿음의 신실성이 없는 자들입니다. 마치 말만 하고 행치는 않는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존재입니다

(마 23: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그들은 지식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정통해 있고 이웃의 문제점을 잘 파악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복음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남들의 스승이 되려고만 하지 스스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생활로써 자기 가르침을 스스로 깨뜨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결단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되지 않습니다. 일생을 복음 전도자와 교사로 살았던 바울은 이처럼 자신이 간사하고 교활한 신앙인이 될 것을 무척 두려워하고 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고전 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우리는 나다나엘이 예수님으로부터 들었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라는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부족하고 흠투성이의 인생이지만 진실한 때 하나님과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갈수록 누구와 무엇을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인지 분명한 깨달음을 가져야 합니다. 죄악의 길은 먹고, 보고, 만지고, 노는 것으로 우리와 함께 하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거기서 벗어나와 영원한 진리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길을 걸어가자 하십니다.

베드로가 주님과 함께 죽기 전에는 그를 부인했지만, 옛 사람이 죽고 성령으로 새롭게 된 후부터 예수님께 온전히 매인 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한때 무절제하게 스스로 자기 행동에 매였으나 결국에는 자기 의지를 벗어나 팔을 벌리고 남이 띠를 띠우고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 믿고 의지하며 함께 주고 함께 살고 함께 노릇하는 모두가 되어야 합니다.

1932년 가을 성도들이 모여 예배하다가 1933년 10월15일 정식으로 인정을 받은 것을 참고하여 10월 15일을 교회 창립 일로 여겨 함께 하게 됩니다.
80여년간 함께의 신앙으로 오늘에 이른 우리는 앞으로도 함께의 신앙으로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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