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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혜의 마음 (시 90:1-17) -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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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마음 (시 90:1-17)


1. 낙엽지는 가을입니다. 인생을 사계절에 비유하면, 이른 봄 꽃봉오리채 떨어져 피어보지도 못한 인생. 무성한 여름, 그래서 한껏 기대가 부풀었는데 거센 바람에 그만 꺾여버리고 마는 인생. 그리고 아름다운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가을이지만 이내 떨어져 구르는 낙엽처럼 처량한 인생. 그리고 삭풍에 마지막 남은 잎새마저 애처로운 인생의 겨울을 겨우 겨우 붙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호스피스’(hospice,죽음을 앞둔 환자가 평안히 임종을 맞도록 위안과 안락을 베푸는 봉사활동) 운동의 선구자이며 저명한 스위스 정신의학자 로스의 책, <죽음과 죽어감>(On Death and Dying, Elisabeth Kuebler-Ross)은 미국 대부분의 의과대학교와 간호대학, 그리고 심리학과 신학과의 필수교재로 읽힌다고 합니다. 

이 책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존엄성을 잃지 않고 세상을 하직하는 방법을 모색한 인간의 죽음을 연구한 일종의 사망학(thanatology)입니다. 로스는 그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누리는 자유, 인간과 과학에 대한 지식이 진보할수록 인간은 죽음의 진실을 점점 더 두려워하고 부정하게 되었습니다. 한 인간이 집 안에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하는 시대는 끝났습니다. 

죽음은 이제 더 외롭고 기계적이며 비인간적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병원으로 옮겨진 환자는 사람이 아닌 물건 취급을 당하며 엄청난 걱정과 비용 지출의 대상으로 전락했습니다. 환자의 심장박동수와 맥박, 심전도, 심폐기능, 분비물이나 배설물 등을 검사하려는 사람들만 주위에 북적일 뿐 그를 인간으로 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 임박한 환자들을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식물인간처럼 그냥 생명을 연장하게 만들 것이 아니라, 환자와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주체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함으로 평화롭고 품위 있고 존엄하게 세상을 떠나도록 하자’ 고 말합니다. 

그는 책에서 말기 환자를 대상으로 임종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 5단계 모형을 제시했습니다. 5단계인 1) 부정(Denial), 2) 분노(Anger), 3) 타협(Bargaining),  4) 우울(Depression), 5) 수용(Acceptance) 등의 영어 첫 글자를 따서 ‘다브다(DABDA) 모델’이라 부릅니다. 한 사람에게 죽음이 현실로 다가오면, 그 사람에 따라 성격과 신앙에 따라 약간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이들 5단계로 죽음을 이해하고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죽을 병’이라는 통지를 받으면 ‘부정’(Denial)한다는 것입니다. “아니야, 난 믿을 수 없어, 나에게는 그러한 일이 일어날 수 없어.” 라며 자신의 죽음을 부인합니다. 그래서 환자는 진단이 잘못되었다는 생각과 다른 진단이 내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여러 의사와 여러 병원을 찾아다니게 됩니다. 그리고 환자는 검사 결과가 다른 사람의 것과 바뀌지 않았나 생각하며 자신의 죽음을 부인합니다. 죽음이란 누구나 부정하고 싶은 것입니다. 정작 그 죽음이 나에게 다가왔다고 하면 부정하고 싶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그렇구나, 사실이구나!”하고 죽음을 인정하게 되면 ‘분노’(Anger)하게 됩니다. “왜 하필 내가 죽어야해?” “왜 저 사람에게는 안 생기는 것이야? 저 사람보다 내가 더 착한데?” “저 노인은 할 일도 없이 건강한데,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왜 나야?” 환자의 이러한 태도는 주위의 건강한 사람들의 건강을 질투하는 것이며 일찍 죽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神)과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나면, 환자는 다음으로 ‘타협’(Bargaining)을 시도합니다. 이 기간은 매우 짧은데, 부인하고 거부하고, 분노하다가 이 불가피한 상황을 기정사실화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연기해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매달리면서 ‘타협’에 들어갑니다. 착실한 행동을 보이거나 특별한 헌신과 헌금을 약속하므로 그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과 ‘타협’하려고 하는 행동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에게 잘 보여 생명을 연장하든지, 아프지 않게 보내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아들의 결혼식까지 만이라도 데려가지 말기를 호소합니다. ‘타협’은 대개 어느 정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 때문에 절대자이신 하나님과 협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환자는 자신의 증상이 더 뚜렷해지고 몸이 현저하게 쇠약해질 때, 회복 가망성이 없음을 느끼고 심한 우울증에 빠집니다. 이 단계에서 환자는 부모 없이 남게 될 아이들 걱정, 또는 막중한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될 가족에 대해 걱정합니다. 또 다른 우울증은 그가 사랑했던 모든 사람과 물건, 그 자신과 그에게 중요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될 것,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는 상실감 등을 생각하며 아주 조용히 있기도 하고 울기도 합니다. 극도의 상실감에 빠져 ‘우울’(Depression)하게 되는 단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수용’(Acceptance)입니다. 죽음에 임박하여 세상과 결별하려는 순간입니다. 마침내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는 그의 관심의 세계는 점점 좁아집니다. 환자는 혼자 있고 싶어 하고 때로는 문병객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사람이 방문을 해도 이야기를 나눌 기분이 아닐 때가 많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을 보겠습니다.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이스라엘 역사를 돌아보며 이스라엘 백성의 위선과 악행을 논리 정연하고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자 그들이 큰 충격과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회개하기는커녕 강퍅한 폭도로 돌변해서 스데반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난폭하게 죽일듯한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살기등등(殺氣騰騰)한 그들의 기세에 전혀 눌리지 아니하고 오히려 성령충만한 스데반의 눈에는 그러한 위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영광가운데 계신 하나님과 그 우편에 서 계신 예수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스데반이 이러한 광경을 보고 유대인들에게 외칩니다.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행7:55-56) 이에 폭도들이 사정없이 달려들어 스데반을 돌로 칩니다. 이때 스데반이 이렇게 마지막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행7:59-60)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 복음을 위해 순교한 스데반의 죽음은 하늘 문이 열리며 하나님께서 영접하시는 참으로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었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부르실지라도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다윗 왕은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대상29:28) 순교의 자리가 아니라면 다윗처럼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은혜가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은 모세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통보를 받고 그 아픔을 시로 엮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이유와 그 죽음에 대해 신명기 32:48-52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32:48-52) 당일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여리고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아바림산에 올라 느보산에 이르러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으로 주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라. 네 형 아론이 호르산에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 같이 너도 올라가는 이 산에서 죽어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 이는 너희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가에서 이스라엘 자손 중 내게 범죄하여 나의 거룩함을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나타내지 아니한 연고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을 네가 바라보기는 하려니와 그리로 들어가지는 못하리라. 

약속의 땅이 바라보이는 느보산에서 죽으리라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므리바 물 사건임을 밝혀 주셨습니다. 므리바 물 사건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신 광야에서 물이 없자 원망불평을 터트리며 모세를 죽일 듯이 대들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반석을 명하여 물을 내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백성들의 태도에 분노하여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씩이나 내리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 명하여 물을 내지 아니하고 지팡이로 내리쳤을지라도 물을 내여 해갈하도록 하셨지만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모세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민20:12) 모세는 이후 하나님께 생명 연장을 간구했습니다.(신 3:24-25)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만해도 족하니 이 일로 다시 내게 말하지 말라. 너는 비스가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고 네 눈으로 그 땅을 보라. 네가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할 것임이니라.”(신3:26-27)며 그 요구를 거절하셨습니다. 

일생 하나님과 친구처럼 대면하면서 말씀을 나누었던(출33:11) 모세일지라도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오늘 시편 90편에서는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아, 돌아가라” 고 고백한 것입니다. 조상들의 평균 수명인 천 년이 하나님 앞에 ‘한 경점’(벧후 3:8)에 지나지 않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지나온 120년 인생을 돌아보니 주님 앞에서는 지나간 어제와 같고, 밤의 한 순간과도 같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땅 위에 웬만한 것들은 몽땅 쓸어가는 홍수처럼 인생들을 쓸어 가는 하나님의 심판을 보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12절) 라고 기도합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인생이 얼마나 덧없는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깨달아 어리석게 살지 말고 영원히 행복하게 사는 지혜를 얻으라는 뜻입니다. 

인생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잠시 잠깐입니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본 인간의 죽음은 하나님의 진노였습니다. 오늘 본문 7,8절에 보면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어떠한 죄일지라도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나님을 숨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앞에 죄인인 인생은 ‘아침에 피는 풀과 같고 꽃과 같다.’고 했습니다. 구약시대 욥은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욥14:1-2) 여인에게서 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꽃처럼 잠시 있다가 시들어지고 빠르게 지나가는 그림자 같아서 이 세상에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시편 78:39에서는 인생을 “한번 지나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는 바람에 불과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시편102:3에서는 “내 인생이 연기같이 사라지며 내 뼈가 숯불처럼 타고 있도다.” 고 했습니다.


3. 그렇다면 불가피한 죽음 앞에 어떻게 살아야 지혜롭고 행복하겠습니까? 우리 육신의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생의 명암이 갈라집니다.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남기는 말은 대부분 ‘부디 행복하라.’ 는 말입니다. 그러나 행복하라는 간절한 소원뿐이지, 행복하게 해주거나 행복하게 사는 법을 모르고 막연하게 바라는 것뿐입니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다 해보고 누리며 살았던 솔로몬이 인생 종착역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12:13-14)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며 남은 때를 살았습니다.

(벧전 4: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남은 인생이 ‘지혜롭고 행복하며 가장 복되게 살아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뿐입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대로 행하여 하나님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삶이 지혜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만이 가장 지혜롭고 행복하게 사는 길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10:31)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행하는” 삶이 지혜롭고 복된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마지막 17절에서,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한 끼 식사를 해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 무엇이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행할 때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영원히 하나님 앞에 기억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본문16절) 

노년에 대한 설계와 준비도 없고, 또한 뚜렷한 취미도 없이 퇴직한 남자 노인을 일본에서는 ‘누레오치바’(‘젖은 낙엽 족’)라고 합니다. ‘젖은 낙엽족’은 퇴직 후 갈 데가 없어 아내 치맛자락만 24시간 졸졸따라 다니는 노인을 ‘비에 젖은 낙엽’에 비유한 것입니다. 쓸어내려고 해도 땅바닥에 딱 붙어 떨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을,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고, 오직 아내의 치마 끝만 붙잡고 다니는 은퇴한 남편을 치워버리고 싶지만 치워버릴 수 없는 ‘젖은 낙엽’에 비유한 것입니다. 게다가 한번 태워보려고 해도 매캐한 연기만 요란하게 나올 뿐 불붙을 기미는 보이지도 않는 ‘젖은 낙엽’은 그저 짜증나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천덕꾸러기가 된 남편에게 곰탕을 끓여 놓고 여고 동창생과 무박여행을 떠나는 부인들이 이제는 곰탕은커녕 현관문에다 ‘까불지 마라’라는 메모만 남겨 두고 5박 5일 해외여행을 떠난다고 합니다. 

‘까불지 마라’는 가스 조심 하고, 불조심 하고, 지퍼 조심하고, 마누라 찾아 징징대지 말고, 라면이나 끓여서 식은 밥 말아 먹어라는 신조어입니다. 

이러한 노후에 비참한 ‘젖은 낙엽족’이 되지 않기 위해 최소한 10년 전부터 자신의 노후를 설계하고 철저히 노(老)테크 준비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노(老)테크는 재(財)테크, 가(家)테크, 주(周)테크, 금(金)테크, 지(知)테크, 우(友)테크, 자(自)테크 등 7가지인데 그 중 가(家)테크를 예를 들면, ‘부인이 하는 가사 일을 하나씩 익히고 배워야 한다. 스스로 이부자리 정리, 밥 짓고 요리 하기, 빨래하기, 화분에 물주기 등 20가지 이상 가사 일은 기본으로 익혀야 하며, 특히 TV시청  이외 혼자 즐길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는 자기만의 소일거리를 찾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30년 청춘을 오직 가족 먹여 살리기 위해서 헌신하고, 이제 퇴직해 집에 있는데도 그 인생 마지막이 마치 ‘젖은 낙엽’같다면 얼마나 불행한 삶이겠습니까? 지금의 젊은이들은 은퇴 후를 미리 준비하는 지혜와 가족들과 함께 즐기며 살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아내와 우아한 곳에서 외식을 약속하고 5시 정각에 칼 퇴근하는데 상사 눈치를 보지도 않습니다. 회사는 자신을 ‘젖은 낙엽’으로 만들 수는 있어도 자신과 가족들의 행복은 절대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남은 시간이 없다며, ‘젖은 낙엽’은 의외로 빨리 다가올 수 있다며 남은 생을 윤택하게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노후자금을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인생이 가장 지혜롭고 행복하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 행복은 테크닉(techniques), 기술로 들어가거나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 인생은 영원한 ‘행복’을 이룩하고 누릴 수 있습니다. 인생은 그 죽음 다음 세계에 영원히 행복한 삶으로 연결되지 아니하면 불행한 것입니다. 평생 그 손이 행한 일이 하나님 앞에 영원히 견고한 것이 되지 못하면 ‘젖은 낙엽’ 인생이 아니라 ‘추풍낙엽’같은 인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히시고, 은총을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므로 하나님 앞에 영원히 기억되며 견고하여 지혜롭고 행복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오늘 본문에서 “우리의 날 수 계수함을 가르치사”라는 말씀은 시간의 소중을 깨닫고 살라는 뜻입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널리 통용되는 미국 달러의 최고액권인 100달러 지폐에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의 초상화가 새겨져 있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정치가, 경제학자, 철학자요 문필가와 발명가로도 활동한 사람인데 특히 미국의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미국헌법을 제정하는 일에 앞장 선 인물입니다. 

그런데 1달러 지폐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5달러 지폐에 링컨 대통령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때 그만큼 이 벤저민 프랭클린이라는 사람이 미국 국민 전체의 존경을 받는 인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벤저민 프랭클린이 남긴 유명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시간은 돈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시간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고 가장 잘 실천한 사람이 바로 벤저민 프랭클린입니다. 

프랭클린은 1706년 미국 보스턴에서 17형제 중 15번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일을 돕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일을 하며 독학을 했는데 이렇게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미국에서 가장 존경 받는 위인이 된 가장 큰 비결은 철저한 시간사용에 있다는 것입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얼마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철저히 관리했는지 말해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프랭클린은 출판업에도 손을 대는데 1732년에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이라는 격언집을 만들게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이 책을 사러 왔습니다. ‘이 책 얼마입니까?’ ‘예, 1달러인데요.’ ‘예? 너무 비싸네요. 조금 깎아 줄 수 없습니까?’ 그러자 프랭클린은 아주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1달러 50센트는 주셔야겠습니다. 그 이하로는 팔 수 없어요.’ ‘아니 지금 장난하는 거요? 방금 전에 1달러라고 하지 않았소.’ ‘맞아요, 분명히 1달러라고 했지요. 하지만 손님 여기를 보세요. 여기에 <시간은 금이다.>라고 쓰여 있지요? 이 격언처럼 제게 시간은 돈입니다. 그런데 손님은 흥정으로 제 귀중한 시간을 빼앗고 말았어요. 그러니 마땅히 제 시간의 대가를 받아야지요.’ 프랭클린의 말에 손님은 아무 대꾸도 못하고 1달러 50센트를 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소중한 시간을,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 가장 소중한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요한복음7:6-8을 보겠습니다.

(요7:6-8)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 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이 말씀은 예수께서 우리와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사시지만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사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시간(때)의 주인되시는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사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간의 주인은 나 자신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무리 하고 싶어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지 않았으면 하지 말고 기다려야 합니다. 반대로 내가 하기 싫어도, 나중으로 미루고 싶어도 하나님의 때가 이르렀으면 반드시 해야 합니다. 시간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내 생명도 다 하나님의 때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처럼 때가 되어 하나님께서 언제든지 ‘흙으로 돌아가라’ 하시면 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을 포함해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리는 모든 시간들은 모두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시편 84편에는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시 84:10)이라고 고백합니다. 시간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아니한 시간들은 아무리 길어도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은 시간의 질, 삶의 질을 말합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비록 천년을 살았을지라도 하나님과 동떨어진 삶이라면 인생이 헛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전2:10-11) 무엇이든지 내 마음이 즐거워하는 것을 내가 막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나의 모든 수고를 내 마음이 기뻐하였음이라 이것이 나의 모든 수고로 말미암아 얻은 분복이로다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그러므로 시간은 양만 따지지 말고 질과 내용을 따져야 하는데 우리의 시간이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 시간이 아니라 정말 복되고 귀한 시간이 되려면 전적으로 시간을 하나님 중심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중심으로 시간을 사용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 내 가장 소중한 시간을 먼저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5. 하나님이 시간의 주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 자녀들이 필요하다면 히스기야 왕처럼 해 그림자를 십도 뒤로 물러가게도 해서 짧아진 수명을 십오 년 연장시킬 수도 있는 분입니다.(왕하20:5-11) 그러므로 내 시간을 내 마음대로 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드리고 사용함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견고한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어떻게 행할 것을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며” 살아야 합니다.(엡5:15-16)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나, 의인이나 악인이나 하루 24시간 똑같이 주어지지만 같은 시간도 사용하기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더스틴 호프만과 스티브 맥퀸이 주연한 <빠삐용>이라는 유명한 영화에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살인죄를 지고 감옥에 갇힌 주인공 빠삐용이 어느 날 꿈속에서 재판을 받는데 ‘나는 사람을 죽인 일도 없고 지금까지 사나이답게 떳떳하게 살았다’고 항의하지만 재판관이 이렇게 한 마디로 잘라 말합니다. ‘살인을 안 했다 하더라도 너에게는 인생을 낭비한 죄가 있다.?그러므로 유죄다.’ 너무도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면 유죄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아끼고 잘 사용하되 가장 먼저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소중하고 귀한 시간이지만 하나님께 드릴 때는 아낌없이 시간을 바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고 성경 말씀 보는 일에도 시간을 아까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 위로하는 일, 특히 온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하는 데 투자하는 것이 가장 지혜롭게 시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모두 120년을 살았습니다. 40년은 애굽 궁궐에서 왕자의 신분으로 성장했습니다. 그 후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보냈습니다. 마지막 40년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모세가 어떻게 남은 시간을 따지면서 살았겠습니까? 모세가 <므리바 물가> 사건으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회중을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민20:12) 는 말씀, 즉 가나안 땅 입구까지만 가고, 거기서 죽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실제로 모세는 가나안 땅이 바라보이는 곳까지 가서, 비스가 산꼭대기에서 가나안 땅을 바라본 후에 죽었습니다. 므리바 물가의 사건 이후 모세의 시간 계산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는 가나안 땅 입구에 도착할 때가 자신이 떠날 때임을 알았습니다. 남들이 가나안 땅에서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무렵에 그는 인생을 끝내야 했습니다. 그 때부터 모세는 하루씩 줄어가는 자신의 시간을 생각하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이 한 걸음씩 가까워질 때마다 모세의 남은 날 수는 그만큼 줄어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남은 날 수를 생각할 때마다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새로웠을 것입니다. 그게 바로 모세의 <날 계수함>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세만 가나안을 향해 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가나안 땅은 그다지 멀지 않습니다. 우리의 가나안 땅은 천국입니다. 모세의 ‘남은 날들’만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갈 날들도 하루하루 줄어들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남은 날 수 계수함’이 즐겁습니까? 아니면 괴롭고 두렵거나 슬프십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의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소망은 어떤 일에서도 전과 같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언제나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므로 죽는 것도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사간에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고 또 그것이 훨씬 더 좋지만 여러분의 삶에 유익하다면 내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여러분과 함께 계속 머물면서 여러분의 믿음을 키우고 기쁨을 누리게 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함께 있든지 떠나 있든지 여러분이 한마음 한뜻으로 복음 신앙을 위해서 함께 싸운다는 소식을 듣게 되기를 바랍니다.”(빌1:20-30) 사는 것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더 좋지만 복음과 교회를 위해서라면 세상에 더 머물러 있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살아도 죽어도 오직 주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다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얼마나 짧은 지 헤아릴 수 있는 지혜로운 마음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는 삶이 되어 가장 지혜롭고 행복하신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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