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나그네와 행인을 권함 (벧전 2:11-12)

  • 잡초 잡초
  • 466
  • 0

첨부 1


나그네와 행인을 권함 (벧전 2:11-12)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지난 주일에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버리고 잡을 것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먼저 모든 악독과 모든 속임수와 겉치레와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합니다.그리고 갓난 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순전하고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이것이 보배로운 산 돌이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신령한 하나님의 집을 지어가는 거룩한 성도의 삶입니다.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거룩한 나라와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인 우리는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어 하나님의 놀라운 빛으로 들어가게 하신 그 아름다운 덕을 온 세상에 전하는 영광스런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대 로마 시민들은 ‘나는 로마인이다’는 대단한 긍지와 자부심으로 일등 시민 의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 백성답게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격려합니다.로마 제국은 물론이고 지상의 그 어떤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영광스런 천국시민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그 나라 백성답게 생활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천국시민은 세상과 등지고 속세를 떠나 심산유곡에 들어가 도인처럼 수도를 닦는 사람은 아닙니다.천국 시민권자이지만 이 땅에 머무는 동안 한 국가의 국민이며, 직장과 조직에 소속되어 일하는 사회인입니다.가정에서는 남편과 아내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살아갑니다.같은 믿음을 가지고 서로 격려하며 사랑하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지만 때로는 나를 핍박하고 원수처럼 대하는 불편한 이웃들과 날마다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합니다.이것이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천국시민의 이중적인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볼때 천국시민이지만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낯선 외국인과 같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시민권을 두고 사는 이중국적자라고 이해하면 좋습니다. 베드로는 천국시민을 가리켜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에서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살고 있는 1세기 기독교인들이 지상 국가의 정치제도와 권력 앞에 어떤 자세로 살아야 할까?   하늘에 영원한 기업을 둔 성도들이 이 땅의 일터에서 나를 고용한 주인과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   그리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공경하는 믿음의 자녀들이 가정에서 부부의 관계는 어떻게 세워가야 할까?  특히 예수를 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믿는 아내는 어떤 그리스도인이어야 할까?   또한 남편은 아내에게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할까?   마지막으로, 이웃들과의 관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 사회생활에서 만나는 실제적인 문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대와 환경을 초월하여 베드로가 이 편지를 기록할 때와 오늘날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똑같은 원리로 적용되는 말씀입니다.베드로전서를 읽으며 시간마다 두 가지 원리를 소개해 드렸습니다.예를 들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특성 거룩함과 형제 사랑을 말했습니다.그리고 성도들이 이 두 가지 특징을 일상생활에서 실천하기 위한 두 가지 원리가 있는데 첫째, 버려야 할 악한 것들이 있고 둘째, 갓난 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처럼 순전하고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읽은 11절과 12절에서 베드로는 또 한 번 두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첫째,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11절), 둘째는 이방인들 앞에서 선한 행실을 가지라는 것입니다(12절).이 두 가지 원리는 앞으로 읽어나가며 살필 이중국적자 그리스도인의 국가관, 직업윤리, 가정윤리 그리고 대인관계 등 사회생활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기준입니다. 

베드로는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을‘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베드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또한 하나님께 사랑 받는 자들이라 읽어도 좋습니다.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을 때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었고 그 나라 백성도 아니었으며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이방인이었습니다.그러나 이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입니다.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고귀한 신분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속감이 분명할수록 이 세상에서는 나그네와 행인이라는 의식 또한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갑니다.
   
11절에 천국시민이 가져야 할 첫번째 원리가 있습니다.이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처럼 살아가는 성도들은‘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나그네와 행인은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입니다.행인들은 시장과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흥겨운 놀이판에 잠시 머물며 구경할 수 있지만 거기 붙박이로 살 수는 없습니다. 집을  떠나 여기저기 여행하며 찍었던 사진들을 보면 나는 거기에 잠시 머물렀던 행인일 뿐이지 토박이가 아닙니다.이 세상을 잠시 왔다 지나가는 행인은 나의 눈을 즐겁게 하고 내 육신의 쾌락을 자극하는 구경거리에 정신을 팔고 눌러앉아 있을 틈이 없습니다. 빨리 그 자리를 떠나 영원한 본향을 향해 이동해야  합니다. 더구나 그곳이 인간의 정욕을 부추기는 죄악의 자리라면 죽을 힘을 다해 싸워 도망치듯 빠져나와야 합니다. 싸움하듯 살지 않으면 육체의 정욕에 끌려 영혼을 멸망에 떨어지게 합니다.이것이 세상에 몸 담고 사는 우리의 현실입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과 그의 처를 생각해 봅니다.아브라함으로부터 독립한 롯의 가족들은 소돔 성 곁에 잠간 머물며 멋진 사업을 펼쳐보려고 야무진 꿈을 품고 이사를 했습니다.그러다가 그곳의 생활이 좋아 아예 소돔 성에 뿌리를 박고 현지인들과 어울려 흥청망청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이 망할 때 그동안 공들여 쌓았던 물질과 인맥과 권력도 함께 불타 없어졌고 단란했던 가정까지 비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나그네 정신을 망각하고 살았던 롯의 가정이 경험한 참담한 결과였습니다.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아가는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하게 씻음받는 영혼을 지키기 위하여 육체가 본능적으로 요구하는 욕심과 피흘리기까지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젊었을 때, 힘이 있을 때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마시고 싶은 것 다 마시며, 입고픈 것 다 입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며 즐기다가 나이 많아 육신의 힘이 떨어지고 더 이상 인생의 낙이 없다고 할 그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되겠지 생각합니까?   아닙니다.지금 그런 허망한 생각이 떠오를 때 즉시 육체의 정욕과 맞서 피흘리며 싸울 각오로 순결한 신앙을 지켜나가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죄와 부도덕을 비방하는데는 용감하지만 내가 그 환경에 처하면 죄를 미워하고 싫어하지 못하여 슬며시 죄와 친구합니다.유명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조사하여 약점을 잡으면 썩은 먹이감을 발견한 하이애나들처럼 살벌하게 달려듭니다.피가 터지고 살이 찢겨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물고 늘어져 먹을 것 다 먹은 다음 또 다른 먹잇감을 찾아 나섭니다.재미삼아 남의 사생활을 엿보고 한 사람을 사회에서 매장시켜 고통당하는 모습을 즐기며 인생의 낙을 삼는 사악하고 잔인한 사람들이 있습니다.이것 역시 육체의 정욕에 이끌리는 옛사람의 더러운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와 죄는 신랄하게 비판하지만 자신의 죄는 너그럽게 이해하고 덮어둡니다. 남을 비방하지만 나 자신에 대하여 한없이 너그러운 태도 때문에 죄를 죄로 여기지 못하는 이 세상은 갈수록 타락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하나님은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고 사랑으로 용서하시지만 죄는 심하게 미워하고 싫어하십니다.최소한 하나님의 자녀들만이라도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아 죄를 적극적으로 미워하고 싫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도의 거룩함은 아무 노력과 댓가도 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40일 금식을 하신 예수께 사단이 찾아와 먹을 것과 명예와 영광을 내걸고 시험할 때 어떻게 물리치셨던가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시험을 이기는 힘입니다. 내 영혼의 양식이며 생명의 힘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악한 사단과 맞서 담대히 싸워야 합니다. 내 나름대로 적당한 마지노선을 정하여 여기까지만 허용하고 그 이상부터는 거절하면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죄를 대하면 결코 육체의 정욕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바로의 신하 보디발의 집에서 사환으로 일하던 잘 생긴 청년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어떻게 물리쳤습니까?  보디발의 아내는 값비싼 옷을 걸치고 최고급 향품으로 가꾼 육체미를 앞세워 요셉에게 눈짓하며 네가 내 말대로 하면 너의 출세를 보장해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유혹하였습니다. 세계 최강국 애굽 왕의 시위대장 가문의 안주인이라는 막강한 권세와 돈의 힘으로 히브리 노예에게 은근히 압력을 가했을지도 모릅니다. 요셉이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하고 단호하게 거절하였지만 이 여인은 날마다 요셉을 찾아와 유혹합니다. 그때 요셉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여인과 단 둘이 한 자리에 함께 있지도 않음으로 거절의 의사를 분명히 표시하였습니다. 그럴수록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집요하게 찾았습니다. 

어느날 요셉이 일하러 그 집에 들어갔을 때 마침 요셉 외에 아무도 없는 자리에서 여인은 요셉의 옷을 붙잡고 동침을 요구하였습니다.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욕심은 이렇게 집요합니다.그때 요셉은 그 자리에 한 순간도 머물지 않았고 여주인에게 붙잡힌 겉옷을 벗어던지고 뛰쳐나갔습니다.영혼을 망하게 하는 육체의 욕심은 요셉이 죄를 단호하게 뿌리쳤던 것처럼 그렇게 제어해야 합니다. 잠시 잠간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가 일순간을 즐겁게 해주는 쾌락에 마음이 끌려 발목을 붙잡혔다가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빼앗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바랍니다.나그네와 행인은 말 그대로 지나가는 사람입니다.나그네는 토박이들에게 낯선 사람으로 여김을 받고 그 사회에 동화되지 못하며 심하게는 미움과 배척을 받기도 하는 외부자입니다.

두번째 원리가 12절에 나옵니다.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천국시민은 소극적으로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며 싸워야 하지만 적극적으로는 이방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선한 행실을 보여야 합니다.썩지 아니할 하늘의 기업을 유산으로 받을 그날을 기다리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행인이라고 하였습니다.이 세상의 것만 알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기업을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우리는 낯선 이방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에 욕심을 두지 않고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우리를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합니다. 그러나 천국시민의 기준으로 보면 썩어질 세상에 온 정신을 쏟고 사는 사람들, 하나님 나라 밖에 있는 사람들이 곧 이방인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하나님의 제사장들은 이방인들 가운데 살며 선한 행실을 보여야  합니다.마태복음 5장16절에,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하셨습니다.베드로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였습니다.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아무 상관이 없이 동떨어져 사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이방인들이 우리의 행실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기독교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는 비방하였습니다.그러나 그들의 비방은 대부분 잘 모르는 사실에 대한 오해일 뿐이었습니다. 교우들이 주 안에서 나누는 형제자매의 친교를 근친상간이라 오해하였습니다. 성찬식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의식을 가리켜 사람을 잡아 먹는 식인습관이라고 비방하였습니다.로마 황제를 신으로 경배하지 않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만 왕으로 섬기고 경배한다는 말을 듣고 기독교인들은 로마 황제에게 충성하지 않는 반역자요 반정부 집단이라고 오해하였습니다.이 모든 것이 왜곡된 사실을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인 사람들이 만들어 낸 말들이었습니다. 

어떤 일이 발생하였을 때 기독교인들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까 궁금해 하고 또 기대감을 가지고 주시합니다.비방하려고 작정한 사람들에게는 잘해도 그만이지만 실수하거나 악을 행하면 그 즉시 살벌한 비난과 비판이 날아옵니다. 우리보다 나은 것도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하게 잘한다고 비웃습니다.나그네와 행인 같은 성도들은 세상에서 손해도 보고 억울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순간의 이득과 즐거움을 위하여 죄악과 친구하지 맙시다.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값으로 얻은 정결한 영혼을 육체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헐값이 팔아넘기지 않기 바랍니다. 깎아놓은 밤톨처럼 빈틈없는 모양을 하고 어떤 경우에라도 손해는 절대 안보고 살리라는 완벽한 행동이 세상사람들 기준으로는 똑똑하고 야무지게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 기준은 그것과 같지 않습니다.앞으로 남기고 뒤로 밑지는 것보다 앞에서 손해보고 뒤에서 남는 장사가 천국시민의 삶입니다.누가 더 똑똑하게 살았는지는 이 다음에 주님 오실 때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악을 행하여 이방인들에게 책잡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빛을 가리웁니다.선을 행하다가 시기와 미움을 받으면 하늘의 상급이 있지만 악을 행하다가 받는 비방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부끄러운 일입니다.십자가의 복음이 배척을 받고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먹는 것은 복음에 문제가 있어서입니까?  하나님께서 욕을 먹을 만한 악을 행하셨습니까?  신구약 전체를 살펴보십시오.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저지른 악한 행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더럽혔습니다.그리고 하나님이 진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이방인들에게 짓밟히고 불에 타버린 것을 보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왜 저렇게 되었을까 이상하게 여겼습니다.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는 이스라엘은 이방인들에게 조롱과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부끄러움에 버려두셨습니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가 불신자들에게 무참하게 조롱을 당하는 것은 선한 행실을 제대로 보이지 못하는 한국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표현이며 심판의 방식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더 큰 부끄러움과 모욕을 당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쩌면 한국 교회가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불신자들에게 더 많은 조롱과 비판을 들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제사장 나라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선민의식과 영적 교만함 그리고 자기도취와 안일함에 빠졌습니다.남의 눈에 있는 티는 볼 줄 알면서 자신들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다음 시간에 계속 말씀드립니다만 베드로는 국가권력 앞에 그리스도인들이 선한 행실을 보임으로 순복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권세자들일지라도 우리의 선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어려운 주문을 합니다. 주인의 집에서 사환으로 일하는 그리스도인 역시 두려움으로 주인에게 복종하되 까다로운 주인들에게도 그리하라고 합니다.믿지 않는 남편과 사는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순복함으로 그들이 아내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를 욕하고 거스려 핍박하는 사람에게 악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어주라고 합니다.왜냐하면 이방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지켜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로마시민보다 더 고상하고 영광스런 천국시민이 세상에서 지켜 살아야 할 아름다운 덕입니다. 나그네와 행인 같이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베드로의 권면을 마음에 새기고 자랑스럽게 이 세상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체를 이길 힘을 주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한 행실을 하도록 힘을 주십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