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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겔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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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겔 15:1-8)


영감받은 에스겔 선지자는 포도나무 비유로 이스라엘의 우월의식을 질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선민의식에 빠져서 교만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스겔 선지자는 비유를 들어 포도나무의 쓸모없음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유다 민족을 돌보시지 않는다면 타 민족에 비해 우월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한편 포도나무의 가치를 열매가 아니라 나무의 재질로 평가했다는 것은 특이할 만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여 책망했습니다. 그 이유는 ① 열매를 맺지 못했을 때 ② 모든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썩고 비틀어지고 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나무의 재질을 가지고 포도나무의 무용성을 말하고 있는가 하면 불에 타버린 포도나무의 가치는 더욱 형편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라고 한 말은 

Ⅰ. 이스라엘의 비참한 과거를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본문 15장 2절에 『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랴 』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는 나무로서는 볼품이 없습니다. 그러나 열매를 맺어서 모든 이들에게 유익과 기쁨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여기 『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 』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들포도나무, 즉 야생 포도나무를 말합니다. 들포도나무는 재배하는 포도나무에 비해서 볼품이 없고 가치가 떨어집니다. 

이사야 5장 4절에 『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힘은 어찜인고 』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들포도나무의 무가치한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타의 모든 나무보다 자랑할 것이 없는 나무라는 말입니다. 여기 『 들포도나무 』는 과거 이스라엘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최소한의 인간이기를 거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돌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은 타민족에 비해 내세울 것이 없는 비천한 백성들이었습니다(사 5:1-5; 렘 2:21; 호10:1). 
시 80편 8절에 『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 같은 상태를 지렁이에 비유했습니다. 

이사야 41장 14절에 『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고 했습니다. 
고아와 과부에 비유했습니다. 시편 68편 5절에 『 그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 』고 했습니다. 
물로 씻지 않고 소금도 뿌리지 아니한 갓 태어난 아이에 비유했습니다. 

에스겔 16장 4절에 『 너의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케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 』라고 했습니다. 
태어나서 버려진 아이에 비유했습니다. 
에스겔 16장 5절에 『 너를 돌아 보아 이 중에 한 가지라도 네게 행하여 너를 긍휼히 여긴 자가 없었으므로 네가 나던 날에 네 몸이 꺼린 바 되어 네가 들에 버리웠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에 대한 비유는 모든 인류가 예외 없이 범죄한 죄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시편 51편 5절에 『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다고 했습니다(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 3:10).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롬 3:11). 선을 행하는 자도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롬 3:12).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고 했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에 『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고 했습니다. 
인간의 전적 무능력과 인간의 전적 부패를 일깨우는 말입니다. 본문 15장 5절에 『 그것이 온전한 때에도 아무 제조에 합당치 않았거든 』이라고 한 말은 아무 쓸모없는 들포도나무였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과거는 죄인입니다. 

Ⅱ. 이스라엘의 배은에 대한 심판의 경고 입니다. 

본문 15장 6-7절에 『 그러므로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내가 수풀 가운데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이 되게 한 것같이 내가 예루살렘 거민도 그같이 할지라 내가 그들을 대적한즉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내가 그들을 대적할 때에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는 무서운 심판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불에 던질 화목처럼 이스라엘 족속을 심판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 『 그들이 그 불에서 나와도 불이 그들을 사르리니 』라는 말씀은 심판의 완전성과 필연성과 절대성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포도나무의 본래적 가치는 열매 맺는 데 있습니다. 들포도나무라고 해도 시절을 좇아 과일을 맺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들포도를 맺게 하시는 이가 만유의 주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삼림 중에 있는 들포도나무는 상품가치가 있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맺기도 전에, 익기도 전에 들짐승들과 온갖 조류들에게 먹힐 뿐입니다. 
숲 속에서는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뿐 아니라 맺었다고 해도 상품가치가 있는 극상품 포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특별한 조치가 불가피한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는 것은 심판의 대상입니다. 포도나무 자체로는 무엇을 제조하거나 나무나 무엇을 걸 못으로도 사용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겔 15:3).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렘 2:20-28). 이웃에게는 재산상의 손실과 신체적 손상을 입혔습니다. 
이사야 5장 7절에 『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의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공평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의로움을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쓸모없는 그들을 뽑아서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우십니다. 

본문 15장 4절에 『 불에 던질 화목이 될 뿐이라 불이 그 두 끝을 사르고 그 가운데도 태웠으면 제조에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라고 했습니다. 
여기『 사르고 』(아켈라, ) 는 태워 버린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 태웠으면 』(나하르, )은 녹이다, 태우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나하르는 아켈라와는 달리 어떤 것을 불로서 태우되 반쯤 태우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포도나무의 양끝이 태워 없어지고 그 가운데도 반쯤타서 전혀 쓸모없는 상태가 된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대해 주석가 랑게(Lange)와 칼리(Carley)는 의미 있는 역사적 주석을 했습니다. '두 끝'은 이스라엘의 두 왕국, 즉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해 멸망한 북왕국 이스라엘과 B.C. 586년에 멸망된 남왕국 유다를 말한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란 유다의 지도자들이 바벨론 포로가 되어 사로잡혀가게 된 예루살렘 성읍을 상징적으로 가리킨다고 했습니다. 
본문은 예루살렘마저도 바벨론 군대에 의해 훼파될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15:6). 그것은 필연적이라는 것도 병행해서 들추어내고 있습니다(15:7). 인간의 현재는 사망의 형벌입니다. 

Ⅲ. 이스라엘의 새로운 갱생(更生)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본문 15장 2절에 『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랴 … 』라고 했습니다. 
여기 『 포도나무 』는 삼림 중에 있는 들포도나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별 무리가 없습니다. 여기 포도나무는 심기워진 나무를 말합니다. '심기워진 나무' 는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습니다. 시편 1편 3절에 『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2장 21절에 『 내가 너를 순전한 참 종자 곧 귀한 포도나무로 심었거늘 내게 대하여 이방 포도나무의 악한 가지가 됨은 어찜이뇨 』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고 했습니다(호 10:1). 요셉은 담장너머까지 번성하는 포도나무에 비유했습니다(창 49:22). 예수님은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라고 했습니다(요 15:5). 포도나무 비유를 집중적으로 언급한 곳이 바로 요한복음 15장 1-8절입니다. 

다락방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강론 가운데 포함된 포도나무 비유가 있습니다. 이 비유는 놀랍게도 에스겔이 말하고 있는 포도나무 비유와 너무 흡사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후에 포도나무의 가지들처럼 그들이 내게 연합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 긴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는 비결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늘의 아버지를 포도원의 농부로, 예수님을 포도나무로, 그리스도인들은 그 가지로 비유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 안에(in Christ) 거한다는 전제입니다. 
열매가 풍성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답을 얻게 됩니다. 

호세아 10장 1절에 『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그 열매가 많을수록 제단을 많게 하며 그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하도다 』라고 했습니다. 
호세아는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켜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로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포도나무에서 많은 열매를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좀더 분명하게 말합니다. 이사야 5장 1-2절에 『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혔도다 』라고 했습니다. 

포도원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은 먹지 못할 들포도를 맺었다고 탄식했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의 도덕적 가치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법정의 정의는 사라지고 억울한 백성들은 호소할 데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는 악한 열매가 아니라 정의로운 열매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미 익숙해져 있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소외시킬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고 했습니다. 

이러한 열매를 맺자면 첫 번째 가지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가지치기를 해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할 때는 하나님은 그 가지를 없애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13절에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내 천부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절에 『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 인자야 포도나무가 모든 나무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열매를 요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 삼림 중 여러 나무 가운데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가 나은 것이 무엇이냐 』 이것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의 필요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과거는 죄인입니다. 인간의 현재는 피할 수 없는 사망의 형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은 용서와 구원입니다. 
삼림 중에 있는 들포도나무를 가지고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포도나무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서는 나쁜 열매를 맺게 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고후 5:17).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24). 그리스도 안에는 능력이 있습니다(골 1:11; 딤후 1:12).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빌 4:13).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는 회개해야만 합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의 진노를 끝내시고 용서해주십니다(레 26:40-46). 
잠언 28장 13절에 『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 26장 20절에 『 먼저 다메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라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3장 8절에 『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징계를 통하여 자기백성을 부르는 수단으로 삼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백성을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십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교리들에 대해 동의하거나 어떤 윤리를 따르는 것을 일차적으로 의미하지 아니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은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死活)과 바른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거(居)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은 그리스도와의 바른 관계를 중단없이 지속적으로 한다는 두 가지 의미를 포함하는 말입니다. 여기 거(居)한다는 말은 '살다', '머물다'(settlement), '영원히 산다'(영주, 永住 permanent settle down)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를 계속하는 한 풍성한 열매를 계속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열매는 우리의 면류관이자 상급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모든 환경은 이미 극복된 것입니다. 열매 맺는데 환경과 형편을 탓하는 것은 그가 아직도 그리스도 안(in Christ)에 거(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삼림 중에 모든 나무보다 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풍성한 열매가 있기 때문입니다. 열매가 없다면 우리는 여전히 재목(材木)으로서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포도나무는 열매를 가지고 말합니다. 그 열매는 우리의 뒤를 평생 동안 따르는 성적표와 같은 것입니다. 

계시록 14장 13절에 『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 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머물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금생과 내생이 되시며 처음과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아 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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