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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룩 비유 (마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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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룩 비유 (마 13:33) 
 
  
3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쌍둥이 형제는 대부분 얼굴 모습이 비슷합니다. 그래서 분간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한 집에 남자 쌍둥이가 있었습니다. 두 아이는 크기도 같고 생기기도 같을뿐더러, 의복도 같이 해 입고 공부도 같이 하러 다녔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형을 보고 동생으로 알기도 하고, 동생을 형으로 알기도 했습니다. 쌍둥이 형제가 자라서 우리나라 풍속대로 한날에 정혼을 하고 또 한날에 결혼식을 하였습니다. 색시들은 새로 들어왔지만 얼굴도 다르고 입은 의복도 다르기 때문에 즉시 분간이 되는데, 새신랑 둘은 의복이 같기 때문에 색시들이 새신랑을 분간하기 어려워 두 색시에게 큰 고민이었습니다. 

하루는 작은 색시가 방 안에서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한 후에 문밖에 나갔습니다. 그 때 마침 큰 새서방이 대문을 열고 뜰 안으로 들어섰습니다. 작은 색시가 마주 나가면서 “나 곱지요?” 라고 했더니, 큰 새서방은 “나는 큰 사람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작은 색시는 대단히 부끄러워서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가지고 부엌으로 들어가 뒷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큰 새서방은 제수가 부끄러워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굴뚝 모퉁이를 돌아 뒤 울 안으로 물러갔습니다. 작은 색시가 부끄러워서 부엌 뒷문을 열고 나서는데 굴뚝 모퉁이에서 자기 새서방이 돌아옵니다. 반가운 얼굴로 “여보, 내가 머리를 곱게 빗고 분을 바르고 뜰 안에 나서자마자 시아주버니가 대문으로 들어오시는 것을 나는 꼭 당신으로 알고 ‘나 곱지요?’라고 해서 망신을 당했지 뭐예요?” 라고 했더니, 큰 새서방이 “이 사람 아직도 큰 사람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어서, 작은 색시는 얼굴이 새빨개지며 부엌으로 다시 뛰어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웬 쌍둥이 이야기입니까?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겨자씨 비유’ 비유와, 오늘의 본문인 ‘누룩 비유’는 제가 이름을 붙이자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쌍둥이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쌍둥이의 얼굴 모습은 비슷할지라도 성격은 크게 다를 수가 있듯이, 겨자씨 비유와 누룩 비유는 비슷하면서도 그 성격이 조금 다른 데가 있습니다. 즉 겨자씨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에 대한 비유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천국을 작은 겨자씨에 비유한 것은, 겨자씨와 같이 작은 씨앗이 자란 후에는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천국 운동도 비록 작고 미미한 모습으로 시작하지만, 장차 수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었다고 했습니다. 천국 운동은 무명의 목수인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부터 시작해서 12제자로, 70문도로, 120문도로, 3000명으로, 5000명으로, 큰 무리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여서, 오늘날 기독교는 세계 제일의 종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심으신 천국 복음 운동의 힘이 지닌 위대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교회도 앞으로 끊임없이 더욱 성장하여 큰 나무처럼 자라서, 큰 나무에 많은 새들이 깃들이듯이, 우리 교회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안식을 얻고, 축복을 받는 교회가 되도록 열심히 전도하지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해를 거듭할수록 구원받은 백성의 수가 더 크게 많아지는 부흥하는 교회가 되어서, 어려운 이웃과 교회도 더 많이 돕고, 더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고, 우리 총회뿐만 아니라 한국 교계에도 큰 감화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써 기도하고 전도하자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 60:22에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고 한 말씀처럼,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겨자씨 한 알 같은 미미한 존재일지라도, 생명력 있는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어서, 달마다 해마다 성장하여 자란 후에는 새들이 깃들일 만큼 큰 나무가 되는 겨자씨와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라고, 그리하여 작은 자가 천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루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다시 한 번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은 우리 주님의 ‘누룩 비유’를 상고해 보면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누룩은 빵이나 술을 발효시키는 발효제 즉 이스트를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나 중근동 사람들은 우리처럼 쌀을 먹지 않습니다. 밀이나 보리떡을 먹습니다. 그런데 밀과 보리떡은 반드시 발효시켜야 맛도 있고 먹기도 편하다고 합니다. 만일 발효시키지 않고 그냥 구우면 다 부스러지거나 딱딱하게 되고 맛도 없어서 먹기가 힘듭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을 제외하고는, 반드시 누룩을 넣은 빵을 먹는다고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교훈하신 누룩 비유의 핵심은 변화입니다. 곧 겨자씨 비유가 교회의 양적인 발전과 확장성에 대한 교훈이라면, 누룩 비유는 교회의 질적인 발전과 성장에 대한 가르치심인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장이 질적인 것이어야 하느냐? 아니면 양적인 것이어야 하느냐? 이 같은 질문은 어리석고 무지한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누룩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더 깊은 뜻은 무엇일까요? 

1. 복음은 한 사람의 인격 전체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적은 누룩이 많은 반죽을 부풀리어 변화를 일으킨 것처럼, 복음은 한 사람의 인격 전체를 변화시킵니다. 고후 5:17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많은 사람들 가운데 특별하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삭개오입니다. 삭개오는 세금을 받는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가난한 백성들의 세금을 받아 로마에 상납하고, 그 가운데 더러는 착복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증오의 대상이었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의 반역자로 취급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삭개오가 세리장이요 부자인 것을 볼 때, 많은 사람들의 재산을 갈취한 불의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삭개오는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만나러 달려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기 위해 구름 떼처럼 몰려와 예수님을 에워쌌습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아서 도무지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얼른 길가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갔습니다. 당시에 부자요, 세리장이었던 그가 아이처럼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마침 예수님이 뽕나무 밑을 지나가다가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았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네 집에 유하여야겠다.” 삭개오는 너무 기뻐서 속히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다고 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 믿고 복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고 복 받았다는 소리를 쉽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무엇이 좀 잘 되면 ‘복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을 예수님의 복 받았다는 데 붙이기에는 너무 빈약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려는 최고의 복은 변화입니다. 예수 믿고 변화되었으면 정말로 복 받은 사람이고,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복을 못 받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변화된 증거 가운데 하나는 그가 물질을 어떻게 쓰는가를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선한 일을 하려는 사람은 변화된 사람이고 복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와서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알지 못하느냐. 율법에 뭐라고 쓰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은 율법을 다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청년을 사랑하사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부자인고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이 청년과 반대였습니다. 기쁘게 주님을 맞이했고 기쁘게 내놓았습니다. 돈을 버는 복도 큰 복이지만, 선한 일에 쓰는 복은 더 큰 복입니다. 세계 역사상 최고의 부자였던 록펠러는 세 가지 기적을 낳은 사람으로 불려지고 있습니다. 첫째, 가장 가난했던 사람이 최고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둘째, 이웃을 가장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셋째, 98세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세 가지 유언을 받았습니다. 첫째 “너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서 예배를 드려라.” 둘째 “십일조는 절대로 손대지 말아라. 그래야 복을 받는다.” 셋째 “너는 언제나 목사님 말씀에 순종해라. 그래야 네 인격이 성숙한다.” 그는 이 세 가지 유언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이 심방을 오셨는데 마 6:33 말씀을 하셨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록펠러는 이 말씀을 듣고 “그렇다, 나는 십일조만 바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주님을 위해서 더 바쳐야 한다.” 하고는 그때부터 재단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에게 물질을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백만 평이 넘는 12개의 대학을 건립하였고, 일평생 4928곳의 교회당을 지어 하나님께 봉헌했다고 합니다. 이렇듯 복음을 통해서 참으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반드시 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수가성의 여인을 보십시오. 그녀는 남편을 다섯 번씩이나 바꿔가며 살았던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여인이었지만, 그러나 주님을 만난 이후 수치심도 두려움도 다 떨쳐버리고 열심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고전 6:9-11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방탕한 길에서 돌이켜 새사람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미국 시카고에 있는 어느 한 교회에서, 세 살짜리 여자아이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먹지 못해 굶어 죽은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이 불쌍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에 남루한 옷을 입고 충혈 된 눈으로 찾아온 한 알코올 중독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틈을 타 죽은 아이의 신발을 벗겼습니다. 그걸 팔아 술을 마신 그 사람은 바로 죽은 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20년 후, 시카고 제일장로교회에서는 수천 명의 성도들 앞에서 한 사람이 외치고 있었습니다. “죽은 딸의 장례식에서 신발을 훔쳤던 파렴치범은 바로 저였습니다. 만물의 찌꺼기 같은 나를 다시 살려주시고,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주신 분은 위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바로 시카고의 부흥사 멜 트라더 목사였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폐품 같고 불량품 같은 인생일지라도,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이렇듯 새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 믿은 후로 얼마나 변화가 되었는지요? 아내가 남편을 향해서 “당신은 옛날 사람이 아니야, 예수 믿고 어쩌면 그렇게 달라졌는지 몰라” 그런 말을 하는지요? 남편이 아내를 향해서 “당신이 예수 믿고 변화된 것을 보니 너무 감사하오.” 이런 말을 듣습니까? 부모가 자녀들을 보면서 “참 내 아들은 이 세상에 보기 드문 아들이야” 이런 말을 합니까?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보면서 “우리 시어머니는 하늘이 보낸 천사 같아.” 그런 말을 합니까?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보면서 “우리 며느리는 보기도 아까운 며느리야” 그런 말을 합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셨다면 반드시 변화되시기 바랍니다.

2. 복음은 인간 사회를 변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한 사람의 인격뿐만 아니라,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위력으로 인간 사회를 변화시켜 왔습니다. 복음의 감화력은 한 국민의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영국인의 원래 조상은 해적인 ‘바이킹’족이었습니다. 그 같은 해적의 후손인 나라가 복음의 감화력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인 신사의 나라로 변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본사람들을 경제동물이라 부르는데, 영국인과 일본인의 차이는 곧 기독교 복음의 차이인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비인간적인 검투 시합을 중단케 한 사람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기독교인들입니다. 흑인 노예 제도를 폐지시킨 원인을 제공한 사람도 영국의 ‘윌리암 윌버포스’라는 기독교인입니다. 기독교는 그 외에도 민주주의의 기틀을 제공했고, 여성들의 위상을 높였으며, 아동보호법을 제정토록 했습니다. 일제 시대 때 삼일 독립 운동을 주도한 이들도 기독교인들입니다. 기독교가 세워진 곳에는 이처럼 사회 곳곳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사회 개혁, 종교 개혁 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주님께서 바로 누룩 같은 삶을 살다가 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가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선하고 아름다운 변화 운동이 일어나야 정상입니다. 

주님은 우리 성도와 교회를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선한 행실의 모범을 모여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그들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만드는 것이 성도와 교회의 중요 의무임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성도와 교회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서 사람들을 진리로 인도하고, 이 사회가 죄로 부패하는 일을 막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밀가루 속의 누룩처럼 이 사회를 바르게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사회에 뛰어들어 사회를 변혁시키는 종교입니다. 산 속이나 들판에서 수도만 하는 다른 종교와는 다릅니다. 누룩처럼 곳곳에 그 영향력을 행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각자가 작은 누룩들이 됩시다. 우리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 곳곳에서도 복음의 누룩과 같은 사명을 감당하도록 합시다. 한국은 이미 오래 전에 교인 수가 천만 명을 넘었습니다. 인구의 약 1/4이 기독교인이라는 말입니다. 선교학에서는 인구의 20% 이상이 기독교인인 국가를 ‘기독교 국가’로 인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가 과연 기독교 국가답습니까? 왜 그리 불법이 성행하고 부정부패가 성행하고 있습니까? 우리 성도들과 교회가 누룩 역할을 올바로 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지금부터라도 나부터, 교회부터 변화하고, 그리고 내가 속한 곳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누룩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흉악범만 수감하는 어느 교도소에 새로운 교도소장이 부임했습니다. 그 교도소에는 교도관이외에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이 많은 교도소장의 아내는, 교도소에 운동회와 같은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반드시 자기 자녀들을 데리고 재소자들 틈에 끼어서 함께 응원도 하고 친교를 갖기도 했습니다. 그는 앞을 못 보는 맹인 재소자들에게는 점자를 가르쳐 주고, 그리고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수화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그 교도소에는 점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교도소장 부인이 교통사고로 숨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의 장례식을 위해 교도소장은 간수장에게 책임을 맡기고 교도소에 출근을 하지 않았습니다. 장례식 날 교도소 안에 있는 모든 재소자들은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교도소 정문에 모여 있었습니다. 간수장이 놀라서 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와 보니 재소자들의 눈은 모두 붉게 충혈되어 있었습니다. 간수장은 즉시 규정을 어기고 문 앞에 모인 재소자들 모두가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교도소 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재소자들 전원이 장례식에 참석하여 깊이 슬퍼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나고 거기에 참석하였던 재소자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다시 교도소로 다 돌아왔다고 합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는 ‘변화’입니다. 모두 변화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과 목적을 명쾌하게 제시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변화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귀하고 아름답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켜야 합니다. 변화를 거절할 때에 주님은 우리에게 고난과 시련을 주심으로써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변화의 맨 첫 번째 대상은 우리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 내 주변에 있는 사람을 전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함으로, 그들을 통해 온 세상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대안입니다. 이것이 이 사회를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복음의 능력을 믿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날 변화의 역사를 믿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을 보고 낙심만 하지 하십시오. 불평만 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바로 되면 세상이 바뀝니다. 우리를 통해 주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면 세상은 바뀝니다. 진짜 예수를 만난 변화를 우리가 세상에 보여 줄 수만 있다면 세상은 바뀝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이런 꿈을 가지고 이 가을에도 열심히 전도하여, 복음의 누룩과 같은 사명을 다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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