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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간과(看過), 못 본 척 하심 (롬 3: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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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看過), 못 본 척 하심 (롬 3:23-26) 


1. 피해자? 혹시 가해자는 아닐까?

지난 주일부터 화요일까지 계속된 3일간의 <내적치유사경회>는 아주 특별했습니다. 우리 속에 자리를 잡고서 人格과 생활과 다른 사람들과의 關係와 나아가 人生 全體에 잘못된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때로는 사탄의 도구가 되게까지 만든 것들은 다름 아닌 우리가 성장하면서,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겨난 ‘상처’나 ‘쓴 뿌리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 상처나 쓴 뿌리들은 대부분 부모, 형제나 가족들, 선생님이나 친구들 등,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받은 것들이었습니다. 

즉 우리 속에 자리 잡고서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부모나 시어머니 등 가족들에게서 받은 상처들이었고, 선생님들에게 받은 상처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이 고의적으로 상처를 주고 쓴 뿌리를 심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치 않고 우리들이 원치 않았는데도 뿌리 깊은 상처로 자리를 잡고서 지난 세월 우리를 힘들게 해 온 것이지요. 이러한 상처와 쓴 뿌리들이 그동안 우리의 內面의 安定과 秩序를 흩트려 놓았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들을 망쳐왔으며, 사탄의 술수에 휘말리게 만들었습니다. 

이번 집회를 통하여 상처와 쓴 뿌리들의 정체를 알게 되었고, 그 모든 상처들과 쓴 뿌리들을 주님께 내어놓았으며, 주님께서 그것을 치유해 주시는 것을 경험했으며, 그리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고 쓴 뿌리를 남긴 사람들을 용서하는 시간을 가져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그렇지요? 저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를 확실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사랑한다고 했던 어머니에게서 받았던 상처도 정리했습니다. 

“아이고! 네가 형들보다 잘난 것이 뭐가 있냐? 머리가 좋나? 키가 크나? 얼굴이 잘 났나? 인문계 고등학교 나오고 서울까지 가서 대학 다니는 것이 다 때를 잘 만나서 호강하는 줄 알아라.” 어머니의 이 말씀이 항상 마음에 담겨져 있었는데, 이것도 이번에 확실하게 정리했습니다. 그런데요, 어머니의 말씀을 분석해 보니까, 사실은 그 말씀이 맞더라고요. 왜냐하면 어머니의 말씀은 저의 저 된 것이 전적인 은혜라는 말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여기 있는 것이 다 주님 잘 만나고 주님의 은혜를 입어서 된 것이지, 제가 잘 나서 된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지난 3일 간의 내적치유사경회 내내, 제게는 계속 되던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상처와 쓴 뿌리들, 그리고 그 치유라는 것에는 우리가 ‘被害者’라는 것이 前提로 깔려있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우리 속사람에 있는 상처와 쓴 뿌리들은 대부분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그들이 의도한 것이든 의도하지 않은 것이든,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들로 인하여 생겨난 것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우리는 피해자일 뿐일까요? 아니, 아직도 피해자일까요? 

이미 부모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자신이 과거에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때문에 아프다는 이유로, 지금 자신이 자신의 자녀를 아프게 하고 울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대체 넌 누굴 닮아서 그 모양이니?” “아이고, 너 하는 짓이 어쩜 그렇게 네 아빠랑 똑 같니?” 이런 식의 말이나 행동으로 자녀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는 입장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이죠.
시어머니에게, 혹은 시댁 식구들에게 받은 상처를 말하면서, 며느리나 사위, 혹은 아들의 여자 친구나 딸의 남자 친구에게, 자신의 자녀들을 좋아하는 그 누군가에게 잊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을까요? “감히 너 같은 것이 우리 딸을 좋아 하다니? 넘볼 것을 넘봐라 인마!” “넌 안 돼! 우리와는 격이 달라. 분수도 모르는 짜식이 …!” 분명 제 얘기는 아닙니다! 

어릴 적 선생님으로부터 “도대체 네가 꼬박 꼬박 학교 오는 이유를 모르겠다. 아파서 한 달 간 결석한 아이보다 성적이 못하니 차라리 한 달에 한 번씩 오지 그러냐? 이 돌대가리야!” 라는 말을 들었다고 그것 때문에 아파하면서, 이미 이 사회의 스승이 되어 제자들에게 또 다른 유언 무언의 폭력을 휘두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널 보면 너의 부모를 다 알 수 있어. 안 봐도 삼척이다!” “머리에 물인 것들은 이미 마음에 물이 들어서 빠지지 않아. 머리 염색을 없애도 마음의 염색은 아마 평생 갈걸?” 
어디 그 뿐 입니까? 누군가로부터 고의적이든 고의가 아니든 피해를 입었다고 말하는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과 사람을 향해 혹시 고의적이고 악의적인 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을까요?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아시고 자신의 양심은 기억하고 있는 그런 실수와 잘못들과 죄악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지난 치유사경회 동안 우리가 자주 했던 질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아플 때 어디 계셨어요? 하나님, 제가 버림 받을 때 어디 계셨어요? 하나님, 그 사람이 제게 비수와 같은 말을 던질 때 어디 계셨어요?” 그런데 그 질문과 함께 제게서 떠나지 않던 질문, 그리고 여러분도 반드시 물어야 할 질문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이 가까운 사람들이나 잠시 만났던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면서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被害者일 뿐 아니라 加害者라는 것이죠. 

바로 이것 때문에 우리가 반드시 물어야 하는 질문은 “하나님, 제가 그 사람을 아프게 할 때 어디 계셨습니까?” “하나님, 제가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상처를 줄 때 무엇하고 계셨습니까?” “하나님, 아무리 기도하면서 가르쳐도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제자에게 ‘넌 안 돼, 아마 주님도 너는 포기하실 거야’라고 할 때 무엇 하셨습니까? 그때 좀 말려주시지 그랬습니까?” “하나님, 제가 범죄할 때 어디 계셨어요? 그때 무엇하고 계셨어요? 왜 막아주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렇게 우리는 被害者이지만, 어쩌면 우리가 받은 것보다 더 심각한 해를 가한 加害者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범죄의 犧牲者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더 큰 죄를 저지른 犯罪者일 수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실 까요? 이것이 저의 질문이었고, 지금 여러분의 질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2. 우리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

1) 간과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절대적인 원리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1장 18절부터 3장 20절까지 계속 전개해 온 ‘전 인류의 타락과 심판의 불가피성’에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어느 누구 하나 예외없이 모든 사람이 전적으로 타락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3장 20절까지의 결론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입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는 사망입니다. 육신과 영혼, 이 세상과 저 세상 모두를 잃는 것이 사망이지요. 이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구원으로 한걸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즉 누구든지 자신이 죄인이라는 깨달음이 없이는 구원을 위한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그 다음 어떤 단계로 나아가야 할까요? 그 답이 오늘 본문이 포함된 3장 21절부터 31절까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피할 길이 없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죄 없으신 예수님을 대속 제물로 택했습니다. 대속 제물이신 예수님은 두 가지를 만족시키는 분이었습니다. 첫째는 죄를 범한 인간은 반드시 심판에 이르러야 한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켰습니다. 둘째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족시켰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과 심판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로부터 구원을 바라는 인간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즉 구원을 바라는 사람은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셨다는 것을 믿어야 하고, 둘째 십자가의 예수님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를 믿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여러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하셨음을 믿습니까? 그리고 죄와 그 심판을 감당할 수 없는 여러분 대신 당신의 아드님으로 희생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까? 이 믿음이 있다면 여러분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대속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 믿음에 관한 위대한 선언이 제가 앞에서 드린 질문의 답이 됩니다. 제가 드렸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다시 확인해 볼까요? 지난 집회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잘못, 혹은 실수로 인한 피해자라는 것, 그 피해는 상처 또는 쓴 뿌리로 우리 안에 남아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주님, 사랑의 주님은 그 상처와 쓴 뿌리의 실체를 알게 해 주셨고, 그것을 치유해 주셨으며, 그 상처와 쓴 뿌리들을 주었던 사람을 용서하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가 加害者, 혹은 犯罪者가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피해자로서 아파하는 것에 대해 하나님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통하여 공감해 주시고, 대신 아파해주시고, 또 치료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加害者라는 사실에 대해서, 혹은 犯罪者라는 사실에 대해서, 하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우리가 누군가에게 해를 주었고,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죄를 범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 하나님의 해결책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고 말씀이 있습니다(25). 여기서 중요한 것이 “간과하다”라는 말입니다. 파레신(πά́ρεσιν)이라는 이 말은 ‘지나치다, 넘어가다, 눈감아주다, 못 본 척 하다’는 뜻과 ‘벌하지 않고 내버려둠’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 미국계 생명보험사인 <라이나 생명>의 실버 보험 광고에 나오는 문구 기억하시죠?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간과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제가 자식으로서 부모에게 받은 상처, 형제들과 비교되면서 받은 상처, 사람들의 말이나 저의 인생에 일어났던 일들을 통하여 받은 상처가 많은데, 하나님은 피해자인 저의 입장에서 그것을 다 해결하시고 치유하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 아내와 제 아이들에게 준 상처들, 24살 초짜 전도사 때부터 제자들에게와 성도들에게 준 상처들, 그리고 제 양심이 알고 하나님이 아시는 죄들, 또한 저는 모르지만 하나님은 아시는 죄들 등 … 제가 저지른 것들이 너무나 많은데, 그것은 어찌 합니까? 하나님은 피해자일 때는 긍휼히 여기시지만 가해자일 때도 그렇게 하실까요? 그런데 죄를 범하고, 또 加害者인 저와 지난 죄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너무나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간과했다!” ‘내가 못본척 지나쳤다, 내가 한 눈을 감아버렸다, 너에게 책임을 지라 하거나, 너를 벌하지 않겠다.’ 

지난 주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말씀을 하면 아마 본인은 아실 겁니다만, 교회앞 도로 횡단보도에서 우리 교인 한 가정이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앞 차 운전자에게 뭐라고 뭐라고 욕을 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오늘 본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속으로 ‘못본척 해야 한다, 내 눈을 감아야 한다, 내 귀를 닫아야 한다.’고 얼마나 외쳤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간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간과는 단순히 못 본 척 하는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언젠가 미국의 유명한 신학자이자 유명한 TV 설교자인 분이 신학교 직원에게 컴퓨터를 수리하라고 맡겼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컴퓨터에는 그 목사님이 인터넷으로 보았던 불법 음란물들이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무나 감사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지을 때, 누군가에게 상처와 아픔을 줄 때, 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심에도 불구하고 간과해 주셨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로 감사한 것은 그것을 다 錄音하시고, 錄畵하셔서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 불러서 공개하지 않으시고, 아예 삭제해 버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저의 실수와 잘못과 범죄에 대해 분명하게 기억할지라도 하나님은 기억하지 않으시고 이미 전부를 삭제해 버리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죄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요, 하나님의 용서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가 죄짓는 것,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힌 것을 못 본 척 눈 감으시고, 피해를 입은 그 사람에게는 주님이 우리 대신 찾아가셔서 위로하시고 치유하시고 새롭게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의 죄까지 없애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경회 내내 저 혼자 던졌던 질문의 답을 찾는 순간, 제가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그와 같으실 줄 믿습니다. 죄 지을 때 간과하시고, 그 죄마저 완전히 없애버리신 주님, 그 주님을 찬양합니다!

2) 하나님은 간과로 끝내지 않으셨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가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고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냥 눈 감아 주시고 모른 척 하신 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 보기에는 하나님이 두 눈을 감고 보지 않는 것 같이 하셨어도, 모른 척 하시는 것 같았어도, 사실 하나님 스스로 엄청난 희생을 치루셨습니다. 그 희생 때문에 간과와 삭제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아름다운 회항”이라고 이름 지어진 다음의 항공 사고에 관한 기사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난 2005년 8월 25일, 오후 3시 20분 쯤, 미국 LA를 향해 인천공항을 이륙한 대한항공 KE107기에 응급환자가 발생했습니다. 환자는 만 4살짜리 ‘이 선경’이었습니다. 어린 선경이는 39도의 고열과 호흡 곤란, 구토와 발작 등의 증상을 보이며 의식이 혼미해져갔습니다. 10분 전에 이륙한 비행기는 이미 정상 항로로 진입하여 강원도 원주 상공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승무원들은 승객 중에서 의사를 찾았고, 다행히 승객 가운데 의사인 라모(52·여)씨가 있어서 그 분이 환자를 살핀 결과, “기압 차이 때문에 감기가 악화된 것 같다. 나이가 어려 비행을 지속하면 심각한 결과를 일으킬 수도 있으니 병원으로 긴급히 옮겨야 한다”는 소견을 냈습니다. 이 사실을 안 機長 이정훈(49)씨는 승객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기수를 인천공항으로 돌리기로 하고 운항센터에 통보했습니다. 그런데 항공기가 回航을 하게 되면, 랜딩기어가 활주로에 닿을 때 가해지는 충격을 방지하기 위해 착륙 무게를 줄여야 합니다. 

기장은 그 점을 감안하여 72.6 톤, 자그마치 4000만원 상당의 기름을 공중에서 버려야 했는데, 기장은 그렇게 기름을 버린 뒤, 오후 5시 1분에 인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습니다. 착륙 직후 공항 의료센터로 옮겨진 어린 환자는 정상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항공기는 연료를 재급유한 뒤, 오후 6시 30분 쯤 다시 LA로 떠났는데요. 대한항공 측은 그 回航으로 연료비와 이착륙료, 연결 승객 비용 등 약 5천만원의 비용이 추가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한 아이를 치료하기 위하여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엄청난 희생이 치러진 것이죠. 

여러분,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지 아시겠습니까? 加害者인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간과하시고 그것을 삭제하는 데에는 엄청난 희생이 있었습니다. 24절에 나오는 “속량”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것을 말해줍니다. “속량”이란 ‘몸값, 생명 값을 치렀다’는 뜻입니다. 성도 여러분, 죄는 그냥 해결되지 않습니다. 값을 치러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저와 여러분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서 영원히 죽음에 빠지는 신세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은 그것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당신의 아드님으로 우리의 죄 값을 대신하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구속의 대가로 지불하신 것이죠. 이것이 십자가로 나타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내 죄를 간과하시고 흔적도 없이 지워버리신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은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한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항공기 기장은 4천만 원의 기름을 쏟아버리고 回航했습니다. 그에 대해 모두들 잘했다고 칭찬했습니다. 지금도 “아름다운 회항”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상에서 그 기사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4천 만원, 4억 원, 40억원, 혹은 그 이상의 돈으로도 인간을 죄와 그에 대한 심판에서 구할 방법은 없습니다. 방법은 단하나,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뿐입니다. 베드로전서 1장 18, 19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히브리서 10장 19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나의 죄를 간과하시고, 그것을 삭제하는 대신에 아드님을 대속 제물로 삼으신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을 바로 알고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3. 피해자이든, 가해자이든!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가 피해자인가, 가해자인가?’ ‘나는 누구의 잘못과 죄로 인해 피해를 입었는가?’ ‘나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내가 가해자가 되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혹은 불행하게 만들었다.’ 이런 문제들은 쉽게 생각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문제들입니다. 왜요? 피해, 즉 상처 때문에 평생을 거기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피해자로서의 문제만 아니라, 가해자로서의 문제까지도 해결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피해자로서의 상처도, 가해자로서의 죄도 다 해결해 주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사탄의 노예로 살던 우리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사형틀인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23, 24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5절에서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간과, 즉 모른 척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편에서 우리를 향하신 선언입니다. 본래는 죄인이며, 더럽고 추악하여 벌레만도 못한 존재인데, 그런 우리의 지난 죄와 부끄러운 과거를 간과하실 뿐 아니라, 그 과거와 죄를 완전히 삭제 버리셨습니다. 그러시고는 아주 귀하고 복된 존재로 인정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음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만 그렇게 간과하시고 삭제하십니까? 아닙니다. 지금에 대해서도 눈을 감아주시고, 장차 우리가 범할지 모르는 죄에 대해서까지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이번 집회 중에 계속 떠오르던 질문 때문에 혼자 씨름하다가, 이 말씀을 깨닫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나의 죄와 허물을 간과하시고 삭제해버리신 주님, 그러나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되 내가 아닌 십자가의 예수님에게 그것을 물으신 주님! 그래서 피해자로서의 내 상처만 아니라, 加害者 犯罪者로서의 내 상처까지 다 치유하신 주님! 얼마나 좋습니까? 이 은혜의 하나님, 사랑의 주님 안에서 항상 감사하고, 그 은혜와 사랑을 받은 자 답게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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