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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예수께 받은 사명 (행 20: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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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께 받은 사명 (행 20:17-24)  

 
요즘 우리는 새벽기도시간에 예언서 예레미야를 묵상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가진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민족의 멸망이 가깝다는 하나님의 경고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그 말을 듣기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잘 되고 있는데........ 좋은 말 다 놔두고 왜 그렇게 초를 치느냐?”라고 빈정거리고 박해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렘20:9절입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다시는 이 일을 하지 아니하리라.’고 어금니를 깨뭅니다.
그런데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이 가슴이 가만히 있질 않아요. 
가슴에 불이 붙어 타오르니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하겠어요.
아무리 큰 희생이 따르더라도 이 일을 그만 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욕을 먹고, 비난받고, 박해받을 줄 뻔히 알면서도 또 나섭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이와 유사한 고백을 듣습니다.

행20:24절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람에게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돈이 생명보다 더 귀하겠어요? 
권력이 생명보다 더 귀하겠어요? 
지위가 생명보다 더 귀하겠어요? 
그런데 ‘전도가 뭐 길래?’ 바울사도는 그 일을 생명보다 더 귀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도전이 되는 말씀이 아닙니까?

본문에 기록된 설교는 바울의 목회설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3년 동안이나 땀과 정성과 사랑을 쏟았던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서 만났습니다. 
에베소와 밀레도는 약 120 리 떨어진 거리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의 보혈로 산 성도들을 부탁하는 설교를 합니다. 
어쩌면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에베소의 성도들을 살아서는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는지도 모릅니다. 

행20:25절 “보라 내가 여러분 중에 왕래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였으나 이제는 여러분이 다 내 얼굴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아노라.”
마지막 설교니 그 간절함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중심을 털어놓고 있습니다. 
설교를 마치고 장로들은 사도 바울의 볼에다 입을 맞추고, 목을 끌어안고 웁니다.
그리고 뱃전에 나가 아쉬운 송별을 합니다.
밀레도 해변에 펼쳐진 정겨운 장면을 상상할 때 우리도 눈시울이 뜨거워집니다.

헤어진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슬픈 일입니다. 
저는 공항에서 중동으로 취업차 떠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두고 돈 벌어 보겠다고 그래서 가난을 면하고 행복하게 살아보겠다고 일 년 혹은 이 년간 헤어지는 저들의 이별도 슬픈 것이었습니다. 
공항 출구를 빠져 나가던 남편이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그리고는 못내 아쉬워 돌아와 어린 아들 딸자식을 번쩍 안아 볼에다 뽀뽀를 하고 돌아서는 모습이나, 그것을 보기에 너무 안쓰러워서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는 젊은 아내의 모습은 참으로 눈물겨운 것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오늘 바울은 사랑의 이별이 주는 고통을 안고 이 고별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19절은 바울이 에베소교회에서 자기의 목회사역을 회고한 말씀입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① 그의 목회 사역의 첫째 요소는 겸손입니다. 
“곧 모든 겸손”
목사든 교인이든 주님을 위해 일하기 원하는, 또 일해야 하는 사람의 첫 번째 자질은 겸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의 제일가는 미덕은 겸손이다. 둘째도 겸손이다. 셋째도 겸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맡기시는 사역자를 택하실 때 첫 번째로 보시는 자질이 겸손입니다. 

② 바울의 목회 사역의 두 번째 요소는 눈물이었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자식을 키우는 부모가 눈물 없이 자식을 키울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가슴 속에도 자식을 키우는 부모와 같은 고통이 있었습니다.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고린도후서 11장 29절의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는 교인이 아프면 자기가 아팠습니다. 
교인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는 고통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영혼들을 부둥켜안고 울부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으로 우리 주변에 고통당하는 영혼들을 보면서 자다가라도 벌떡 일어나 그 영혼을 부둥켜안고 영혼의 의사되신 주님께 살려 달라고, 치료해 달라고 눈물 흘려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사역자, 장로, 권사, 집사,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③ 바울의 목회 사역의 세 번째 요소는 인내였습니다.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인내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의 필수 불가결의 요소입니다. 
인내는 믿음의 다른 표현입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으면 참을 수 없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으면 기다릴 수 없습니다.
아무도 믿음이 없으면 견딜 수 없습니다.
인내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습니다. 
이 사랑으로 영혼을 구원합니다. 
부모는 어떤 경우라도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답답하면 “나는 저놈을 포기했습니다.”라고 말할 때가 있지만 그 말은 ‘기대한다.’는 강열한 마음의 또 다른 표현일 뿐입니다. 
성도들도 영적이 어버이가 되어 참고 기다림으로 어린 영혼들을 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분명한 목표와 결단이 있었습니다.
24절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죽음을 각오한 사람에게는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살려고 하니까 두렵고, 떨리고, 불안하고, 초조하지 죽음을 각오하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자기 죽음을 선언한 사람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 (갈2장 20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15장 31절)

그런데 무엇 때문에 사도 바울은 죽음을 각오했습니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합니다. 
이 과제를 우리는 사명(mission)이라고 부릅니다. 
영어 단어 ‘사명(mission)’은 라틴어 ‘보내다(sending)’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받들어 이 세상에 보내진 사람’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
즉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저함 없이 선명하게 자기의 사명을 말하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 목사님은 감리교 후예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습니다.

“당신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 외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마시오. 그러므로 그 일로 시간을 보내며 그 일에 당신이 쓰이도록 하시오. 당신이 얼마나 많이 설교했느냐가 문제가 아니며, 이런 저런 일들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느냐가 문제가 아닙니다. 당신이 최선을 다해 영혼을 구했느냐 못 구했느냐가 문제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많은 죄인을 데려와 회개하게 하십시오.”

성경은 왜 복음을 전하는 일이 중요한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릭 웨렌이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정리)

1) 전도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이 지상명령은 목사들이나 선교사들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또 이 지상명령은 대 제안(The Great Suggestion)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명령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겔3:18절입니다.
“가령 내가 악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꼭 죽으리라 할 때에 네가 깨우치지 아니하거나 말로 악인에게 일러서 그의 악한 길을 떠나 생명을 구원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그의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의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을 것이고.” 

주님은 그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여러분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남편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아내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아내가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남편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자식들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부모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부모가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자식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장님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사원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주님은 사원이 구원받지 못한 것에 대하여 반드시 사장에게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2) 전도는 위대한 특권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일이기에 우리에겐 한없는 특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파트너가 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고후6:1)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지체가 높고 존귀한 분과 어떤 일을 도모한다면 얼마나 영광스럽겠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특권입니다.
  
찬송가 508장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의 3절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영생의 복락과 천국에 갈 길을 만백성 알도록 나가서 전하세 
주 예수 말씀이 이 복음 전하라 우리게 부탁하셨네. 
주 내게 부탁하신 일 천사도 흠모 하겠네 
화목케 하라신 구주의 말씀을 온 세상 널리 전하세.”
복음 전하는 일은 천사도 흠모하는 특권입니다.

3) 전도는 영원한 삶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이야기해주는 것이기에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입니다. 
이웃이 암에 걸려 고통스러워하고 있는데, 치료법을 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치료법을 알려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요?
이보다 더 나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구원과 영생의 길을 알고 있으면서도 알려주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과 영생의 길을 알려주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2). 

4) 전도는 자신의 삶에 최고의 의미를 부여해줍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잘 사는 방법은 오래 남을 수 있는 일에 우리의 삶을 사용하는 것이다.” 
영원토록 남는 것은 하나님 나라뿐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 ‘영원’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없지요.
그러나 전도는 영원히 남을 것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전도에 헌신하는 삶을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5) 역사의 종말에 대한 하나님의 시간표는 전도 사명을 완수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에 대한 관심은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암시를 했습니다.
마 24:14절입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그래서 ‘남은 과업(The rest task)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우리가 전도하는 일과 관련이 있습니다.

릭 웨렌은 그의 책 ‘목적이 이끄는 삶’에서 그의 아버지의 임종 순간을 이렇게 전해줍니다.
“아버지가 숨을 거두실 무렵, 나와 아내와 조카는 아버지 곁에 있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생기가 돌아오셨고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하셨다. 물론 아버지는 너무 약하셨기 때문에 아내는 아버지를 다시 눕혀드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계속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애쓰셨고, 그래서 아내는 이렇게 여쭤보았다. “아버님, 뭘 하고 싶으세요?”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아버지는 계속 반복하셨다.

그 후 한 시간 동안 아버지는 그 말을 백 번 정도 하셨다.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야 해!”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믿음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바로 그 순간 아버지는 마치 명령을 하시듯, 약한 손을 뻗어 내 머리에 얹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 예수님을 위해 한 명을 더 구해라!”

나는 그것을 내 남은 삶의 주제로 삼았다. 왜냐하면 이보다 영생을 위해 더 좋은 것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관심을 두시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분이 가장 관심을 두시는 것은 당신이 창조하신 사람들의 구원이다. 하나님은 잃어버린 자녀들을 찾기 원하신다. 이보다 하나님께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십자가가 그것을 증명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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