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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 (욥 22:17-18, 빌 4: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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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하나님 (욥 22:17-18, 빌 4:18-19)


‘나의 강’이라는 김상문씨의 시의 첫 구절은 이렇습니다. “너는 흐름이 있었고 나는 멈춤이 있었다. 너에겐 보이지 않는 비움과 채움이었고 나에게는 그칠 줄 모르는 그리움과 머무름이 있었다”. 강물의 흐름을 묘사하는 시어이지만 많은 생각을 던져줍니다. 채우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묘사한 것입니다. 자신을 채우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인간은 누구나 느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세 어느 사막에 이름난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학자가 찾아와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요청하였습니다. 수도사는 오랜 여행에 목마른 학자에게 막 길러온 물을 대접하기 위해 마주 앉았습니다. 수도사는 잔에 물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수도사는 잔에 물이 채워져도 넘치도록 계속 따랐습니다. 멈추기를 기다리던 학자가 입을 열었습니다. “수도사님, 잔에 물이 계속 넘치고 있습니다”. 그 때 수도사는 “이 잔처럼 선생의 머리에는 세상 학문과 생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먼저 마음을 비우지 않는다면 진리가 어떤 것인지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세상 학문과 하나님의 학문은 함께 하지 못합니다”. 
  
나쁜 것을 비우기 전에는 좋은 것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채우시려 해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우기 전에는 비워야 합니다. 우리가 비울 때 하나님은 채우십니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귀신이 잠시 나갔다 들어오니 집안이 깨끗이 청소되고 수리되었습니다. 

마태복음 12:45에는 그 다음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그 집이 더 악한 것으로 채우므로 좋은 것, 선한 것이 찰 수가 없습니다. 찰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그 것을 ‘공간공포’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빈곳만 있으면 채우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채우기만 하면 나쁜 것으로 채우기 쉽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절대로 좋은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골로새서 1:24에는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운다고 합니다. 고난을 자신의 몸에 채울 수 있는 것은 이미 비웠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우리의 나쁜 것을 다 비우게 되면 그 다음에는 좋은 것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채근담에는 “사나운 짐승은 굴복받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항복받기 어렵고 골짜기는 채우기 쉬워도 사람의 마음은 채우기 어렵다”고 합니다. 채우기 어려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것으로 우리 마음을 채우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 때문에 풍성한 사람, 채워진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악인에게는 채우시지 않습니다. 

17절에는 “그들이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하며 또 말하기를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하실 수 있으랴 하였으나”고 합니다. 악인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악인은 선한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데 선하지 않는 사람을 채우시지 않습ㄴ이다. 악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욥이 악인의 무신론성을 지적한 말을(21:14-15) 엘리바스가 그대로 인용하여 욥에게 적용하는 말입니다. 욥기 21:14에서는 “그들은 하나님께 말하기를 우리를 떠나소서 우리가 주의 도리 알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이다”라고 합니다. 악인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떠나소서”라고 하는 것이 악인의 특성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없이도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말이지만 오히려 반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서 어떻게 채워지겠습니까? 
  
시편 139:7에는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떠날까봐 걱정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멀리할 까 염려합니다. 그런데 악한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라고 합니다. 마귀가 예수님께 한 말을 보세요. “우리를 멸하려 오셨나이까?”라고 하면서 떠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라고 강청합니다. 
  
악인들이 또 뭐라고 합니까? “전능자가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할 수 있으랴”라고 합니다. 전능자라고 했습니까? 전능자는 모든 것에 능한 자인데 그런데 그 능한 자가 모든 것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왜 무엇이든 못합니까? ‘전능자가 무엇을 할 수 있으랴’고 하는 말 자체가 잘못된 말입니다. 차라리 전능자라 부르지 말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었다”고 하는 말은 참 어리석은 자의 말, 악인의 말입니다. 하나님이란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분을 하나님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죽었다고 하는 말이 성립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라 부르지만 만일 죽었다면 처음부터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모순된 말을 어리석은 자들, 악한 자들은 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스스로 자기 모순에 빠지고, 스스로 교만하여 채워지지 않고 텅 빈 채로 삽니다. 예레미야 2:13에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물을 가두지 못할 웅덩이에 물을 붓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완전히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저수지는 물이 말라 우리를 채워주지 못할 수 있지만 샘물은 항상 가득 찬다”고 하였습니다. ‘저수지 물이 말라간다’는 말은 최근에 자주 듣는 말입니다. 특히 우리나라 광주 전남에서는 심각하다고 하네요. 나주호, 장성호, 담양호, 광주호의 저수율이 49% 정도로 저수지에 물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전역에서 저수지의 물이 줄고 있습니다. 저수지의 바닥이 드러나고 사람들이 저수지 바닥을 걸어지나가고 있는 사진을 보았습니다. 

지난 여름 청원군 어느 저수지에서는 순식간에 바닥에 구멍이 나서 물이 순간적으로 빠져나가서 저수지에 물이 비었습니다. 왜 빈 저주지가 되었습니까? 인근 광산의 갱도 때문에 바닥에 구멍이 나고 물이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아무리 저수지가 커도, 든든하게 만들어도 비가 안 오면 채우지 못합니다. 저수지 바닥에 구멍이 나면 물은 채우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으로는 저수지를 채우지 못합니다. 구멍 난 삶은 만족이 없습니다. 
  
엘리엇(T. S. Eliot)은 그의 시집 ‘황무지’에서 “우리는 텅 빈 사람, 우리는 짚으로 채워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꽉 찬 것 같지만 텅 비어 있습니다. 텅 빈 데를 채운다는 것이 쓸 데 없는 것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채운다는 게 짚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채우지 못할 쓸 데 없는 것들로 가득히 채워져 있습니다. 버릴 것으로 충만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진을 열심히 찍어 남기려고 합니다. “사진만 남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진이 남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어르신은 연세가 더 들기 전에 다 정리해야 하겠다고 하시며 사진을 다 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사진만 남는 것도 아니고 다 버릴 것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버려야 할 것, 채우지 못할 것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죄인 된 모습, 악인의 모습이 얼마나 더러워져 있는지 로마서 1:29에는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라고 합니다. 무엇으로 가득합니까? 채우지 말아야 할 것으로 가득한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채우지 못하고 인간이 채운 것들 보세요. 짚보다 못한 것들도 가득한 것이 죄인의 모습입니다. 악인에게는 하나님이 채우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채우지 않으면 인간은 누구나 짚보다 못한 인생으로 전락합니다. 

  
둘째, 의인의 집에는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18절에는 “하나님이 좋은 것으로 그들의 집에 채우셨느니라 악인의 계획은 나에게서 머니라”고 합니다. 오직 불완전이 완전해지기 위해서 완전한 대상을 만나야 합니다. 완전한 대상으로 채워지기 전에는 불완전은 그 상태로 머무르고 맙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좋은 것으로 채우십니다. 의인에게는 좋은 것으로 채우신다는 것은 19절에 나타납니다. “의인은 보고 기뻐하고”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9-11에는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주십니다. 좋은 것을 자녀에게 주는 것은 하나님의 본능입니다. 
  
가끔은 농사를 지은 것이나 맛있는 과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팔려고 재배한 것이 아니고 자기들이 먹으려고 길렀다는 것입니다. 좋은 상품으로 만들어 팔려고 한 것은 모양고 좋고, 빛깔도 좋게 하려고 약도 좀 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정작 좋은 것은 자신이 먹으려고 약도 안치고 정성스럽게 기른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가장 아끼는 사람에게만 줍니다. 사실은 전부 자기가 먹을 것처럼 재배해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상품가치가 떨어져 보입니다. 내가 먹을 것은 가장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가장 좋은 것을 의인에게, 하나님의 자녀에게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이란 좋으신 하나님이므로 가능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이므로 가능합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가능합니다.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면 좋은 것을 주시기 않습니다. 아무리 좋으신 하나님이라도 사랑하는 자녀가 아니면 안 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도 좋으신 하나님이 아니면 못 줄 것입니다. 
  
빌립보서 4:19에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합니다. ‘채우시리라’란 말은 ‘플레로세이’라는 헬라어 단어로 미래 능동태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채워 주실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믿는다는 의미를 함축하는 말입니다. 모든 필요를 채우실 하나님의 신실성을 의미합니다. 
  
우상숭배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게서 육체적, 정서적 욕구를 채우려고 하는 관습의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모든 것으로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 의지하기보다 다른 것에 의지하고 다른 것이 채워주기를 기대합니다. 돈, 과학, 교육, 연인, 섹스, 권력 혹은 우리 자신이 채워주기를 바라는 욕구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런 것으로 채우려 하지만 채우면 채울수록 더 공허하고, 허전하고, 절망하고, 심지어는 자살까지 하게 됩니다. 
  
선지자 엘리사의 제자의 아내가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남편이 생전에 많은  빚을 남겨두어 두 아들이 채권자의 종이 될 형편이 되었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과부가 기름이 떨어졌습니다. 엘리사는 이 과부의 어려운 형편을 듣고 동네에 가서 그릇을 빌려오게 했습니다. 엘리사는 조금 남은 기름으로 그릇마다 붓게 하여 기적으로 그릇마다 기름으로 가득 채웁니다. 그릇이 없어 못 채울 정도로 기름은 차고 넘쳤습니다. 하나님이 채우는 것은 그릇에 따라 채웁니다. 그릇마다 풍성하게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에게는 그 기름을 채울 그릇이 있어야 합니다. 
  
은혜란 우리의 필요를 값없이 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채우시지 못하면 하나님일 수 없습니다. 에베소서 1:23에는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시고 우리로 충만하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충만’이라는 단어는 ‘플레로마’인데 이 단어는 ‘하나님의 단어’라고 합니다. 하나님만이 충만하시고 충만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은 절대로 충만하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6:38에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넘치도록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충만하게 하고 넘치게 하는 분입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은혜로 채워주십니다. 조금도 모자라지 않게 채워주십니다. 인간에게는 항상 완전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순금도 99.9%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100%입니다. ‘충만 그 자체입니다. 
  
복음성가에는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난 구했네. 헛되고 헛된 것들을. 그 때에 주님 하신 말씀 내 샘에 와 생수를 마셔라. 오, 주님 채워주소서. 나의 잔을 높이 듭니다. 하늘 양식 내게 채워주소서 넘치도록 채워주소서”. 하나님은 우리의 잔을 넘치도록 채우십니다. 의인의 집에는 항상 넘치도록 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채우소서‘라는 간구를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최근 세계 각국은 ‘행복전쟁’이 한참입니다. 나라마다 행복지수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편리하고 과학이 발전해도 행복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경제학계도 ‘행복경제학’이 뜨거운 논쟁 영역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지갑에 돈을 채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마음속에 기쁨을 채우는 것에 몰두합니다. 그래서 국민총생산(GNP) 대신 국민총행복(Gross National Happiness)지수를 고안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인가 채우게 되어 있는데 무엇으로 채우느냐로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전에 행복전도사라고 불리던 최윤희씨가 자살을 하였습니다. 다른 누구의 자살보다 아이로니컬하고 충격적입니다. 20여권의 책과 방송으로 많은 사람에게 행복을 전하던 사람도 자신의 육체적 아픔을 이겨내지는 못했습니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된다고 희망을 주었던 분이 삶을 뒤집지는 못했습니다. 그녀는 700가지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행복은 말이나,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800가지의 은혜가 있었으면 700가지의 아픔도 문제가 아니었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행복은 성경이 가르치는 복과는 다릅니다. 복이란 ‘마카리오스’라는 말입니다. 행복은 느끼면 됩니다. 그러나 복은 하나님이 주셔야 됩니다. 하나님이 채우셔야 복입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떠나지 않는 의인이 됩시다. 의인에게 채우는 복으로 충만합시다. 그리하여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이 다윗의 시나 아니라 나의 삶의 고백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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