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롬 1:13-17)

  • 잡초 잡초
  • 429
  • 0

첨부 1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롬 1:13-17)  


한 2년 전에 우리 교회의 김 모 장로님께로부터 책 한 권을 선물로 받게 되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한 무역 대리점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하여 지금은 미국 Fortune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에 들어가는 큰 회사의 영업부문 아시아 부사장에까지 이른 분이신데, 기술영업에 관한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책을 내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경영에 관한 책자를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적부터 몇 권 읽은 적이 있었지만 사실 제게는 너무 어렵고 목회에 적용하기에도 비현실적인 것이어서 완독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로님의 책은 정말 가슴에 와 닿도록 쉽고 흥미로우면서도 또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도록 공감되는 유익한 내용으로 연이어지는 바람에, 책을 받은 그날 저녁에 끝까지 다 읽게 되었습니다.
  
그 '영업기술의 비밀'이라는 책에 보면 김 장로님께서는 자신이 말단 영업사원으로 갓 출발했을 때에 개인승용차도 없이 순전히 버스와 택시만 이용하면서도 '하루에 최소한 3회 이상' 고객방문을 했다고 회고하고 있었습니다.
그에 비해서 지금 김 장로님께서 부사장으로 있는 회사 직원들의 고객방문 횟수를 조사해 본 결과 고작 '일주일에 3회'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고 '격세지감'을 느끼셨다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세일즈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새내기 시절에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서 자기 회사의 물건을 팔아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쑥스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장로님은 생면부지의 고객을 처음으로 만나는 것을 "두려움으로 시작하지 말고 호기심으로 시작하는" 마음자세를 가지고서 수도권은 물론이요 중부와 충청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을 그처럼 매일 부지런히 뛰어 다니셨던 것이었습니다.

세일즈맨이라면서도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나가는 것을 꺼려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인데, 교인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전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며, 할 수 있는 대로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라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복음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사람 앞에 전파하는 일이 왜 어떤 교인에게는 '부끄러운' 일이 되고 어떤 교인에게는 '할 수 있는 대로' 부지런히 행하는 사명이 되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신자가 어떤 마음자세를 갖출 때에 복음을 결코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전도할 수 있게 되는지를 두 가지로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빚진 자 된 것'을 기억하는 성도는 복음 전파를 결코 부끄러워할 수가 없습니다.

13절부터 15절의 말씀에 "13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14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대로 그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을 직접 한 번 만나보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라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대로 그는 자기가 지금까지 이미 세워 놓은 교회들 안에서 사단이 일으키고 있던 온갖 문제들부터 우선 해결하느라고 바빠서 좀처럼 그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방문을 그토록 원하고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비록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는 했지만 아직까지는 사도의 지도를 본격적으로 받아본 적이 없었던 로마교회 교인들을 보다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또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함으로써, 그 로마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더욱 풍성한 "(구령의) 열매를 맺게 하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자신이 그처럼 열정적으로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하게 된 동기를 가리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세상의 문명인이나 미개인에게나, 유식자나 무식자에게나, 부하고 높은 자들이나 가난하고 천한 사람들에게나 모두 다 '빚을 지고 있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빚'은 바울이 그 모든 사람들에게 직접 지게 된 빚은 아니었습니다.

이 '빚진 자'란 말은 우선 이방인들보다 먼저 복음을 듣게 된 자로서의 책임을 인식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다른 이스라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일신 하나님 여호와를 알게 되는 특권과 구약 성경을 통하여 그 하나님의 율법과 예언의 계시를 받는 특권을 다른 이방인들보다 먼저 누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스스로 "지혜 있는 자"라고 자처하던 헬라인이든지, 헬라인들이 "어리석은 자"라고 멸시하던 야만인들이든지 간에 모두에게 빚진 처지가 된 것이었습니다.
먼저 받은 '하나님 신앙'은 혼자 차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다른 민족에게 나누어 주라고 특별히 뽑혀서 제일 먼저 받았으니, 그것을 다 나누어 줄 때까지는 마치 못 갚은 빚이 있는 사람이나 같은 처지라는 뜻입니다.

또한 이 '빚진 자'란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 엄청난 '은혜의 빚'을 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즉 이 '빚'은 사람이 열심히 전도하고 충성하면 다 갚을 수 있을 만한 양의 빚이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설혹 순교까지 한다 해도 결코 갚을 길이 없는 무한한 사랑의 빚을 지게 된 자, 실로 '일만 달란트'에 달하는 빚을 탕감 받음으로써 '빚진 자' 되었다는 뜻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그 누구보다도 이 '빚'을 크게 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성도를 핍박하고 교회를 잔해하려던 '죄인 중에도 괴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옛날 '사울' 시절의 바울이 저질렀던 그 최악의 죄마저도 오직 당신의 십자가 보혈의 공로로써 '다시는 아무도 정죄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처럼 고마운 '복음의 덕'을 톡톡히 본 사람이니 어떻게 그 복음이 '부끄럽게' 여겨질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는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 은총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가 되어서 그저 항상 뜨겁게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 매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우리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8장 38절에서 "38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서 '부끄러워하다'라는 말은 '부인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러워했을 때 결국 예수님을 부인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이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은 곧 '예수님께서 행하신 십자가 대속'이 그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인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끄러워하는 것과 동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복음 전파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곧 그 본인이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죄 사함과 구원의 은혜를 진정 감사할 줄 모르고 있으며 사실상 아예 체험조차 하지 못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교인이라 하면서도 전도를 부끄러워한다면 곧 세상사람 앞에서 당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부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당신께서 재림하실 때에 주님 역시 그런 사람을 '구원받을 신자'라고 인정해 주기를 거절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 전파는 적어도 예수님께로부터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분명히 받은 신자라면 이 땅에 살 동안 평생 갚아 나가야 할 '빚'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빚'이 '반드시 갚아야 할 의무'인 것처럼 전도는 참된 기독신자에게서 있어서는 '필수적인 사명'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수백 수천 명을 전도한다 해도 다 갚을 길은 전혀 없지만, 이것을 '빚'으로 여기는 마음자세부터가 정립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엄청난 빚을 대신 갚아 주신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빚 갚는 일을 어떻게 부끄러워할 수 있습니까?
빚을 안 갚고 떼먹으려 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부끄러운 일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자기 인생의 최대최고의 빚을 이미 탕감 받은 성도는 바로 그 행복과 감사에 사로잡혀서 전도하는 까닭에 복음을 부끄러워할 여지조차도 없게 됨을 깨닫고,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오직 '빚진 자' 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복음이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의 능력인 것'을 확신하는 성도는 전도하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본문 16절과 17절에 "16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히 전파하게 되는 두 번째 이유를 가리켜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능력'이라는 말은 유명한 헬라어 '뒤나미스'라는 단어로서 '타고난 본질적인 힘'을 가리킵니다.
더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에 당연히 다른 모든 인간적인 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며 모든 인간적인 의지를 완전히 굴복시키는 절대적인 힘입니다.
즉 사람의 노력 때문에 얻게 되는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인하여 모든 '믿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이 되는 것이며, 택자라면 자신의 의지로써 거부할 수도 없는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구원이 바로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는 말씀은 그 복음 전파에는 순서가 있음을 가리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서 마지막에는 '땅끝'까지 이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구속사의 섭리를 따라서 "유대인"에게든지 "헬라인"에게든지 기꺼이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전도를 하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바로 그 복음이 스스로 작동하면서 놀라운 결과를 나타내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역사였습니다.
먼저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복음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고 혹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입게 되는 칭의가 복음을 통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둘 다 근본적으로 같은 뜻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라는 말씀에서 "믿음으로"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믿음에서부터'라는 뜻으로서 사람이 복음을 영접하고 고백하게 되는 '신앙의 시작'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믿음에"라는 말은 그 신앙생활이 지향해야 할 성화의 완성 단계를 뜻합니다.
즉 이 말씀은 한 택자의 신앙생활의 출발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가 주권적으로 역사하게 됨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자기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그 나머지 과정은 이 '복음을 통하여 나타나며 역사하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가 절로 다 이룰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까닭에, 오직 그 '하나님의 능력'만 철저히 의지하면서 담대하게 전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복음이 완성되기 전까지 사람들이 알고 있던 '의'란, 무엇을 잘 행함으로써 얻게 되는 의, 혹은 무엇을 갚음으로써 성립될 수 있는 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그처럼 사람 편의 어떤 공로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간단하게 공짜로 즉시 주어지는 칭의였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너는 죽을 죄인이 결코 아니며 이미 완전한 의인이 되었다.'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주 특별하고도 신비로운 공의였던 것입니다.

17절 하반절에서 사도 바울이 인용하고 있는 하박국 2장 4절의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 역시 그런 맥락입니다.
사람 편에서는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믿음'만 고백하면 '하나님의 의'가 처음부터 끝까지 작동하면서 결국 구원을 받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그처럼 사람에게 가장 좋고 유익하면서도 또한 아무 어려울 것 없이 아주 쉽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좋은 것을 전해 주는 입장이었으니, 바울로서는 그 복음을 전하는 것이 조금이라도 부끄러울 리가 만무했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다른 사람을 만나고 싶어집니까?
그 사람에게 꼭 주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 사람이 받게 되면 분명 행복하게 될 것이 틀림없는 것을 전하려 할 때에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고 싶어질 것입니다.
복음이야말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만 하면 그 사람의 인생에 최대의 선물이요 최고의 축복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복음 자체 안에' 그것을 그 사람으로 하여금 믿게 만들어 주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것을 영접하는 사람이 누리게 되는 '하나님의 의'가 다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아무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을 정도가 아니라 한시라도 빨리,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해 주고 싶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반면에 우리가 어떤 경우에는 남을 만나기가 부끄러워집니까?
자신의 외관이 단정하지 못할 때나 혹은 자신의 사는 꼴이 창피할 때입니다.
그렇다면 전도하기를 부끄러워하는 교인이라면 그 본인부터가 예수님을 믿는 신자로서 자랑스러운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평소에도 자신이 기독신자인 것을 남 앞에서 감추면서 살고 있으니 전도란 더더욱 쑥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시 말해서, 전도하는 것이 부끄러워진다면 바로 자기 자신의 신앙에부터 근본적으로 큰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을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것이 내게 분명히 행복하면 전도는 자동적으로 됩니다.
복음의 말씀이 자신에게 진정 '기쁜 소식'으로 들린다면 전도는 오히려 하지 않으려 해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에게 분명히 좋은 것을 거저 갖다 주려 하는 일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에게 좋은 처방을 내려 준 의사라면 같은 병에 걸린 다른 사람을 보게 될 때마다 기꺼이 소개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의학적인 검증은 확실하지 않은 민간요법이라 해도 자기가 분명히 효험을 본 것이라면 누구에게나 열성적으로 소위 '강추' 즉 강력히 추천하게 될 것입니다.
복음의 효능을 먼저 맛 본 신자의 전도 역시 그러합니다.
복음이 나를 구원해 주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먼저 체험하고 그 복음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다는 기쁨에 충만한 신자라면 그 복음을 사람에게 전하는 일을 어떻게 조금이라도 주저하겠습니까?

'내가 저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게 만들어야 할 텐데...'라고 전도의 결과가 자신의 능력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면 전도하기도 전에 벌써 두려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전도를 해도 저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쩌나?'라고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더 앞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전도자 자신의 힘'으로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그저 입을 열어 담대히 전하기만 하면 나머지는 그 복음을 통하여 택자에게 나타나게 되어 있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철저히 의지함으로써, 사람에게 거저 나누어 줄 수 있는 이 최고의 선물인 '구원의 복음'을 부지런히 전파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의 고백이나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전도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분명히 있습니다.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고 거리에서 전도지를 나누어 주는 것도 창피하게 느껴지는 사람, 아니 자기가 잘 아는 친구에게 교회에 나가자고 한 마디 권하는 것까지도 쑥스럽게만 여기는 교인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를 끔찍이 사랑해 주시는 부모의 노고 때문에 대학까지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된 사람이 그 부모가 촌스러운 행색을 하고 있거나 얼굴에 주름살이 가득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 앞에 자기 부모라고 소개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그런 자식이 있다면 일가친척은 물론이요 온 이웃과 전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수욕과 고통으로 인하여 죄 사함과 구원을 얻게 된 성도라면 더욱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방문전도나 노방전도는커녕 '태신자 갖기 운동'에조차 참여하지 않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카드에 전도대상자의 이름을 적어내는 것도 부끄럽습니까?
'사랑의 편지 보내기'는, 손은 조금 아프겠지만, 여기에도 창피할 일이 있습니까?
'새소식반'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다른 아이의 어머니에게 자녀와 함께 우리 교회에 나오라고 권하는 것 - 이것이 뭐가 쑥스럽다는 것입니까? 
  
가족 중에 불신앙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 - 자기가 사랑하는 혈연이 지옥으로 가고 있는데 입을 열어 '예수 믿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한 마디 해 주는 것이 도대체 어떻게 '거북해서' 못할 일이라는 말입니까?
우리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하는 자신을 정말 부끄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도지를 돌리다가 아파트 관리인의 구박을 받고 쫓겨나는 것은 인간적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우리 교회의 심방장님들은 예사로 여기며 매주 당하시는 일입니다.
길거리에서 교회 주보를 건네주면 무슨 잡상인 취급하듯이 고개를 휙 돌리고 외면하는 것은 우리 교회의 교역자들이 주말마다 노방전도를 하면서 다반사로 겪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전도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부끄럽다고 전도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명색이 기독신자라는 사람으로서는 가장 부끄러운 일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전도함으로써 세상 사람으로부터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은 신자로서는 오히려 영광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김 장로님의 책에 보면 "영업사원의 머릿속에는 '나는 나가야 한다.'라는 생각이 늘 지배적이어야 한다... 나가면 있고 안 나가면 없다."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 제일 마지막 문장은 두말할 것 없이 우리 경향교회 교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전도 표어'에서 원작자의 사전허락도 받지 않고 무단도용(?)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세일즈나 전도나 공히 '나가면 결과가 있고 안 나가면 결코 있을 수 없음'은 만고불변의 철칙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책에서 "오늘은 누구를 만날까,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으로 애인을 만나듯이 고객을 만나라."는 아주 멋진 말도 나오는데, 이것은 장로님의 오리지널 문구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전도하러 사람을 만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 그것은 '두려움'으로 이어지게 될 것이며 그런 교인은 결코 '구령의 실적'을 올릴 수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처럼 부끄러워하는 마음 대신에 '오늘 전도할 때 어떤 사람을 만날까, 어떤 하나님의 역사가 벌어질까?'라고 '기대에 찬 설렘'을 가지면 그 전도자의 발걸음은 오히려 가볍고 즐겁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바로 예수님 때문에 이 강서와 서울을 비롯하여 전 세계의 '이방인'들에게까지 '빚진 자'가 되었음을 기억하고, 우리가 행하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작동될 것을 확신하는 가운데 늘 자랑스럽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