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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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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 42:1-6)


하나님 없이 살고픈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잘산다는 것을 보여 주리라’ 고 생각한 청년은 세상에서의 삶을 즐겼습니다. 결혼하여 두 딸의 아버지가 되었고 미8군에 근무하던 중 미국 정부의 초청으로 미국행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런 가운데 원인모를 안질로 갑자기 시력이 떨어지더니 나이 37세에 시각장애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번의 자살시도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난생 처음 느끼는 안식이었습니다. 이후 서울역 거리를 전전하는 우여곡절 끝에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자신과 함께한 거리의 아이들에게 배움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야간학교를 설립했습니다. 교육을 받은 8백여명의 아이들이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각자의 삶을 개척했습니다. 그가 설립한 새빛 맹인선교회에 수많은 시각장애인이 찾아왔습니다. 새빛 맹인선교회 설립자 안요한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안 목사의 희망과 도전 이야기는 1982년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그는 유명 인사가 되었습니다. 앞을 볼 수 있었던 37년보다 영의 눈으로만 생활하는 지금이 오히려 기쁘고 감사하다며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안 목사는 오늘도 소외된 시각장애인들의 재활 치료와 복음 전도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안과의사가 수술을 하면 볼 수 있다며 수술을 권했으나 거절했습니다. 실명의 선물로 예수님이 주신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축복이었다고 안 목사는 간증합니다. “지금의 제 모습에 감사드립니다. 버림받았기에 버림받은 자들의 아픔을 알 수 있었고, 시력을 잃었기에 시각장애인들의 고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작은 종이 눈 감은 덕에 알게 된 창조주 하나님을 세상 끝까지 전하려고 합니다. 복음 전파가 제 여생 마지막 사명입니다.” 

신앙은 무엇입니까? 보는 것입니다.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사랑의 눈으로 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도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고, 영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눈뜬 소경의 모습으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욥은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의 뼈아픈 신앙고백이자 욥기의 결론입니다. 귀로 듣는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체험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욥은 누구보다 고난을 많이 당했습니다. 한 순간에 자녀와 재산과 건강과 친구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모년에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서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고백할 정도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적인 은혜를 얻었습니다. 우리도 눈으로 주를 뵈옵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눈으로 주를 뵙는 은혜를 체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스스로 믿으오니

인도에 의료선교로 있던 선교사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아낙네가 아기를 업고 병원으로 헐레벌떡 들어와서는 아이를 침대에 내려놓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더랍니다. 진찰을 해보니 자기 병원에서는 도저히 안 되겠고 큰 병원으로 옮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생명이 위태로우니 서둘러 도시에 있는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권했답니다. 그러자 아낙네가 하는 말이 “그러면 그 사이에 우리 집 소는 어떻게 하느냐”고 되묻더라는 겁니다. 선교사는 마음이 답답해 “아니, 아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에 소가 뭐 그렇게 중요합니까? 소가 중요합니까? 아이가 중요합니까?” 묻자 “당연히 소지요. 

아이는 2~3년 후면 또 낳을 수 있지만 소는 일평생 노동을 해서 돈을 벌어도 사기가 어렵습니다”. 여인에게는 아이보다 소가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보다 당장 먹고사는 것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의식 구조가 문제입니다. 무엇을 더 의지하며 믿고 삽니까?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생명을 소보다 못하게 여기는 것처럼, 영혼마저 세상에 내어주며 살아가고 있는 모습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무엇이 우선입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스스로 택해야 합니다.

본문 2절입니다.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욥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전지전능에 대한 믿음에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계획과 행사는 어떠한 것이더라도 끊거나 이루지 못하게 할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목적하신 바를 반드시 성취하시며, 계획하신 것은 완전하게 실행하심을 믿었습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조건이나 한계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돈 버는 것을 영혼보다 더 소중히 생각하고 있는 한 언제나 선택은 잘못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은 생애에 못 하실 일어 없으며, 못 이루실 것이 없는 하나님을 분명히 믿어야 합니다.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 것과 바꾸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섬겨야 합니다. 막연하고 희미하게 섬기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라는 고백처럼 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스스로 깨달으오니

세계에서 가장 기독교적인 정신을 보여주는 운동 중의 하나는 해비타트(Habitat) 즉 사랑의 집짓기운동입니다. 미국의 사업가 밀러드 퓰러(Millard Fuller)와 부인 린다(Linda Fuller)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28세에 백만장자가 되어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고 있던 퓰러에게 갑자기 아내가 이혼하자고 합니다. 너무 놀라서 이유가 무엇이냐 물었더니 아내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돈이 전부인줄 아는 당신에게 환멸을 느꼈습니다”. 아내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는 가치 있는 일이 무엇인가 찾기 시작했습니다. 소홀히 하던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리고 클래런스 조던(Clarence Jordan) 박사가 이끄는 코이노니아 농장(Koinonia Farm)을 방문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종을 초월하여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생활을 보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에게 용서를 빌었습니다. 예수께 영생을 얻으러 왔다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에 고민하며 돌아간 부자를 생각하며 그런 부자가 되지 않겠노라 결심하며 재산을 정리하였습니다. 

자신이 살던 집을 제외한 일체의 재산을 정리하고 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사랑의 사역에 헌신하였습니다. 백만장자에서 빈털터리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며,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퓰러는 해비타트 운동으로 미국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한 사람들에게 수여하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으며, 마틴 루터 킹 인도주의 상을 수상하는 등 세계에서 존경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본문 3절입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이 자신의 능력 밖의 일들에 대해서 성급하게 판단하고 이해함으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충고를 가리웠던 사실을 스스로에게 질책하고 있습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행사가 너무도 기이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대면함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듣는 단계에서 눈으로 보는 체험적인 단계로 신앙이 성장하였습니다. 

주의 뜻이 무엇인가 알지 못하고 내 생각과 내 방법만 믿고 함부로 행동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의 일을 이루기보다 주의 일을 파괴하는 자리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유아적인 신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눈으로 뵙는 체험적인 신앙의 단계에 들어서기 바랍니다. 
 
셋째로 스스로 회개하오니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도 어렸을 적에는 평범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다가 가게에서 구워 파는 양고기가 어찌나 먹고 싶었던지 몰래 아버지 침실로 들어가 장롱을 뒤져 동전 몇 푼을 꺼내들고는 고기 몇 점을 사먹었습니다. 너무나 맛이 있어서 먹어 치우기는 하였으나 마음에 걸려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이불 속에서 뜬눈으로 이리 구르고 저리 굴러도 편안하지가 않습니다. 고통스럽게 밤을 지새우기보다 벌을 받을지언정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늦은 밤에 아버지께 말씀드리기 어려워 종이에 몇 줄 적어 돌돌 말아 아버지 침실 열쇠구멍에 끼워 넣고 돌아왔습니다.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마자 아버지가 노한 모습으로 달려오실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아버지 침실 쪽으로 향해 갔습니다. 그런데 열쇠구멍에 꽂혔던 종이가 없어졌습니다. 구멍을 통해 살펴보니 아버지께서 종이조각을 읽으시며 눈물 닦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더 오래 지체할 수 없어 간디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잘못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를 꼭 껴안아 뜨거운 사랑을 표시해주셨습니다. 후에 간디는 성인이 되어 이때의 경험을 회고하면서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님의 인자하신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노라고 술회하였습니다. 스스로 회개하는 자에게 임한 은혜입니다.

본문 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여기 ‘거두어들이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엔'은 '거부하다, 싫어하다, 뉘우치다'라는 뜻입니다. 즉 욥이 자신의 어리석은 말과 행동을 싫어하며 스스로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대한 뉘우침을 표현한 것입니다.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한 것은 철저하고 완전한 회개의 표시이며 애통하며 스스로를 겸비하게 하는 것임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중심으로 회개할 때 영적인 눈이 열립니다. 분별력이 생깁니다. 잃었던 평안과 기쁨이 회복됩니다. 억지 회개가 아닌 스스로 회개에 이르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눈으로 뵙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미국의 알래스카 주(State of Alaska)는 본래 소련의 소유지였습니다. 소련인들은 얼음덩어리로 덮여 살기에 부적합하고 관리가 힘들다고 알래스카를 1867년 미국에 단돈 720만 달러에 팔아 버렸습니다. 그러나 돈으로 살 수 없는 가치가 그 땅에 숨어 있음을 그들은 전혀 몰랐습니다. 현재 미국에서 사용하는 석유의 대부분이 알래스카에서 나오고, 가스는 물론 묻혀있는 지하자원의 양이 가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랍니다.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닙니까? 보는 눈이 없기에 빼앗긴 것입니다. 아무리 영적 축복을 부어도 볼 줄을 모른다면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믿음으로 볼 줄 아는 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가장 귀한 복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부디 영적인 눈이 열려지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떤 것인지, 천국의 복이 무엇인가 깨닫고 눈으로 주를 바라보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모름지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함으로 갑절의 복이 회복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전에는 귀로 주를 들었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라는 신앙고백을 하는 성숙한 믿음의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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