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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빌 1: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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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빌 1:20-30)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는 말씀은 빌립보서의 주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라'가 주제인 빌립보서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바울이 옥중에서 기록한 이른 바 옥중 서신이라고 하는데서 사뭇 진지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통스러운 감옥생활에서 말로만 기뻐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을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빌립보서는 바울이 주후 60-62년경에 로마에 1차 감금 시에 기록된 것입니다. 
빌립보교회는 A.D. 50년경에 바울의 제 2차 전도여행 중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바울이 드로아에 있을 때 환상 중에 마게도냐로 향해 계속 나아가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때 빌립보는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유럽 최초의 도시가 되었습니다. 처음에 이 교회는 이방 여인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보이는 것은 그 어떤 지역보다도 핍박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능력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기쁨은 오직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에 있었습니다. 그는 살든지 죽든지 자신이 전하는 복음으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바울의 삶의 철학이었습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라는 말은 

Ⅰ. 바울의 기독화적(基督化的) 삶을 고백 하는 말입니다. 

본문 1장 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존귀』라는 말, 메갈룬데세타이( )는 '위대하게 만들다', '크게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있는 간절한 기대와 소망은 바로 그리스도만을 존귀케 하고 위대하게 하는 것입니다. 

옥중에 감금된 사도 바울은 장차 재판의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자신에게는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재판의 결과에 무관하게 복음에 대하여 담대히 변증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재판 결과가 사형이든지 풀려나든지는 중요하지 않고 재판석상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그에게는 큰 과제이자 고민이었습니다. 
이렇게 예나 지금이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지막이 되면 이 세상에 토해 놓는 것이 공통적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증언이 하나님의 능력과 계획의 효과를 증대시키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이것이 바울의 마지막 로마 투옥이 아니었지만 그는 여기서 처형될 수도 있고 석방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재판이 불리하게 되어 형장에서 처형된다면 그의 순교를 통해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렇지 않고 석방이 된다면 그는 계속해서 주의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기독적 삶, 곧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는 것입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라는 말은 

Ⅱ. 바울의 생사관(生死觀)을 고백하는 말 입니다. 

본문 1장 21절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라고 했습니다. 
여기 {이는}이라는 이유 접속사, 갈( )로 시작해서 『내게』라는 대명사는 '다른 사람과 전혀 관계없이' 혹은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오직 나는 확실하다'는 말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눈치나 생각에 치우치지 아니한다는 의미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라는 말은 자신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자신의 삶 자체가 그리스도에 의해서 통치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1장 27절에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고 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보다 여기서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가치 있는 일을 행하는데 있었습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자신은 죽고 그리스도가 자신 속에 산다는 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법칙 외에 내게는 다른 철학이 없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지배하는 강력한 지배 이데올로기가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심지어 얼굴 표정까지도 일체가 되어야 합니다. 
목사가 한 교회에서 줄곧 시무하는 것이 왜 어려운지 아십니까? 자료를 준비해서 설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설교와 함께 삶 속에서 실천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교역자가 자신은 하지 않으면서 교인에게 하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못할 짓입니다. 그래서 양심에 찔려서 더 이상 교역을 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그만 두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라는 말은 

Ⅲ. 바울의 순교적 신앙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본문 1장 21절에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죽는 것』, 아포다네인( )은 죽음 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완료되지 않은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감옥에서 지극히 위험한 상태에 놓여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살기가 싫은 나머지 자살적 의미로 한 말이 아닙니다. 흔히 무슨 일이 잘 되지 않고 고통스러울 때 사용하는 그만 죽었으면 좋겠다라는 참혹한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것이 기쁜 일이었습니다. 
본문 1장 23절에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8절에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 했습니다. 

주께로부터 상을 받는 즐거움이 있기 때문입니다. 고(故) 손양원 목사님이 작사한 '주님 고대가'는 주께로 가고자 하는 간절함이 구절구절 배여 있습니다. 
"낮에나 밤에나 눈물 머금고 내 주님 오시기만 고대합니다. 가실 때 다시 오마 하신 예수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먼 하늘 이상한 구름만 떠도 행여나 내 주님 오시는가 해 머리 들고 멀리멀리 바라보는 맘 오 주여 언제나 오시렵니까 …"
디모데후서 4장 7-8절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죽음도 임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다는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죽음은 단순한 비극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기대와 소망의 실현이었습니다. 죽음은 이생의 수고와 고통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장 30절에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요한일서 3장 16절에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했습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 사명 수행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입니다. 
사도행전 20장 24절에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주의 이름이 전파되기 위해서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신앙입니다. 곧, 이것은 개혁주의 사상의 신행일치 신앙입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고 했습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라는 말은 

Ⅳ. 바울의 필연적인 사명 수행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본문 1장 22-24절에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법정에서 석방된 삶에 대해서 내 일의 열매라고 했습니다. 여기 {내 일}은 바로 바울 자신이 생명처럼 여기고 있는 복음 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옥중에서 석방된다고 하면 그리스도가 증거 되는데 죽는 것 보다 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 {가릴는지』라는 말은 선택한다는 의미인데 자신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마음도 있지만 다시 살아서 복음을 전파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심리적 갈등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은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육체적 부활에 대한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13-16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찐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으면 영혼이 연옥에 머문다든지 잠자는 상태가 아니라 즉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8절에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고 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 했습니다.
비록 이러한 선택권이 바울 자신에게는 없었을지라도 그는 훨씬 더 좋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 18절에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개인적으로는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하지만 살아 있는 것이 빌립보교회에 유익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빌립보교인들에게 유익하다는 말은 그의 빌립보교회를 향한 목자적 사명 수행에 따르는 빌립보교회의 열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의 ① 믿음의 진보와 기쁨(25절)입니다. ② 그들의 자랑이 바울 자신에 의하여 풍성하게 되는 것입니다(26절). ③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 계속되는 것입니다(27절). ④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27절). ⑤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28절). ⑥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고난도 함께 받는 것입니다(29절). ⑦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함입니다(30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형편과 처지가 어렵더라도 뒤로 물러나 침륜(沈淪 ; 권세가 없어서 몰락함)에 빠질 자가 아닙니다(히 10:39). 왜냐하면 우리의 신분이 용납하지 아니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9절에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한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진정한 기독인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사관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순교적 신앙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필연적 사명 수행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장수(長壽)적 삶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러나 단지 오래 사는 것으로는 무의미합니다. 인생이 늙도록 부하고 존귀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버린 바 되어서는 안됩니다. 

버림당하지 않는 삶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는 삶입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시편 71편 18절에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주의 능을 장래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까지 나를 버리지 마소서』라고 한 말씀은 우리의 삶의 목표와 존재 의의와 가치를 알려주는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분명하고 확실하지 못한 것은 이미 타락한 자들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도록 분명한 삶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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