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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긍휼이 크신 여호와 (삼하 2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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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휼이 크신 여호와 (삼하 24장) 
 
 
사무엘상하를 마감하면서 신정왕국의 왕의 역할과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무엘하 21-24장의 6개의 하부단락의 첫 단락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진노하심을 배경으로 시작했고 마지막 단락 역시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1a)하시는 배경으로 전개됩니다. 첫 단락은 진노하신 이유를 공개했지만 마지막 단락은 공개하지 않는다는 차이점이 있지요. 사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하시는 일을 일일이 인간들에게 보고해야 할 의무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하셨는가?’라는 의혹이 투명하게 밝혀지지 않을 때 인간의 거만한 마음은 불편해지고 하나님께 따질 준비를 합니다. 마치 독재자에게 억울하게 희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분을 부당하다고 공격할 마음이 되지요.

욥기를 보면 독자들은 욥이 고난 받는 이유를 알지만, 욥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전혀 부당하지 않으심을 욥이 신뢰하면서 끝나지요. 소위 저마다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욥의 고난에 대해 분석하고 토론하면서 갑론을박했지만 아무도 확실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욥기는 사람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과 행할 수 없는 일들이 세상에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지혜로우시고 전능하시기에 결코 부당하게 세상을 통치하지 않으심을 가르쳐줍니다. 최선을 다해 이유를 알고자 하는 노력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 자체까지 흔들어서는 안되겠지요.

이스라엘에 대해 진노하신 하나님께서는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1b)하셨습니다. 성경의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지으려는 마음을 가지도록 유혹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약 1: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구절은 마치 하나님께서 죄를 범하도록 부추기신 것처럼 표현되어 있지요. 월터 카이저(Walter Kaiser)라는 학자는 ‘무엇이든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행하시는 것’으로 여겼던 히브리적 사고의 특징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욕망을 막아주시지 않으시고 방임하셨지만, 이 사건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개입하셨음을 강조한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막아주시는 은혜를 잠시 거두셨을 때,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소원했습니다(2). 둘째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이런 일을 기뻐”했습니다(3). 셋째로 그런 악을 지적하는 말을 듣지 않고 죄를 고집하며 “재촉”했습니다(4). 이런 모습들은 사울이 보여준 전형적인 특징들입니다. 사무엘서가 끝나는 지금, 우리는 다윗 속에서 사울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다윗도 사울과 같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막아주시지 않으면 다윗조차도 죄를 소원하고 기뻐하고 고집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나는 사울 같지 않다’고 말할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했습니다. 이제는 섰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의 위험성을 지적했지요. 성화되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 없이도 자립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간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한 순간도 설 수 없음을 깨닫고 그분을 더욱 의존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인간은 항상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한 순간도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때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잠시라도 은혜를 간과하시면 금방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죄에 넘어집니다. 죄를 소원하고, 죄를 기뻐하고, 죄를 재촉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상실하게 됩니다.

다윗이 인구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었습니다.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10a). 출애굽기는 “네가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를 따라 조사할 때에 조사 받은 각 사람은 그 생명의 속전을 여호와께 드릴지니 이는 그 계수할 때에 그들 중에 온역이 없게 하려 함이라”(출 30:12)는 말씀을 통해 합당한 인구조사가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인구 조사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었지요. 다만 조사된 각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명의 속전’을 드리지 않았거나 다윗의 조사 동기가 자기 세력을 확인하고 자랑삼으려 했다든지 해서 죄가 된 것이지요. 본문에서 어떤 잘못인지는 분명하게 밝히지 않습니다.

인구조사는 “아홉 달 스무 날”(8)이 걸렸었습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는 철저한 오해입니다. 만일 하나님께로 돌아설 수 있는 능력이 죄인에게 있었다면 애당초 구원자는 필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롬 9:1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셔야만 강퍅함에서 돌이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임하였을 때,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나타난 현상은 회개의 마음이 생겼다는 점과 죄의 심각성을 시인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10b)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상이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것들을 얻어야만 하나님께서 은혜 주신 줄로 생각하고 감사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죄로 인해 마음아파하고, 죄를 회개하는 일들은 하등의 가치가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는 일이 참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죄가 모든 불행의 원인임을 아는 사람이지요. 하나님의 뜻대로 행치 않은 것이 “심히 미련”한 일이었음을 진정으로 깨닫는 사람입니다. 회개에 관심을 가지고 중요하게 취급하지요.

사무엘서를 보면 다윗도 사울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죄를 범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더 악한 죄를 범하기도 했지요. 죄를 행하는 측면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큰 차이를 볼 수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진노 하에 있을 수밖에 없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들의 두드러진 차이점은 ‘회개’라는 측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울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으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지적해 주실 때마다 진실하게 회개했지요. 회개하지 않은 사울은 버림을 받았고 회개한 다윗은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처럼 성경의 가치관으로 평가할 때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너무나 가치가 큰 것이고 참으로 감사할 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선견자 갓을 통해서 세 가지 징계들을 제시하신 후에 “그 중에서 하나를 택”하도록 명하셨습니다(11-12). 회개했다고 해서 죄를 범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취급하지는 않으신 것이지요. 지난번에도 설명했듯이 죄는 용서받아도 징계는 당합니다. “기근”과 “대적에게 쫒겨”다니는 일은 다윗이 이미 무섭도록 경험한 일입니다. 남은 것은 삼일 동안의 “온역”뿐인데 참 곤란한 선택의 순간입니다(13).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14)고 했습니다. 징계를 받으면서도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에 대한 깊은 신뢰를 나타내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온역을 이스라엘에게” 내리셔서 “칠만” 명이 죽었습니다(15). 다윗이 뿌듯하게 생각했을 인구 숫자에 치명적인 손상이 생긴 것이지요. 다윗은 “나는 범죄하였고 악을 행하였삽거니와 이 양무리는 무엇을 행하였나이까 청컨대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비의 집을 치소서”(17)라고 고백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작정을 모르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다만 자신의 잘못으로 백성들이 고통당하는 것으로 생각했지요.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백성을 벌하시기 위해 다윗의 잘못을 매개체로 사용하셨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통해 각자 자기를 돌아보고 자기 잘못을 회개하도록 하고 계심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태도에는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의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첫째는 징계 중에도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신뢰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변함없으신 성품인 긍휼하심을 굳게 붙듭니다. 환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이 최상임을 잘 알았지요. 둘째는 징계를 감내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회개했으니 없었던 일로 해달라고 가벼이 말하지 않습니다. 용서를 값싼 은혜로 취급하지 않지요. 셋째는 내 탓으로 생각하는 자세입니다. 그는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을 그들의 죄로 돌리지 않고 왕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졌습니다. 넷째는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시작합니다(19). 하나님이 명하신 바에 따라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지요(25).

사무엘서가 보여주는 다윗 왕의 마지막 모습은 회개하고, 다시 말씀에 순종하고, 긍휼을 바라며 기도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실상 그것이 신정 왕국의 인간 왕으로서 할 수 있는 전부였지요. 이렇게 해서 다윗조차도 허물과 죄가 큰 왕이라는 것, 그도 긍휼로 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왕으로 경배 받으실 분은 여호와뿐이심을 드러납니다. 백성들에게 진노하시는 이야기들 속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이 왕국의 진정한 왕이신 분의 성품입니다.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 죄는 반드시 벌하시되 회개한 자를 용서하시는 하나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할 방법을 계시해 주시는 하나님, 회개한 자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그리고 부족한 자를 쓰시는 하나님.

아담의 범죄 이후에 이 땅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땅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들과 순종하는 자들, 회개하지 않은 자들과 회개한 자들이 섞여 사는 땅이지요. 우리 주님의 재림까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조차 죄와 허물을 반복할 것입니다. 모두가 불완전한 사람들이라 서로 상처를 주고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징계하심이 전혀 없는 삶을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은, 긍휼이 크신 하나님께서 지금 여기 이 땅에서 우리의 왕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사무엘서를 마감하면서 하나님의 성품들을 생각하고 그분을 깊이 신뢰하며 온전히 경배 드리는 모습이 되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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