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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라! (딤후 2: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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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라!  (딤후 2:8-15)

 
이 편지는 스승인 사도 바울이 아들과 같이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너는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딤후 2:3)
병사는 싸우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라면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싸우는 사람입니다. 싸운다는 말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말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출현 자체가 싸움의 결과입니다. 기독교 안에서도 싸움이 많았습니다. 심하게 표현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싸움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싸움이 없었으면 교회는 유대교의 한 분파 정도로 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싸움이 아니라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궁극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거짓 평화를 요구할 때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초대 교회는 로마 제국의 평화와 맞서 싸웠습니다. 로마 황제의 통치 체제를 절대화하는 개념이 바로 로마 제국의 평화였습니다. 그 당시 모든 나라와 민족이 그 개념에 동의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초대 교회는 결코 거기에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비록 칼을 들고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 자체가 치열한 싸움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알고 보면 예수님의 삶도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시대 정신에 고분고분 따른 종교 지도자 정도로 생각하면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인간 존재의 허무함을 깨닫고 자기 자신 안에서 부처를 발견하라고 가르쳤던 석가모니와 전혀 다른 삶을 사셨습니다. 석가모니는 조용히 내면 세계에 접근했지만 예수님은 외부 세계와 충돌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석가모니나 공자와는 달리 30대 초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그런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투쟁의 방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도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은 마술과 같은 사건이 아닙니다.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십자가 모형을 들면 악한 영이 도망치는 것 같은 그런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치열한 싸움의 결과라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진리를 위한 싸움을 사람들은 아주 귀찮게 생각합니다.
때문에 개혁이 힘든 것입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면 따돌림을 받기 쉽습니다. 체벌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교육 현장에서 체벌 없는 교육을 주장하면 왕따를 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체로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무엇이나 트집 잡기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불평을 일삼는 것과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불평은 자기 자신에게만 예민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런 사람은 누가 인정해 주기만 하면 옳지 않은 것도 얼마든지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추구하는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예민한 것이 아니라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은 옳지 않은 것이 용납되는 현장에서 어려움을 겪게 마련입니다. 그 옛날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이 바로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로 살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묻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진리라는 말 자체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진리에 속한 싸움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진리를 위해서 싸우는 것이 정말 힘듭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벅차지 않습니까? 당장에 먹고 살기도 힘든 마당에... 그렇습니다! 일단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야 합니다. 현장에 나가 일하지 않으면 당장 굶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답게 진리를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 거리가 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자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이 항상 그렇게 급박한 것은 아닙니다. 당장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먹는 문제만 하더라도 생존 자체를 위한 것보다는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먹을 수 있을까 하는 문제 때문에 마음의 여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다운 삶을 살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복음을 외면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보여 주고 있는 모습이 꼭 그렇지 않습니까? KTX가 통과하는 지역 역 이름을 통도사라고 짓는 것을 반대하는 일에는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면서 북에 있는 동포들의 배고픔을 달래 주는 일에는 관심조차 없지 않습니까? 그런 일은 외면한 채 사춘기 소녀들처럼 자기 교회를 키우는 일이나 개인적으로 복을 받는 일에만 열심을 내고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그리스도 예수의 병사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영적으로 늘 예민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로 군인들도 전투에 대해서 항상 예민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때문에 군인들은 평소에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영적으로 훈련을 해야 합니다. 무뎌진 우리의 영혼이 깨어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훈련을 해야 합니까? 오늘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한 훈련의 핵심 내용은 기억입니다.

"기억하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딤후 2:8)
또한 이어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14절 말씀입니다.
"너는 그들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
그 당시 교회 안에 말다툼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교회 안에서 말다툼을 하지 말게 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게 하라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 믿음 생활의 기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것이 목회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주님을 기억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살 수 있는 영적인 능력이 회복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물론 기억한다는 것을 시시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좀 더 화끈한 것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은 기본적으로 기억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구약의 핵심 내용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어떻게 구원의 역사를 펼치셨는지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사건을 계속해서 기억해야 했습니다.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때마다 무교병을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출애굽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했고 그 기억으로 모진 세월을 참고 견딜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기본도 기억입니다. 이천 년 동안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찬송을 불렀습니다. 우리가 매 주일 행하는 성만찬 예식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기억하는 예식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동물 중에서 인간의 기억력이 가장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뇌출혈 등으로 뇌의 일정 부분이 상하면 기억력도 떨어집니다. 건강한 사람도 건망증 때문에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뇌가 기계적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것 같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뇌도 선택을 한다는 말입니다. 똑같이 당한 사건이라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는가 하면 사라지는 것도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의지와 특히 믿음의 태도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평소에 무엇에 대해서 관심이 있느냐에 따라서 기억의 내용도 달라집니다.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살기 위해서 당연히 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우리의 기억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기억하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오늘 우리도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디모데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알고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시간이 가면서 모든 것이 느슨해지기 쉽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일수록 오히려 주님을 기억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병사로 언제라도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영적으로 긴장하고 있습니까? 부활하신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것 같으면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주님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주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어둡고 캄캄한 이 세상을 밝히는 충성스러운 부활의 증인들이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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