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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과 동행(同行)하십시오! (왕하 4:8-37,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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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동행(同行)하십시오! (왕하 4:8-37, 8:1-6) 


1. 동행(同行)

중증 장애를 앓고 있는 아들을 둔 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은 ‘Dick’이고 아들의 이름은 ‘Rick’입니다. 출생 시 탯줄이 목을 감아 뇌에 산소 공급이 중단되면서 뇌성마비와 경련성 전신마비를 갖게 된 아들에 대해 의사는 안락사를 권유했습니다만, 가족들은 아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가운데 자라가던 릭이 컴퓨터로 감정과 의사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던 어느 날, 릭이 가장 하고 싶은 것을 말했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달리고 싶다’였습니다. 생명마저 포기하라던 아들이 그나마 살아있는 것이 감사하고, 자기 의사를 표현하게 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으로서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달리고 싶다’고 싶다니요? 그것이 가능이나 한 일입니까? 그런 가운데 아들의 소원은 점점 구체적으로 변해 갔습니다. 자신이 <철인3종경기>에 나가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트라이애슬론’이라는 이 경기는 올림픽의 경우, 개인이 수영 1.5km 자전거 40km 그리고 10km를 달리는 경기입니다. 이 세 종목은 혼자서도 해내기 어려워서 “철인3종경기”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장애인이 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여 그 아들의 소원을 거절할 수 없었던 아버지 딕은 다니던 직장을 모두 그만두고 아들과 함께 <철인3종경기>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아들이 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탄 보트를 끌면서 수영을 했고, 아들을 태운 채 자전거를 몰았으며, 아들의 휠체어를 밀면서 달렸습니다. 아버지에게는 남들보다 2배의 힘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아버지와 아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말했습니다. “불가능한 일이다. 미친 짓이다!” 그들의 말처럼 혼자서도 버거운 이 일을 나이가 든 아버지가 아들을 태우고 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철인3종경기>에 참가했습니다. 

경기 때마다 그들은 모든 참가자들이 결승선에 들어오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결승선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자리에 남아 환호와 눈물 속에 기립 박수로 그 父子를 맞아주었습니다. 그들은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서포터들과 네티즌들에게서 아낌없는 박수와 응원을 받으며 달리고 있습니다. 언젠가 이 딕과 릭 父子가 <오프라윈프리 쇼>에 출연했습니다. 그때 오프라 윈프리가 두 사람에게 “왜 이런 힘든 일을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딕은 ‘달리는 것을 행복해하는 아들과 함께 달리는 것이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2년 전, 아버지 딕은 심장이 안 좋아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검진을 한 의사가 딕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15년 전 아들을 위해 달리지 않았더라면 벌써 심장마비로 죽었을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아들을 위하여 아들과 함께 달린 것이 결국 자신에게 더 유익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정말 아름다운 동행이지 않습니까? 온 몸을 전혀 움직일 수 없는 아들을 위하여 <철인3종경기>를 한 아버지, 아버지 때문에 일반인도 할 수 없는 <철인삼종경기> 선수가 된 장애 아들, 그리고 그 아들 때문에 운동하면서 자신의 병을 이겨낸 아버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행”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여러분, 아름답고 의미 깊은 단어들이 많습니다만, “동행”이라는 말도 그 가운데 하나이지 않습니까? 동행(同行)이란 ‘같이 길을 간다’는 뜻과 ‘같이 길을 가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누군가와 함께 길을 가는데, 낯선 사람이라도 좋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동행한다면 더더욱 좋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동행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계절이 가을이라고 합니다. 둘레길이든 올레길이든 아님 산길이나 들길을 한 번 걸어보고 싶은 가을색이 짙어가는 이 계절에 여러분은 그 길에 누구와 동행하고 싶으신지요?

2. 평생을 하나님과 동행하다.

오늘 본문에는 평생 <아름다운 동행>을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쉬운 것은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인데, 그래도 성경에는 선지 생도의 아내, 예수님을 위하여 자신의 나귀를 풀어준 사람, 마지막 만찬 장소와 만찬을 준비해 준 사람 등, 이름이 밝혀지지 않고도 아름다운 삶을 산 사람들이 많은데,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역시 이름 대신 그저 “수넴 여인”이라고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그녀의 삶이 아름답고 빛나는 이유는 그녀가 에녹처럼 평생을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1) 첫 번째 동행/ 섬김(왕하4:8~17)

주전 850년 경, 갈멜산을 중심으로 사역을 하던 선지자 엘리사는 자신의 개인 수행비서인 게하시와 함께 항상 선교 여행, 사역 여행을 했습니다. 수넴 성은 다볼 산, 나사렛, 나인성 등 여러분이 잘 아는 곳에서 2~30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갈멜산을 오고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이적과 위대한 사역으로 인하여 이미 유명인사가 된 엘리사였기에 갈멜산 근방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엘리사를 알아보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수넴 성을 지날 때 마다 엘리사를 눈여겨보고서는 항상 음식을 준비하여 정성껏 대접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가 바로 ‘수넴 댁’이죠.

이 여인이 엘리사를 대접한 것은 자기 혼자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종 열심이 특심한 여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관심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 때문에 오해를 받을 때가 많은데, 이 여인은 엘리사를 대접하는 일에 남편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선지자를 대접하다보니 지나다닐 때 음식 대접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멜산에서 거의 노숙하다시피 생활하는 데다가, 거기 선지 학교가 있어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한다고 해도 불편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넴 여인은 남편과 의논해서 엘리사를 위하여 작은 방을 꾸몄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침대, 책상, 의자, 촛대를 설치해서 선지자가 하루든 며칠이든 좀 더 편안히 지내도록 배려했습니다.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지나다닐 때마다 식사 대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를 위하여 방을 제공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죠. 여러분은 저를 위하여 여러분의 집 방 하나를 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이 수넴 부부는 정말 쉽지 않은 섬김을 했습니다. 

그렇게 방까지 제공하며 자신을 섬기던 수넴 여인의 집에서 잠시 쉬고 있던 엘리사는 두 사람의 주도면밀한 배려와 대접에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게하시를 통해 여인을 불렀고, 엘리사의 방문 앞에 선 여인에게 은혜를 갚을 마음으로 ‘왕이나 군대장관에게라도 구할 것이 있으면 돕겠다’고 제의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은 ‘그저 백성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다’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종 사역자들을 대접한 것으로 충분하지 무슨 보답이나 상을 기대한단 말입니까?’ 이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 정말 대단한 여인이지 않습니까? 

여인이 돌아간 후, 게하시가 엘리사에게 ‘여인에게는 아기가 없고 남편은 늙었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아들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엘리사는 보답할 것이 무엇인가를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여인을 다시 불러 여인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축복하면서 “내년 이맘때쯤 아들을 안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자신을 속이지 말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엘리사의 말대로 수넴 여인은 임신을 했고, 그 이듬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수넴 여인은 자식이라도 하나 얻어 볼 속셈으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를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군이기에 하나님을 대접하는 심정으로 정성껏 식사를 대접했고, 남편과 함께 방을 아늑하게 꾸미는 등 아무 조건 없이 정성을 다했을 뿐인데, 뜻 밖에 아들을 얻는 복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아무 조건 없이 정성껏 대접한 후에 100세에 이삭을 얻는 복을 받은 것처럼 말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도 하나님을 잘 섬겨서 이 여인처럼 은혜와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리는 것, 십일조 등으로 주신 것에 감사하는 것, 찬송과 기도가 끊이지 않는 것, 전도와 선교와 봉사와 구제 등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자들에게 순종하고, 교회에 충성하는 것이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작은 소자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주님을 잘 섬김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 동행/ 믿음(4:18∼37)

이렇게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사역자들을 섬김으로 뜻하지 않은 복을 받은 수넴 여인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이 닥쳤습니다. 갑자기 아들이 죽어버린 것입니다. 평생 자식을 낳지 못하다가 늦은 나이에 어렵게 얻은 자식인데, 졸지에, 그것도 그 어미의 무릎에서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아이를 보는 여인의 심정과 참담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도대체 이런 일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시련과 고난에는 반드시 뜻이 있고 목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어떤 일정한 원칙을 찾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수넴 여인은 경건함과 선지자를 섬긴 정성에 대한 여호와의 선물로서 아들을 얻었는데, 왜 하나님은 욥도 아닌 이 여인에게서 아이를 굳이 이러한 식으로 데려 가셨을까요? 그리고 여러분, 보통 여인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마 소리를 지르고 울며 제일 먼저 남편에게 뛰어갈 것입니다. 하인들이 있다면 그들을 시켜 남편과 사람들을 속히 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행동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먼저 아이를 엘리사의 침상에 두고 문을 닫고 나왔습니다. 그러고는 아들의 죽음에 대해 남편에게는 알리지도 않고, 하나님의 사람을 만나고 오겠다고 남편에게 보고했습니다. 여인은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고 있는 남편에게 그저 “평안”이라고만 하고, 아이에 대하여 일절 말하지 않은 채 엘리사에게로 갔습니다.

정말 침착하고 신중하며 범상치 않은 행동이죠? 여인의 이러한 태도 속에는 여인의 확신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이의 소생입니다. 그 믿음이 있었기에 남편에게 굳이 아이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던 것이죠. 수넴 여인은 나귀를 타고 사환에게 ‘빨리 달리라’고 했습니다. 수넴에서 갈멜까지는 약 50킬로미터 정도입니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은 여인에게 엘리사는 안부를 물었습니다. 26절, “너는 평안하냐? 네 남편이 평안하냐? 아이가 평안하냐?” 즉 엘리사는 그녀에게 “샬롬”을 물은 것이죠. 그러자 여인의 대답 역시 “평안”, 즉 “샬롬”이었습니다. 

그녀가 남편에게도 한 말도 평안이었고, 선지자에게 한 대답도 평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 그녀가 평안합니까? 그녀는 현재 전혀 평안하지 못한데도, 왜 계속 “평안”이라고 답하는 것일까요? 아들이 죽었다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오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죽음’을 외치지 않고 ‘소망’을 갖고 엘리사에게로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감정을 잘 억제하던 여인이 엘리사를 만나자마자 얼마나 감정이 북받쳤든지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엘리사의 발을 안았습니다. 상당히 민망하게 여겨질 이러한 그녀의 행동을 게하시가 만류하려고 하자 엘리사는 “가만 두라. 그의 영혼이 괴롭다”라고 말했습니다(27). 심리학자들은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그것을 감정적으로 잘 나타내지 않을 때가 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수넴 여인은 이제까지는 자신의 슬픔을 잘 절제해 왔으나 엘리사 앞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합니다. 28절, “내가 내 주께 아들을 구하더이까? 나를 속이지 말라고 내가 말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말 속에는 ‘구하지도 않은 아이를 주신 분이 여호와와 당신임으로 이제 내 아들을 책임져 주십시오’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문제를 알게 된 엘리사는 즉시 게하시에게 “네 허리를 묶고 내 지팡이를 손에 들고 가라. 사람을 만나거든 인사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인사할지라도 대답하지 말고, 내 지팡이를 그 아이 얼굴에 놓으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29). 그만큼 寸刻을 다투는 일이므로 조금이라도 지체하지 말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위하여 게하시가 떠났는데도, 수넴 여인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원한 것은 게하시가 아니라 엘리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엘리사가 자신과 함께 가기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고히 밝혔습니다(30). 그 말에 엘리사는 그 여인과 함께 여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가는 길에 게하시를 만났는데, 자신이 가서 지팡이를 그 아이의 얼굴에 놓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고 보고했습니다. 

여인의 집에 도착한 엘리사는 아이의 시체가 자신의 침상에 눕혀져 있는 것을 본 후, 방문을 닫고 아이와 둘만 남았습니다. 그러고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려 자기 입을 그 입에, 자기 눈을 그 눈에, 자기 손을 아이의 손에 대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이의 체온이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엘리사가 몸을 일으켜 방 안에서 이리 저리 다닌 후, 다시 아이 위에 올라 엎드렸더니, 아이가 일곱 번 재채기한 후 눈을 떴습니다. 아이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를 불러 “저 수넴 여인을 불러오라”하여 “네 아들을 데리고 가라”고 말했습니다(36).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이런 장면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습니까! 수넴 여인은 엘리사의 발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했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계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 것을 경험하면서, 그 경이로움에 대해 감사와 찬양의 표현으로 엎드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에게는 이와 같은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의 눈으로는 기적이요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일들이 하나님께는 평범한, 너무나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놀라운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3) 세 번째 동행/ 인도, 보호, 그리고 증거(왕하8:1~6)

오늘 본문 8장에는 여인의 생애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 나옵니다. 그 기록 역시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1절, “엘리사가 이전에 아들을 다시 살려준 여인에게 이르되 너는 일어나서 네 가족과 함께 거할만한 곳으로 가서 거하라. 여호와께서 기근을 부르셨으니 그대로 이 땅에 칠년 동안 임하리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에 7년 동안의 기근을 명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대해 심판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심판 가운데 신실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백성에 대해서는 피할 길을 내시는 것이 8장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경외하는 백성에게 이스라엘에 기근이 있을 것을 알려 주심으로써 잠시 피하게 하셨다는 것이죠.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그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삶의 위기를 피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고난을 만나게 하시고, 또 그것을 이기게도 하지만, 그것을 피하게도 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 장면을 보면, 광야 이스라엘의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떠오릅니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신실하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들에게는 이러한 은혜와 복이 임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수넴 여인 가족이 환난을 피한 데는 다른 목적도 있었습니다. 굳이 기근에서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이방 땅으로 가라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스라엘 땅에 그대로 머물게 하시면서도 ‘멈추지 않는 기름과 가루’와 같은 기적을 베푸시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수넴 여인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벗어나게 하시고 기근이 끝났을 때 다시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수넴 여인을 내세워서 뭔가 하시려는 계획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기근이 끝나고 수넴 여인이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7년간 집을 떠나 있는 동안, 누군가가 여인의 집과 전토를 차지하고서 경작을 했고, 수넴 여인 가족에게 그것을 돌려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왕에게 호소하기 위해 아들을 데리고 왕을 찾아갔을 때, 왕은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를 불러서 엘리사가 행한 일에 대해 묻고 듣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엘리사가 행한 일을 묻고 있었던 것은 아마 ‘7년 기근으로 인해서 아주 어려워진 이스라엘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엘리사에게 있지 않을까 알아보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엘리사가 행한 일을 들어보고 엘리사를 불러서 도움을 요청할 생각이었던 것이죠. 마침 게하시가 엘리사가 죽은 아이를 다시 살린 일을 얘기하고 있을 때, 수넴 여인이 들어와 왕에게 자기 집과 전토에 대해 호소했습니다. 그때 게하시는 “내 주 왕이여! 이는 그 여인이요, 저는 그의 아들이니, 곧 엘리사가 다시 살린 자니이다”라고 말했습니다(8:5). 그러자 왕은 관리를 임명하여 여인의 집과 전토와 나아가 이스라엘을 떠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밭의 소출까지 모두를 돌려주도록 명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인으로 기근을 피하게 하시고, 7년 기근이 끝났을 때 왕 앞에 서게 하신 것은 바로 이 목적 때문이었습니다. 아니 아이를 주시고, 그 아이를 다시 살리신 목적도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 앞에 수넴 여인과 그 아들을 세우신 것은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증거가 되도록, 그리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지를 분명하게 보이려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자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증인으로 살아가는 것이죠. 여인이 이스라엘 왕에게 한 말은 단지 자신의 집과 전토에 대한 것뿐이었습니다. 왕에게 자신의 ‘아들이 죽었다가 엘리사로 인해 다시 살아났으니 왕도 하나님만 신뢰하라’는 식의 전도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여인과 함께 한 그 아들이 하나님의 기이한 일의 증거물이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동행하시면서 은혜를 베푸시고 기이한 일을 행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증거자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오셨습니까?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증거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증거하며, 하늘의 복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오셨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모든 마음을 세상, 땅에 두고 살아갑니다. 하늘에는 도통 관심들이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보다 보이는 것만을 신뢰하면서 거기에 모든 소망을 두고 살아갑니다. 성도가 그렇게 살아서 되겠습니까? 성도가 세상과 똑같이 보이는 것과 이 땅에 마음을 두고 살아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무엇으로 하나님의 기이한 일을 증거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여러분의 사명을 확인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땅과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보여주는 사명자입니다.

3. 하나님과 함께 하는 아름다운 동행

말씀을 맺겠습니다. 동행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가을입니다. 오늘, 이 가을에 여러분과 동행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는지요? 

1820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제니린드(Jenny Lind)’는 열일곱살에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하여 세계 최고의 명성을 얻었으며, “19세기 최고의 오페라 가수”라는 찬사를 얻었습니다. 그녀는 세계 여러 나라로부터 초청을 받았고, 각 나라 국왕 앞에서 특별 콘서트를 할 정도로 부와 명성을 얻었습니다. 30세 때 처음으로 가진 미국 순회 연주는 그야말로 폭발적인 인기였습니다. 그녀의 공연 티켓은 미국 역사상 가장 비싸게 팔렸습니다. 미국에서의 성공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에서의 연이은 성공으로 제니 린드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고,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장갑, 모자, 의자, 구두, 손수건, 소파 등이 날개 돋힌 듯이 팔렸습니다. 

그의 고국 스웨덴은 현재까지 50 크로네짜리 지폐의 인물로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신사임당처럼 말이죠! 그녀가 부른 노래 중에 우리가 잘 아는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니 ….” 그런데 이런 제니 린드가 가수로서 정상에 있을 때 갑자기 가수 활동 중단을 선언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고, 인기의 달콤함을 아는 그녀가 곧 무대로 복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무대를 완전히 떠났고,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몇 년 후, 한 친구가 린드를 찾아가서 물었습니다. “제니! 무대가 그립지 않아?” 그때 그녀는 성경을 가리키며 “돈과 인기 때문에 이 신비를 잠시 잊고 있었지만, 이제는 잊지 못해. 무대 위의 기쁨은 잠깐일 뿐이야.” 라고 말했습니다. 

즉 무대 위에서, 사람들의 인기 속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한 것임을 알았다는 말이고, 그 행복을 놓치기 싫어 무대로 복귀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제니 린드는 수넴 여인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비밀과 그 즐거움을 알았습니다. 세상의 것, 땅의 것, 사람의 것은 이내 사라지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은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고, 때로 그 기쁨과 감격은 영적인 복과 세상의 복으로 주어지기도 합니다. 

어제 오전 우리나라에서도 아름다운 동행이자 아름다운 도전이 있었습니다. 서두에 소개해드린 딕과 릭 부자를 보고 용기를 얻은 우리나라의 父子입니다. 아버지 박지훈씨는 5개의 난치병을 가진 아들을 위해 철인삼종경기에 도전했습니다. 현재 7살인 은총이는 한쪽 뇌가 위축되고 몸이 마비되는 '스터지웨버 증후군'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자라면서 4가지 난치병을 더 얻었고 말도 못합니다. 은총이 역시 6개월에서 길어야 1년 이상 못 넘긴다고 했는데, 아직도 살아있는 은총이를 위해 아버지 박 씨는 2007년부터 은총이를 휠체어에 태우고 뛰는 마라톤을 시작했습니다. 은총이를 세상에 보여주면 치료해주겠다는 의사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은총이처럼 아픈 친구들에게 그 희망을 함께 나누어 주고 싶어서 두 부자는 무모한 도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들, 그리고 이제 그 아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버지,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리,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 역시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뻐하신다는 것! 그래서 딕과 릭 부자, 그리고 박씨와 그 아들 은총이 부자의 모습은 하나님과 성도인 여러분의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성도 여러분, 그들처럼 여러분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지 않겠습니까? 늘 하늘을 경험하고, 신비를 맛보며,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 가운데 아주 특별한 행복을 맛보는 삶, 바로 그 하나님과의 즐거운 동행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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