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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욥 2: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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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욥 2:11-13)


[그 때에 욥의 친구 세 사람, 곧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은, 욥이 이 모든 재앙을 만나서 고생한다는 소식을 듣고, 욥을 달래고 위로하려고, 저마다 집을 떠나서 욥에게로 왔다. 그들이 멀리서 욥을 보았으나, 그가 욥인 줄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 슬픔을 못 이겨 소리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으면서도,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도 처참하여, 입을 열어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 두 사건

지난 주간에 우리는 빛깔이 다른 두 가지 사건 소식을 접했습니다. 하나는 행복 전도사라는 닉네임으로 불렸던 최윤희 씨의 자살 소식이었고, 다른 하나는 칠레 광부들의 생환 소식이었습니다. 한 사건은 탄식을 자아냈고 다른 사건은 환성을 자아냈습니다. 탄식과 환성 사이에 우리 삶이 있습니다. 저는 최윤희 씨를 본 적도 없고 그의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습니다. 하지만 ‘행복 전도사’라는 그의 닉네임을 듣는 순간 안쓰러운 느낌이 몰려왔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을 위로하고, 지친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고,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는 분명 좋은 역할을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 부여된 ‘행복 전도사’라는 닉네임은 그의 삶을 옭죄는 족쇄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사람은 울고 싶을 때 울어야 하고, 웃고 싶을 때 웃어야 합니다. 낙심될 때는 정직하게 절망하고, 새로운 희망에 눈빛을 반짝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인생길에서 겪는 어려움과 좌절은 우리 속에 그늘을 만들지만, 그 그늘 덕분에 우리는 그윽하고 깊은 사람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늘이 없는 밝음은 위태롭거나 위험합니다. 그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자기의 연약함을 시인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물론 그랬을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만일 그럴 수 없었다면 그것은 ‘행복 전도사’라는 그 닉네임 때문이었을 겁니다.

지하 700미터의 갱도에 매몰되었던 칠레 광부들 33명이 69일 만에 생환하는 장면을 보면서 우리는 깊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의 존재 앞에서 인류는 하나였습니다. 비교적 냉철한 저도 그 광원들과 가족들의 감격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언론은 이미 그 생환자들을 영웅으로 만들기에 열심입니다. 그 극한의 상황 속에서 빚어진 인간애와 연대성을 찬미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어김없이 스타로 부각되는 이들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 눈은 습관처럼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그들과 비슷한 근무 여건 속에서 일하는 이들은 여전히 대중의 시선을 비껴난 자리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있고, 그들보다 더 크고 만성적인 절망과 시련의 갱도에 갇혀 있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을 외면한 채 생환자들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 사건의 이면에 있는 불의한 구조를 숨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잠시 동안은 우리가 그들의 생환을 마음 깊이 축하하고 기뻐해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절망의 지하 갱도에 갇혔던 이들은 한 몸 공동체였습니다. 함께 있었기에 두려움과 절망감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가 아닐까요? 이 두 가지 사건을 접하면서 제게 떠오른 것이 엉뚱하게도 욥이었습니다. 

• 욥에게 닥친 시련

여러분은 욥이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련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를 소개하는 성경의 문구만 읽어보아도 그는 참 남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1:1b) 
“그는 동방에서 으뜸가는 부자였다.”(1:3c) 
“욥은 모든 일에 늘 이렇게 신중하였다.”(1:5c)

그는 경건한 사람입니다. 부자입니다. 자녀도 많이 낳아 길렀습니다.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만한 사람이 또 있을까요? 객관적으로 보아도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에게 닥쳐온 불행은 너무나 갑작스럽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욥의 몰락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극도 이런 비극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은 영웅적인 인물에게 느닷없이 닥쳐오는 불행으로서 사람들에게 연민(eleos))과 공포(phobos)의 감정을 환기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욥을 바라보며 연민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리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생에 대해 공포를 느낍니다.

성경은 욥의 이 몰락이 ‘사탄의 질투’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욥을 칭찬하자 ‘참소자’인 사탄은 마치 혼잣소리인양 투덜거립니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1:9b) 사탄의 이 말은 욥기를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주시지 않아도 여전히 우리 신앙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도 아마 궁금하셨던 모양입니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을 맡깁니다. 사탄은 먼저 욥의 재산과 종들을 쳤습니다. 그 많던 재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종들도 죽거나 다쳤습니다. 설상가상이라지요? 곧 이어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자식들도 강풍으로 인해 무너진 집에 깔려 죽었습니다. 

형언할 길 없는 슬픔의 파도가 욥을 삼켰습니다. 그는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옵니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님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1:21)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일종의 저항감을 느낍니다. 

차라리 시편 시인들처럼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하냐고 소리라도 질렀더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여하튼 욥을 넘어뜨리려던 사탄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집요합니다. 사탄은 주님께서 욥의 뼈와 살을 치시면 당장 주님을 저주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쯤에서 ‘됐다’ 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나님은 욥에 대한 시험을 물리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사탄은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에 이르기까지 악성 종양이 나게 했습니다.

그가 겪었을 그 참담한 시련은 자기 혐오감과 뒤섞여 고통을 배가시켰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는 것이 낫겠다는 아내의 울부짖음에도 이렇게 응답합니다. “우리가 누리는 복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는데, 어찌 재앙이라고 해서 못 받는다 하겠소?”(2:10b) 지독한 믿음입니다. 차라리 그가 실어증에라도 걸렸더라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욥의 친구들을 위한 변명

그런데 이제 저는 욥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의 친구들에게 주목하려 합니다.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들은 이후에 전개될 이야기에서 하는 역할 때문에 어느 정도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인물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우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친구인 욥에게 닥쳐온 불행에 대한 소식을 듣는 순간 그들은 벗을 위로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났습니다. 만나서 어떻게 위로하겠다는 생각조차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욥과의 대면을 회피할 수도 있었습니다. 불행조차 전염되는 것처럼 느끼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사를 다 제쳐두고 친구를 향해 달려옵니다. 바쁘다거나, 거리가 멀다거나, 비용이 많이 든다거나, 가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습니다. 이만한 우정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멀리서 욥을 보았지만 욥인 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한참 뒤에야 그가 바로 욥인 줄을 알고는, 슬픔을 못 이겨 소리내어 울면서 겉옷을 찢고, 또 공중에 티끌을 날려서 머리에 뒤집어썼습니다. 마치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친구의 불행을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밤낮 이레 동안을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서 지냈습니다. 편안한 집을 놔두고 사서 고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하루도 고통 속에 있는 친구 곁에 머물기 어려워하는 우리로서는 감히 그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기가 막혀 말이 끊긴 자리에서 그저 친구와 더불어 있는 그들의 모습은 가슴 찡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안도현 시인의 <연탄재>라는 시를 잘 아시지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그들은 뜨거운 우정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친구의 아픔 때문에 함께 아파하는 꽤 괜찮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욥이 겪고 있는 불행의 원인에 대해 논하기 시작하면서 그들의 우정에는 금이 갔고, 결국에는 날카롭게 대립하게 됩니다. 그들 사이에 연민의 마음이 있을 때 그들은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종교와 신념과 사상이 끼어들자 그들의 관계는 파괴되었습니다. 벗이 겪는 고통의 가장자리에 가만히 있어줄 때 그들은 우정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해석의 욕망이 작동하는 순간 그들은 판관이 되었습니다. 판관이 있는 곳에서 우정은 망가지게 마련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우리가 늘 명심해야 할 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고전8:1c) 

그들은 인습적인 사고에 젖어 세상을 죄와 벌 혹은 원인과 결과의 도식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도식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습니다. 삶은 모호합니다. 선과 악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선한 사람에게도 불행은 다가오고, 악인에게도 행운은 따릅니다. 경건하다고 다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불신자라 하여 가난한 것도 아닙니다. 성숙한 믿음이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잉여를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닐까요? 욥의 세 친구는 악인도 아니고 위선자도 아닙니다. 

다만 무지한 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어둠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불행에 빠진 욥을 찾아오기 전까지는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을 접할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고통을 겪어본 사람은 남의 고통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법입니다.

• 티쿤 올람

엘리바스, 빌닷, 소발. 그들을 제가 함부로 비난할 수 없는 까닭은 나 자신이 이런 정성으로 우정을 가꾸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벗 友’자는 오른손 두 개가 겹친 모양을 그린 것입니다. 우정은 손을 잡아주는 것입니다. 힘을 보태주는 것입니다. <<설문해자>>는 ‘뜻을 함께 하는 사람이 벗’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똑같이 벗을 뜻하는 ‘朋(벗 붕)’ 자는 고문에서 ‘사사로이 편을 가르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붕당정치라는 단어 속에 그런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벗은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입니다.

두려워 떨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와 말없이 손을 잡아주면 우리 속에는 새로운 힘이 차오릅니다. 누군가 곁에 있어준다는 것처럼 든든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미국의 교육학자이며 영성 지도자인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한때 우울증에 시달렸던 때가 있었습니다. 우울증을 서양 사람들은 ‘푸른 악마’(blue devil)라고도 부릅니다. 사람에게서 온기와 화색을 빼앗아가기 때문일까요? 파머는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만남을 거절하자 더욱 큰 단절감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친구 빌은 매일 오후 파머의 집에 들러 그를 의자에 앉히고는 자신은 무릎을 꿇고 앉아 파머의 신발과 양말을 벗긴 다음 30분 동안 발을 마사지해 주었습니다. 아직 감각이 살아 있는 그의 신체 중 한 부분을 어루만져줌을 통해 빌은 파머가 세상과 다시 소통할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때의 경험을 파머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 나를 지켜봐 주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그것은 자신이 소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을 경험하는 이에게는 생명을 주는 일이다.”(파커 파머, <<삶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 116-7)

저는 파머의 글을 읽으면서 조병무 장로님을 떠올렸습니다. 박정오 목사님의 굳어진 몸을 풀어드리기 위해 그렇게도 애쓰시더니, 지금은 투병 중인 누님의 몸을 풀어드리기 위해 매일 분당까지의 먼 길을 오가고 있습니다. 그런 어루만짐을 통해 사랑과 정성과 생명이 전달되고 있음을 저는 의심치 않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엄숙한 시간>에 나오는 한 대목을 들어보십시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까닭없이 이 세상에서 울고 있는 사람은,
나 때문에 우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닙니다.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 거대한 분리 장벽에 갇혀 지내는 팔레스타인 사람들, 가부장적인 관습에 갇혀 인권을 유린당하는 여성들, 성적 소수자들, 북한 동포들…그들은 모두 이웃이 되어줄 이들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티쿤 올람 tikkun olam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 품부된 사회적 책임을 일컫기 위해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세상을 고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우리가 각자의 달란트와 능력을 가지고, 세상에 긍정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킬 기회를 가지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삶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해석하는 전문가들은 아주 많습니다. 하지만 말없이 고통 받는 이 곁에 머물러주는 연민의 사람이야말로 세상을 고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삶을 선택하십시오. 이 가슴 벅찬 소명에 ‘아멘’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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