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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세상의 빛 (마 5: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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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빛 (마 5:14-16)


본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을 가리켜“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세상의 책임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빛에는 몇 가지의 빛으로 구분 지을 수 있습니다. 햇빛, 달빛, 별빛 등 본래 주어진 자연적인 빛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 빛을 눈으로 보며, 그 빛 안에서 생명을 유지하며 살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인공적인 빛이 있습니다. 그것은 본문에 말씀하고 있는 등잔 즉 촛불이나 오늘날 전기불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공적인 빛으로 밤을 밝히며 불편 없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빛은 영적인 빛입니다. 

눈에 보이는 빛만이 빛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한 빛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신 눈에 보이는 빛은 보이지 않는 빛에 대한 비유요 상징입니다. 영적인 빛이란, 양심의 빛이요, 진리의 빛이며, 선행의 빛, 혹은 하나님의 말씀의 빛입니다. 시편 119편 105절에“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빛의 반대는 어두움인데, 이 어두움은 무지와 혼돈과 무질서를 말합니다. 이러한 시대를 가리켜 암흑기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암흑은 우상과 미신입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에 빛이 없고 어둡기 때문입니다. 정초 때 보는 토정비결, 사주팔자, 궁합, 신수 등 참으로 한심하고 어리석은 일들을 지금도 행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등록된 무당과 점쟁이가 30만 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미등록된 무당과 점쟁이를 다 합하면 80만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이처럼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입니다. 아직 우리사회가 이만큼 어둡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무지한 사람들만 무당과 점쟁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지성인들이 이곳을 많이 찾는다고 합니다. 대학입학을 앞둔 사람들, 졸업 후 취직을 앞둔 사람들, 심지어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지도층까지 점쟁이에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어느 조사에는 초등학교 1학년 학생 중 40%가량이 부적을 지니고 다니며, 운전기사 중 80%정도는 부적을 지니고 다닌다고 합니다. 미신과 우상 앞에는 대학도 박사도 소용이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놀라운 것은 우리나라에 점쟁이가 제일 많이 있는 곳은 명문대인 이화여대 앞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이념으로 세워진 이화여대 앞에 점쟁이가 제일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사회는 문명이 발전하여 밤을 낮처럼 밝히며 살고 있지만 영적으로는 아직도 흑암이 짙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래서 옛날 헬라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세상이 너무 어둡다며 대낮에도 등불을 켜고 아테네 시내를 다녔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말씀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一. 빛이 존재하는 목적

본문에“너희는 빛이라.”하신 것은 참 빛인 빛의 근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빛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일서 1장 5절에“하나님은 빛이시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빛의 근원이십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나는 세상의 빛이니.”하셨으며, 요한복음 9장 5절에는 예수님께서“내가 세상의 빛이로라.”하셨습니다. 영어성경에서 빛이라는 말 앞에는 "I am the light" 이라고 했습니다. 빛이라는 단어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내가 그 빛, 곧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빛”이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외에는 그 어디에도 참 빛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참 빛을 받아 생명을 얻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또한 우리들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빛 등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모든 빛은 빛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등불은 어두움을 밝히기 위한 수단입니다. 이 성전 천정에는 수많은 등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전등들을 전등 자체를 위해 설치하진 않았습니다. 등으로 빛을 밝혀 어두운 실내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신 말씀도 같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삶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자신의 존재 목적을 달리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나님은 인간 존재의 목적과 삶의 방법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37~40)

강령이란, 그 일의 으뜸이 되는 내용과 존재의 목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내 자신을 위해 살며, 나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신 까닭은“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기”위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신구약 성경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가장 간절히 바라시는 소망입니다. 이것이 곧 빛이 존재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얼른 생각기에는“예수 믿으면 나를 위한 삶은 없고 도대체 그러면 나는 뭐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이것이 나를 위하고, 나를 복되게 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시편 34편 7절~10절 말씀에“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사랑하셔서 천사가 둘러 진을 쳐서 보호하시며,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도록 채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이웃을 위해 사랑을 베풀며 살아가는 사람에 대하여 축복을 약속하시기를“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누가복음 6:38)고 하셨습니다. 잠언 28장 27절에는“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자는 궁핍하지 아니 하려니와 못본체 하는 자에게는 저주가 많으리라.”하셨습니다. 

일본의 여류작가 미후라 아야꼬는 작가가 되기 전에 구멍가게를 했는데, 장사가 너무 잘돼서 나중에는 트럭으로 물건을 공급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어느 날 퇴근한 남편이 “여보, 우리 가게 장사가 너무 잘돼서 이웃 가게들이 문을 닫을 지경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깝소. 이것은 하나님 뜻에 어긋나는 게 아니겠소?”하고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에 자극을 받은 미후라 아야꼬는 상품을 다 갖추지 않고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주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나자 소설을 써서 응모하여 당선이 됐습니다. 그 당선작이 유명한‘빙점’이라고 합니다. 이로 인해 가게에서 번 돈보다 몇 백 배의 더 많은 돈을 벌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실한 실현입니다. 
세상의 빛으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위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二. 빛의 역할

1. 빛은 생명을 삯 틔웁니다.

생명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습니다. 빛이 없는 곳에는 있던 생명도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을 가리켜“세상의 빛이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면 우리들이 머무는 곳에는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가고 생명이 살아나듯, 하나님의 자녀인 내가 머무는 곳에는 죽어가는 불신영혼이 살아나야 합니다. 불신가정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게 되면 그 가정은 복음화가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사도행전 16:31) 하셨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두움이 물러가듯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2. 빛은 아름다움을 나타냅니다. 

이 실내에는 아름다운 꽃과 화초가 있습니다. 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빛없는 캄캄한 흑암 속에 아름다움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빛이 있어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정 빛의 자녀로서 이 세상의 빛이라면 나로 인해 주위를 밝게 해야 하겠습니다. 흑암에 처해있던 이 나라가 이토록 밝고 아름답게 세계 속에 우뚝 서게 된 계기가 언제부터입니까? 대동강에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를 비롯한 언더우드, 아펜젤러 등 수많은 선교사들이 이 땅에 와서 희생의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린 때입니다. 그들이 희생과 사랑의 삶으로 비춘 그리스도의 빛이 지금 세계 속에 빛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그 빛을 받았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머무는 곳곳에서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빛이란 특별한 사람만이 특별하게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속에서 나타내는 작은 친절과 배려가 빛이 되는 것입니다. 

사업에 실패하고 몇 년 전부터 택시 운전을 하고 있는 이장현 씨(51세)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한 가지 경험한 것을 말했습니다. 어느 날 서대문에서 손을 흔드는 여대생과 할머니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여대생은“할머니를 동대문 이대부속병원까지 모셔다 드리세요.”하면서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었습니다. 택시기사는 할머니에게“참 예쁜 손녀를 두셨네요. 참 좋으시겠어요.”라며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손녀가 아니야. 지하철역 앞에서 처음 만났어. 길을 잃었다고 하니까 내 손을 잡고 택시를 잡아 주더라고. 그러면서 할머니, 예수 믿고 오래오래 사세요. 하면서 조심해 가시라고 하지 뭐유.”할머니는 그날 아침 침을 맞으러 집을 나섰다가 길을 잃고 오전 내내 시내를 헤매다가 그 학생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할머니가 내릴 때 택시기사는 그 만원을 할머니의 손에 쥐어 드렸습니다. 그러고 나니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고 뿌듯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곧 마태복음 5장 16절에는“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신 말씀의 실현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타산적이거나, 너무 지나치게 원칙적이면 그것이 사랑을 잠식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들과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정해 놓은 삶의 원칙주의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사랑의 법은 타산너머의 것이며, 원칙너머의 것입니다. 지나치게 원칙을 내세우는 원칙주의자의 경우, 그 말과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법에는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원칙 즉 성경의 원칙은 죄를 지은 사람은 모두 지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이시므로 구원하는 것입니다.“너희는 세상에서의 빛이라”고 하신 것은 사랑의 법에 의해서만 발산될 수 있는 빛입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2절에“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모두 타산이나 원칙을 뛰어 넘은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의 법이 있는 곳에 빛이 있습니다. 우리교회에서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행하는 토스트전도도 타산과는 거리가 멉니다. 

원칙적으로 본다면 낯선 사람들에게 우리가 왜 많은 돈을 들여가면서 토스트와 커피를 나눠줘야 합니까? 하등에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님의 작은 사랑을 실천하려는 사랑의 법입니다. 타산이나 원칙을 뛰어 넘은 사랑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행하는 사랑이 있는 곳에 빛이 있습니다. 

3. 빛은 길을 안내 합니다. 

빛의 역할 중 또 하나는 길을 밝혀 주는 것입니다. 자동차가 캄캄한 밤길을 100km 이상 고속으로 달릴 수 있는 것은 길을 밝히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오후 늦게 산에 갔다가 날이 저물어 조심조심 내려오는데, 어떤 분이 머리에 라이트를 달고 산에 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캄캄한 산길을 오를 수 있는 것은 빛이 있어서 가능합니다. 항해하는 선박들이 안전하게 항구에 정박할 수 있는 것은 등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빛은 길을 안내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캄캄한 죄악의 바다를 표류하는 불신영혼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들을 하나님의 구원의 항구로 안내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은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디모데후서 4장 1절~2절 말씀에“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하셨습니다. 

기독교 초기에 전해지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의 사명을 다하시고 하나님 앞으로 가셨습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흥미 있게 들은 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통탄했습니다. 천사 중 하나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담당하시던 사명은 이제 누가 감당하며 계속합니까?” 
“요한, 베드로, 야곱이 할 것이다.” 
“그들이 실패하면 누가 합니까?”
“바울, 바나바, 마태가 할 것이다.” 
“그 사도라는 사람들이 불충실하면 어찌합니까?”
이 같은 질문을 받으신 예수님은 천사의 얼굴을 주시하면서 “다른 방법은 없어. 사도들이 불충실하면 다른 길은 없어”라고 말씀하시면서 머리를 흔드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이어 사도들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췄습니다. 사도들의 뒤를 이어 속사도들이 이 세상에 복음의 빛을 비췄습니다. 속사도들의 뒤를 이어 교부들이 이 빛의 사명을 감당하가 그만 복음을 변질시키고 말았습니다. 변질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복음을 바로 세운 것이 마틴 루터와 존 칼빈 같은 종교 개혁자들입니다. 이렇게 전해진 복음이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이 생명의 복음을 또 다른 이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대안입니다. 하나님의 다른 대안은 없습니다. 내가 머무는 그곳에서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므로 나를 지켜보는 사람들에 그리스도인다운 빛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향해“너희는 세상의 빛이라”하셨습니다. 
빛은 빛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빛의 사명 받은 우리는 나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위로 온 정성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들에게 선한 삶으로 본을 보이는 것입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생명이 있듯, 나로 인해 어두움에 처한 불신영혼들이 살아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아름다움 것이 드러나듯, 나로 인해 그리스도로 인한 삶의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내어야 하겠습니다. 

빛인 등대가 항해하는 배들을 항구로 인도 하듯, 고해와 같은 세상을 힘겹게 살아가는 영혼들을 안식의 항구인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을 항상 되새기며 이 어두운 세대의 빛으로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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