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마 21:28-32)

  • 잡초 잡초
  • 528
  • 0

첨부 1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마 21:28-32)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8)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9)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0)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31)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그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녀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끝내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32)
<마태복음 21장 28~32절>


할렐루야!
건강한 모습으로 교회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요, 복 받은 일입니다. 
어제도 우리교회 두 가정이 슬픔을 당했습니다.
여러분 건강할 때 하나님 마음에 들게 살고,
평안할 때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옆의 분과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인사합니다.

1970년대 후반, 어느 회사의 연구원으로 일하던
스펜서 실버(Spencer Silver)라는 사람이
강력한 접착제를 만들기 위해 연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접착제의 성능을 높이기 위해 특별한 물질을 첨가했는데
그 물질이 오히려 접착제가 쉽게 떨어지게 만드는 역효과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실버 씨는 아무 쓸모없는 접착제로 보이는,
붙기는 붙는데 쉽게 떨어지는 그것을 
다른 용도로 사용할 방법을 계속 연구했습니다.

같은 회사에 아트 플라이(Art Fly)라는 연구원도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찬양대원으로 봉사했는데
악보 책에 다음 주 부를 찬양을 표시하려고 종이를 끼워 두면
번번이 그 종이가 없어져 불편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임시로 페이지를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그 두 사람이 회사에서 한 팀이 되었고
그들에 의해 새로운 제품이 개발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4대 사무용품 중 하나이고,
경제 잡지 ‘포춘(Fortune)’지가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 중 하나로 선정한
‘포스트 잇(post-it)’,‘붙였다 쉽게 떨어지는’메모지입니다.

찬양대에서 봉사를 해도 아트 플라이(Art Fly)씨처럼
‘뭔가 개선할 점은 없을까’,‘나아져야 할 것은 없을까’하며
애정을 가지고/관심을 가지고 섬기시기 바랍니다.
교사로 섬기어도, 새 신자를 영접해도, 주차 안내를 해도 … 
맡은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열정으로 일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다가 실패했더라도 … 
노력하던 일의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 
그것을 통해 더 좋은 길이 있게 될 것을 믿고 낙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포스트잇을 사용할 때마다 
실패한 강력접착제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실패는 더 나은 것을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오늘도 평안한 마음으로, 하나님 마음에 들기 위하여 
열정을 가지고 예배에 최선을 다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인과 종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각자의 신앙 경험과 고백하는 방법에 따라 예수님을 다양하게 부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선생님’(마 8:19, 요 3:2), ‘구주’(요 4:42),
‘유대인의 왕’(막 15:26) … 이라 하고
어떨 때는‘목수’(막 6:3)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로 올라가신 후에
제자들과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재판장’(행 10:42), ‘교회의 머리’(엡 5:23),
‘신령한 반석’(고전 10:4) …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그 중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것은
‘주님(κύ ριος - Lord)’이라는 고백입니다.

‘주(主)’또는‘주님’이라는 호칭은
구약 시대에는 단어의 본래 뜻대로
권력을 가진 주인이나 왕 또는 가정에서 남편을 부를 때에도 쓰였고,
하나님을 부를 때에도 사용되었습니다. (창 4:14, 15:2~3)
그러다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후에는
‘통치하시는 예수님’,
‘삶의 주관자이신 예수님’을 고백하는 호칭으로서(롬 14:9)
바울과 여러 사도들이 사용했던 중요한 표현이었습니다.
<『비전 성경 사전』(서울; 두란노, 2006), p.1154. 참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긴다’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는 예수님의 종이 되어 예수님께 순종하겠다’는 표현입니다.

오늘 우리는 내가 나의 주인인 양 내 멋대로 살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유대 지도자들과 두 아들 비유

오늘 본문 말씀은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실 때
대 제사장들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에는‘서기관들’도 등장한다>
그 질문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하는 것이었습니다.

대 제사장과 장로들이 예수님께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이런 일’은
- 넓게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모든 활동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 직접적으로는, 무슨 권위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었던 것인지 묻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로부터‘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는 환영을 받으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먼저 성전에 찾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마21:12~17)
예수님은 그들을 성전에서 쫓아내시며
장사하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기도 하셨습니다.

당시 성전을 주인으로 생각했던 제사장들은 
성전 뜰을 분할하여 장사하는 사람들,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자리를 주고
그들이 번 것으로 자신들이 이익을 챙겼습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바자회 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바자회는 싼 가격으로 물건을 팔아 이익을 남겨
주로 불쌍한 이웃을 돕거나 선교 헌금을 모으기 위해 벌이는 시장입니다.
개인적으로 이익을 취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은 
대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마 21:15)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을 만난 것은 
바로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에게 성전 사용에 대한 권한이 있었고
그 권한으로 상인들이 성전을 이용하게 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아무런 권한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도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았으니
이런 일을 행하는 권위를 도대체 ‘어디서’받았느냐고
‘누구한테서’받았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대 제사장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활동을 제재하고 
자신들의 권위를 회복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마태복음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서울; 두란노 아카데미, 2009), p.344. 참조.>

그런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다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준 것이 하나님께서 시키신 것인지
아니면 세례요한 혼자 그렇게 한 것인지 …
그러자 유대 지도자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 지 망설였습니다.
그들이 세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예수님 또한 하나님께 권위를 받은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25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보내신 세례 요한을 믿지 않았던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하는 꼴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요한이 하나님과는 상관없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항의하고 비판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 “We don't know.”- NIV)

예수님은 그들에게 비유 하나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지만
가겠다고‘예’라고 대답만 하고 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도 똑같이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둘째는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난 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고 포도원에 일하러 갔습니다.

누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아들이겠습니까?
답은 명백합니다. 
예수님과 논쟁하러 왔던 유대 지도자들도 당연하다는 듯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고 대답했습니다. (마 21:31)

대제사장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와 관련된 제반 사항을 지휘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위층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들”이라고 여럿을 가리킬 때는(마21:23)
대제사장 가문의 유력 인사들과 전직 대제사장들,
성전 관리 책임자들과 경비 대장들까지 포함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은 모두 하나님과 가까운 위치에서(?) 
거룩한 임무를 맡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전 성경 사전』(서울; 두란노, 2006), pp.221~224. 참조.>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습니다. 
따르지 않았습니다. (마 21:32)
예수님의 메시지에도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배척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유대 지도자들을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3) 

그들은 말만 하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경건하여 하나님의 뜻에 잘 순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행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포도원에 가겠다고 대답만 하고 가지 않았던 
맏아들의 모습이 그들 속에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경 말씀을 읽고, 설교 말씀을 듣습니다.
“아멘”하며 결단하지만 … 결심한 대로 살고 계십니까? 

어떤 분이 말하기를 
“한국 교회의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아멘’한 대로만 살면
한국은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아멘’하고는 교회 문밖에 나가기 전에 다 잊어버린다고 합니다.
‘아멘’은‘그렇습니다. 그렇게 믿어집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동의의 말입니다.

행동으로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예수 믿어 구원 받아 하나님을 나의 주인이라고 고백하지만 …
말씀에 ‘아멘’하며 동의하지만 …
행동으로 주인이신 하나님께 정말 순종합니까?
쉽게 말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마 `12:50) 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인지요?
아멘 한 대로 살고 계시는지요? 
세상에 빛 되고 소금되게 살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평상시에는 그렇지 않은데 운전대만 잡으면 험해지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교회 지하 주차장은 
조용히 낮은 속도로 차를 몰고 들어오면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속도를 내어 핸들을 꺾어 들어오면 요란하게 <끽~~> 소리가 납니다. 
언젠가 제 사무실에 앉아 있는데 
주차장에서 소리가 들리기에 누가 운전하는가 봤더니 
너무 너무 얌전한 여자 집사님이셨습니다.
이렇게 핸들만 잡으면 난폭해지는 분들 많습니다.

습관적으로 운전을 험하게 하는 어떤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성경 공부하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그 분이 요한일서 2장 6절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쉬운성경>으로 보면 이런 말씀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만 합니다”(요일 2:6)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난 그 분이 성경 말씀을 이렇게 바꾸었습니다.

<누구든지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계신다고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사신 것처럼 운전해야만 합니다.>
그 분은 이 말씀을 카드에 써서 자동차 계기판에 붙여 놓았고
운전할 때마다 그대로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쌓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공부하고 
단순히 동의하는 것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머리에 성경 지식을 많이 집어넣는다고 해서
성경에 기초한 확신과 믿음이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자라기 시작하는 순간은
말씀 속의 가르침을 실제 삶에 적용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책임을 묻고 정죄하려 했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율법을 지키며 하나님께 순종하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들의 위선과 사랑 없음을 비판하셨습니다.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뉘우친 사람들은
멸시받고 손가락질 당했던 세리와 당시에 타락했던 여인, 창녀들이었습니다.

비유 속에서 아버지께 순종했던 사람은
비록 처음에는 아버지의 뜻을 거절했지만
즉시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대로 행했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겠다고 말했거나 외면했다면 
즉시 뉘우치고 돌아서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역사가 일어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겨울이 되면 최고 재미있는 스포츠가 ‘스키’입니다.
저는 미국에 살면서 스키를 타기 시작했고 좋아합니다.
처가가 살던 콜로라도 주에는 유명스키장이 많습니다.
온천과 함께 있는 스키장도 있고 그 멋진 곳에서 스키를 타던 때가 그립습니다.
목 수술 후에 스키‘금지령’이 내려져서 
겨울만 되면 먼 산만 바라보는데 참으로 아쉽습니다.

어떤 분이 그 멋진 콜로라도에서 스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슬로프에는
빨간 조끼를 입고 스키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빨간 조끼에는 ‘시각 장애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스키는 위험한 스포츠이기도 합니다. 
잘못하여 사고가 나면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각 장애인이 어떻게 스키를 탈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시각 장애인들이 스키 타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장애인들 각각에게는 안내자가 한 사람씩 붙어서 안내하고 있었습니다.
시각 장애인들은 안내자가‘왼쪽으로’하면 왼쪽으로 틀고
‘천천히’라고 하면 속도를 늦추었습니다.
시각 장애인은 안내자의 지시에 즉시 순종했습니다.
안내자를 믿고/따르니까 
스키를 타면서 안전하게 슬로프를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시각장애인은 한 치 앞을 볼 수가 없습니다.
옆에서 말해주는 대로 스키를 탈 때 안전하게 내려갔던 것처럼
우리도 한 치 앞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도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내일 일도, 내년 일도 모릅니다.
큰소리 빵빵치지만 알 수 없습니다.
일기예보 틀린다고 뭐라 하지만 틀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일기예보는 날씨를 예상하는 것일 뿐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각 장애인 스키어들처럼
주인 되시는 하나님 말씀에 즉시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면
안전한 삶을 살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홍영기 『4차원의 리더십』(서울; 교회성장연구소, 2007), p. 173. 참조.>

문제는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쓰기만 하고, 타이핑만 하고 … 
순종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100% 순종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을 주인으로 인정하는 삶,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삶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동하며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 순종은 온전하게, 100% 순종해야 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를 보세요.
그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살인을 했나요? 강도짓을 했나요? 
그들이 잘못한 것은 불순종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그 하나만으로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전쟁을 벌일 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을 통해 사울 왕에게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아말렉의 모든 사람과 모든 소유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멸은 모조리 없애버린다는 뜻입니다)

전쟁이 나자 사울은 모든 것을 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름지고 잘 자란 양과 소 … 등 
좋은 것, 깨끗한 것은 남겨두었습니다. (삼상 15:1~9)

어찌 보면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99.999%를 이행하고
0.0001% 정도 불순종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죽이라는 사람은 모두 죽였고
가축과 소유도 아말렉의‘거의 모두’ 없애버렸습니다.
단 좋은 것 조금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의 그 작은 불순종으로 인해
그를 왕으로 세웠음을 후회하셨습니다. (삼상 15:11)
99% 순종하였지만 1% 하나님 뜻을 따르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불순종이라고 하십니다.
부분적으로 순종하는 것, 
100%에서 1%가 모자란 99%의 순종도 불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뜻에 100%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는
칭찬받는 종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13세기 영국의 법학자인 헨리 브락턴(Henry Bracton, 1210~1268)은

“종은 내일 해야 할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 헨리 브락턴 -
라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내일은 주인집에 어떤 음식을 더 준비해야 할지, 
어디를 청소해야 하고, 집에 손 봐야 할 곳은 어디인지 … 
종이 이런 것을 모르겠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세세한 일들은 주인보다 종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이 가진 내일의 계획이 있다고 해도
주인이 그것 하지 말라고 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계획입니다.
종이 아무리 내일 할 일을 계획을 세워서 철저히 준비하더라도
주인이 먼 곳에 심부름을 보내면 종의 계획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주인으로 믿고 살아가는 우리들도
내일 일을 알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누구를 만나야 하고, 어디에 출장을 가야 하는지 …
스케줄이 빡빡한 분들이 많습니다.
대학생/청년들은 지금이 중간고사 기간일 텐데
내일은 무엇을 공부해야 하고, 어디서 공부를 할지 … 
계획을 세워서 준비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가 막힌 계획을 세워보았자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를 부르신다면 그 계획들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계획은, 우리의 행동은 … 
내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부분까지도 하나님 마음에 들게 살아야 합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삶은 버릴 수 없는 기억이지만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포도원에 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에 버릇없다 여겨질 만큼 
단호하게‘싫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즉시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향한 둘째 아들처럼
즉시 니우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오늘부터, 지금부터 … 순종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지난 일이 있다면
주인이신 하나님께 고백함으로 용서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1%라도 하나님의 계획에 벗어나는 일이 없게 사는
용기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100% 순종하려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사1:19~20)
순종한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을 다 접어두고
성경말씀대로 살기위해 생활 전체를 뒤바꾸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11세기 독일에 살았던 왕 하인리히 3세는 
어느 날 왕궁 생활에 대한 깊은 회의와 허무를 느껴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을 찾아가 수도원장에게 
수도사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수도원장은 왕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폐하, 수도사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켜야할 규율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수도사가 되려면 폐하도 이 규율을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어떠한 명령에도 절대적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그렇소!"
"우리 수도원에서 말하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 수도원 원장인 저와 
이 수도원에서 지도하는 모든 스승들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합니다. 거기에도 순종할 수 있습니까?"
"알겠소. 그렇게 하겠소."
"그러면 이제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폐하는 다시 왕궁으로 돌아가셔서 백성 다스리는 일을 잘 하시기 바랍니다.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을 위한 수도사가 될 수 없습니다."하며 
왕을 수도원에서 쫓아냈습니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남편이면 남편, 아내면 아내, 
직장생활 하는 사람으로,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자기의 삶의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부끄러움 없이 살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고 하면서 남편에게 소홀하고,
아내에게 함부로 하고,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고,
직장에서 미운털 박힌 사람이 된다면 그것은 잘못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종은 내일 일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종이 고민해야 할 것은 한 가지입니다.
<어떻게 하면 주인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드는 크리스챤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마음에 드는 백성일까?>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믿고 맡기면 주인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오늘부터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히 여기시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삶의 현장에 있는지 여러분 스스로는 다 아실 것입니다.
각기 다르게 태어났고, 자랐고, 다르게 살고 있습니다.
그 삶의 현장에서 빛 되고 소금되어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하늘 백성으로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하나님!
이 거룩한 주일에 말씀을 듣는 자리에, 찬양하는 자리에
기도하는 자리에, 예물 드리는 자리에 있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삶, 하나님 마음에 합한 교회
하나님 마음에 합한 가정, 신앙인으로 살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우리의 마음을, 가정을, 일터를, 삶을 주장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