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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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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 2:12-18)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구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에게 매우 고마운 사람들입니다. 

게다가 이스라엘 사람들, 유태인들은 성공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디서나 사업에 성공하여 경제를 움켜쥐었습니다. 우리나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을 무렵에 대한민국에 구제 금융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5인 위원회가 모였는데, 그 중 네 사람이 유태인이었다고 합니다. 노벨상 수상자의 1/3, 하버드 대학 교수의 1/3은 은 유태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 중에는 유명한 예술가, 학자들이 즐비합니다. 그래서 우리도 유태인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 오셨고, 그처럼 뛰어난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좋은 인상은커녕 때로는 증오의 대상이 될 때도 많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유태인들은 역사 속에서 숱한 고난을 받았습니다. 중세 당시 유럽에서도 엄청난 유태인이 죽었고, 20세기에 와서는 독일의 히틀러에 의해 6백만 명이 학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저 역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 존경할만한 개인은 참 많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니엘을 비롯해 바울 사도 등 정말 뛰어난 믿음의 선배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인상은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제 마음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상은 뻣뻣하고, 불순종하고, 억세고, 원망과 불평이 많은 백성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망해버린 백성입니다. 제 마음에 이런 인상이 남게 된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모습이 그와 같기 때문입니다. 

특히 애굽에서 구원받은 후의 모습은 더욱 좋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오랫동안 노예로 살던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이후 그들은 광야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숱하게 원망했고, 모세와 아론에게 대들며 시비했습니다. 때로는 물이 부족하다고, 때로는 다양한 먹거리를 달라고, 때로는 돌아가는 길이 싫다고, 때로는 적들과 맞서기 싫다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조용히 순종하며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들을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책망하곤 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인상 나쁜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우리도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하셨다면,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죄악의 노예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믿음을 통해 죄 씻음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는 사망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더 이상 사망이 우리를 영원히 지배할 수 없습니다. 장차 이 땅의 삶이 끝나고 나면 영원한 생명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또 우리는 사단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부단히 공격하지만,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사단을 이깁니다. 

게다가 지금 우리는 거룩한 칭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복음의 일군, 그리고 목사, 장로, 권사, 집사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은혜를 받은 우리는 지금 어떤 인상을 남기고 있습니까?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우리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하여 우리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립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존경받지 못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의 신용도는 바닥입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 존경하고 신뢰하기보다는 불신하고 비난합니다. 시끄럽게 떠들어대지만 실속은 없는 사람들, 직장에서도 교회 일만 하는 이기적인 얌체라고 비난합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우리가 세상에 남기고 있는 인상은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는 인상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우리는 낙제 점수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문제가 생겼을까요?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을 때, 그들은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으로 구원이 완성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아직 그들은 진정한 구원을 얻은 게 아니었습니다. 참 구원은 가나안에 들어갈 때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성숙할 때 비로소 참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들은 부끄럽지 않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되고 성숙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과거에 부끄러운 노예였습니다. 그 때는 모든 것을 주체적으로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따르는 노예 근성이 깊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채찍과 당근에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먹을 것만 주면 마치 가축처럼 굴복했습니다. 그들 중 누구도 백성을 격려하여 바로 왕에 맞서지 못했습니다. 애굽 사람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렇게 수백 년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보내 그들을 깨우시기까지 그들은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을 통해 애굽에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는 달라져야 했습니다. 여전히 노예처럼 살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대한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명예롭게 살아야 했습니다. 과거에는 애굽 사람이 두려워 억지로 굴종했다면, 이제는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절제심과 통제력을 가져야 했습니다. 과거에는 채찍이 두려워 순종했다면,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이제는 끌려 다니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미래를 열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멋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위해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훈련소로 사용하셨습니다. 거기서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목마름도 견디게 하셨습니다. 또 율법을 주셔서 훈련 교과서로 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변 열강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멋진 하나님의 백성이 되길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은 마치 훈련소의 장병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듯 필요한 것은 이스라엘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앞에서도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적했습니다. 원망하고 시비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그들은 애굽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는 두 번째 구원은 얻지 못했습니다. 이게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사정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들의 사상과 행동이, 그들의 인간관계가 아직 여러 모로 어리고 미숙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죄와 사망과 사단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겸손하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에 생각한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한 것입니다. 때로는 다투기도 했습니다. 남을 무시하기도 했습니다. 구원을 받기는 했지만, 아직 미숙아와 같았습니다. 
그들에게도 두 번째 구원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12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아멘.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구원이란 우리가 앞에서 생각한 구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부끄럽지 않은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과 사단에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머물지 말고, 더 성숙하여 변화된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밥 버포드>가 쓴 <하프타임의 고수들>이란 책이 있습니다. 하프타임이 무엇입니까? 축구로 말하면 전반적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짧은 시간을 말합니다. 코치와 선수는 하프 타임을 잘 활용해서 후반전에 대비해야 합니다. 저자는 인생에도 하프타임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저자는 그 책에서 대략 45세 정도가 인생의 하프 타임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람이 45세 정도에 도달하면 인생 후반부를 위한 작전을 다시 짜야 한다고 말합니다. 

나이가 어린 인생의 전반전에는 주어진 공식과도 같은 길을 걸어갑니다. 그 나이에는 누구나 학교에 갑니다. 누구나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집을 장만하는 등, 거의 인생의 공식을 따라 삽니다. 물론 가는 학교가 다르고, 직장이 다르고, 서로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돈을 많이 벌거나 적게 버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45세 정도까지의 인생은 큰 틀이 비슷합니다. 

문제는 그 이후입니다. 이제 늙어간다는 것이 느껴질 때,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생각할 때, 직장에서 퇴진할 때가 서서히 다가올 때, 그 이후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직장에서 은퇴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아무런 공식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집에 가만히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에 묻혀 삽니다. 어떤 사람은 젊어서 번 것을 다 까먹고 길거리에 나 앉게 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젊었을 때보다 더 멋진 인생 후반부를 삽니다. 45세, 50세, 60세 이후의 인생은 사람마다 너무도 다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인생의 하프타임을 맞이하면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변화가 바람직한 것일까요? 저자는 그 변화를 한 마디로 <성공에서 의미로의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전에는 성공을 위해 달려왔습니다. 성공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나면 그 모든 것이 허무하고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게 됩니다.이제는 성공보다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돈을 덜 벌어도, 혹은 있던 돈을 까먹더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합니다. 남을 돕고, 착하게 살고, 변화되길 원합니다. 

이런 변화의 모델은 삭개오입니다. 그 때까지 삭개오는 세리의 권한을 휘둘러서 백성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두어 치부했습니다. 돈을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 날이 바로 삭개오 인생의 하프타임이었습니다. 그 날 그는 돈을 향한 마음을 버렸습니다. 성공을 위한 마음을 포기했습니다. 이젠 의미 있는 인생을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남에게 속여 빼앗은 것은 네 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다고 했습니다. 그는 인생의 하프 타임에 극적인 전환을 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저는 우리에게도 이런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동안은 죄로부터 구원받은 것에 감사했습니다. 죽은 후에 천국에 가는 것에 감사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러면서 예배에 참석하고 헌금을 드리고, 가끔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이 정도면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지>라고 만족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부족함이 너무도 많습니다. 여전히 게으름이 남아 있고, 세상 정욕을 추구하는 마음이 남아 있고, 여전히 경쟁심으로 남을 경계하고 시기하며, 가끔은 성공을 위해 속임수를 쓰면서, 그래도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자부해왔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보다 우리 욕망이 좌절된 것 때문에 울 때가 더 많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탄식이 없었습니다. <나만 그런가, 다 그렇지...>라고 하면서 자위해 왔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왔습니다. 목사도 그런 마음으로 목회하고,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분명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부끄러운 그리스도인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전환해야 합니다. 미성숙에서 성숙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나 중심에서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환해야 합니다. 눈앞만 보는 태도에서 먼 천국을 바라보는 태도로 바뀌어야 합니다.우리의 뜻보다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인격이 변하고, 사상이 변하고, 생활 태도가 변하고, 인생관이 달라져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구원을 이루라고 충고하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라고 말씀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 인생을 앞에 두고 진지함으로 임해야 합니다. 장차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설 것을 생각하면서 진지하게 임해야 합니다. 

이 일은 우리 홀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소원을 가지게 하십니다. <이젠 아버지 뜻에 따라,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아들이 되야지>라는 소원을 가지게 하십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이런 전환의 각오를 주시길 기원합니다. 오늘 이 예배가 우리의 하프타임이 되길 원합니다. <하나님, 저 이제 성공보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거룩한 성도가 되길 원합니다. 사람들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저희는 칭찬을 받길 원합니다. 흠없는 성도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는 간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 거룩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은 열망을 주시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소원은 어떻게 이루게 되는 것일까요? 우선 모든 일에 우선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 합니다. 14절을 보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충고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실패한 것이 바로 이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원망했고, 모세와 아론에게 시비를 걸었습니다. 

우리 이제 원망을 버립시다. 여러분, 하나님과 세상을 원망하지 마십시오. 시비하지 마십시오. 인도하심에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훈련시키시든지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우리 서로 간에도 원망하면 안 됩니다. 쓸데없는 문제로 시비를 하면서 매달려 살지 말아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하나님의 뜻에 기쁨으로 따르시길 기원합니다. 억울한 말을 들어도 <별 것 아닙니다>라고 하면서 웃어넘길 수 있는 관대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오직 예수님을 닮아 가는 일에 마음을 쏟으시기 바랍니다. 평생 그렇게 해 나갈 때 우리는 성숙되어 갈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세상 사람들 앞에 흠 없고 순전하게 드러나 보여야 합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라고 했습니다. 

기업은 제품을 생산할 때 <무결점주의>에 도전합니다. 완벽한 제품을 만들려고 애를 씁니다. 생산라인의 근로자들은 <불량률 제로>에 도전합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이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우뚝 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얘가 내 아이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훌륭합니까?>라고 자랑하실 수 있도록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결점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불량이 없는 그리스도인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날마다 우리 자신을 꾸짖고 날마다 우리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생명의 말씀이 세상에 선포될 수 있습니다. 16절을 보면 <생명의 말씀을 밝혀>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흠 없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나처럼 되십시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욕하고, 나아가 하나님도 비방하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다 성숙한 참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 가길 원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빌립보에 복음을 전한 그의 수고는 결코 헛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설 때 빌립보 교인들은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에게도 기쁨이요, 그렇게 변화된 빌립보 교인들에게도 기쁨이 될 것입니다.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들이 박스에 담겨 출고되듯이, 대한민국의 각 교회로부터 성도들이 세상으로 출품됩니다. 성도 여러분, 성령에 충만하고, 말씀으로 무장하고, 수준 높은 삶으로 채워지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가득한 그리스도인들로 세상에 나가시길 기원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로 인해 지역 길거리가 밝아지고, 새로워지길 원합니다. 교우님들의 멋진 인격과 삶으로 인한 칭찬의 소리가 목사인 제 귀에 들려오길 원합니다. 

어떻게 인생의 후반전, 신앙의 후반전을 살 것인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할 것인가, 이 문제를 붙잡고 기도하면서, 고귀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게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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