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가끔 보기 싫은 사람들 (빌 1:12-21)

  • 잡초 잡초
  • 258
  • 0

첨부 1


가끔 보기 싫은 사람들 (빌 1:12-21)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아직도 생일을 축하하는 것이 법으로 금지돼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해피 버스데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인 이유 외에 다른 이유의 휴일을 갖는 것이 이슬람법으로 금지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일뿐만이 아니고 우리식의 개천절이나 삼일절 한글날 발렌타인 데이라는 것이 법으로 금재 돼 있는 것입니다. 하긴 우리가 성경을 읽어봐도 생일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그것이 전혀 일리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오늘날 문명사회에 보편적인 가치와는 많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수년전 국내 TV에 보도가 되면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켰던 사건이 있습니다. 초등학생 딸을 둔 부모가 있었는데 딸의 배에 종양이 생겨서 배가 남산처럼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가 그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가서 치료받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인즉 하나님이 고쳐주시겠다는 응답을 받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딸의 배가 남산처럼 부풀어 오르고 통증을 느껴도 병원에 데리고 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결국은 국가가 강권적으로 개입해서 그 딸을 병원에 입원시키고 수술을 해서 그 종양을 제거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부모가 부모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 국가가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제시한 것뿐만이 아니고 올바른 신앙과 광신의 차이점이 무엇이냐, 그 기준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질문을 제기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신앙이 없는 것도 문제이지만 상식을 초월한 잘못된 신앙이 있는 것도 문제에요. 

장애물은 양쪽에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을 신앙으로 이끄는 것도 우리의 과제이지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을 올바른 신앙으로 이끄는 것도 우리의 과제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후자가 더 어려워요. 신앙이 없는 사람은 차라리 무언가를 찾는 마음이 있지만 잘못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자기가 의롭다고 믿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느냐. 

그들은 불신자 ․ 불법자 ․ 불량한 사람들이 아니고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 믿고 그렇게 행한 사람들입니다. 사도바울을 핍박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에요. 사도바울을 핍박한 사람은 불량배 ․ 범죄 집단이 아니고 율법주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가 종교를 핍박한 것이요 그릇된 신앙이 바른 신앙을 핍박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사회가 세속주의가 되면 종교의 비중이 줄어들 줄로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세속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종교의 비중은 큽니다. 그리고 갈등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도킨스라는 사람이 ‘종교는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책을 써내서 세상의 이목을 받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당연히 그의 말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왜 도킨스가 그런 의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가를 이해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방식에 문제가 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는 방식에 문제가 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 중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같이 말하는 사람들을 많이 접해봤습니다.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예수님 못 믿겠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같이 대답했습니다. ‘사람을 보고 믿지 말고 예수님을 보고 믿어라.’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예수 믿는 사람들 때문에 못 믿겠다고 말할 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도인들의 모순 ․ 위선 ․ 도덕적인 문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입으로만 예수님 믿는 사람, 믿는다고 하는데 그것이 삶의 행실로 나타나지 않는 그런 경우를 지적하는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지나쳐서 보편적인 가치 상식에 어긋나는 삶을 살고 그것을 고집하고 자기가 옳다고 믿은 사람들을 보면서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것이면 나는 믿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병든 딸을 병원에 데리고 가기를 거부한 부모와 같은. 어떻게 보면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이 자기 딸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남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결국은 하나님의 뜻을 왜곡한 고집스러운 종교인의 모습을 볼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보기 싫은 사람들이에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나는 믿고 싶지 않다고 말하게 하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저희 교회에 나오지는 않지만 다른 교회에서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분의경험담입니다. 그 교회에 한 집사님이 성경공부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보다도 그 집사님의 영향력이 더 크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공부에 참석하는 성도들이 그냥 평범하게 성경만 공부하면 모르겠는데 신상의 사소한 문제까지도 그 집사님의 지시를 받는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사를 가도 될까요? 저희 아이를 그 학원에 보내도 될까요? 그러면 그 집사님이 된다, 안된다를 지시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권위를 빌미로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뜻이 거기 이사하기 말라고 하신다, 하나님 뜻이 이거 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면 성도들이 부들부들 떨면서 그것을 순종한다고 합니다. 점쟁이가 따로 없지요. 

제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것은 평범하게 예수님 믿는 것은 어디가고 왜 이렇게 유별나게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도대체 우리 민족은 뭐를 하든지 유별나게 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요. 응원을 해도 유별나게 해야 되고 데모를 해도 유별나게 하고 교회생활을 해도 유별나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나의 만족을 위한 것입니까. 본인들은 이게 믿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이건 불신입니다. 

평범한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범한 데에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별나게 더 소리 지르고 더 뜨거워지고 더 흥분해야 거기에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곳에 계시고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지금 잠깐 믿고 그만둘 것이 아니고 평생 예수님 믿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믿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페이스,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건 장거리 경주에요. 장거리 경주를 100미터 달리기처럼 달리다가는 금방 지쳐서 넘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도 오늘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도 은혜 받고 내일도 은혜 받고 내년에도 은혜 받고 늘 줄기차게 신앙생활을 해야 되는 것이지 마치 받을 은혜를 지금 다 받으려는 식으로 이렇게 하는 것은 영적인 탐욕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가 절제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 대해서는 절제할 것을 가르치면서 신앙적인 것에 대해서는 절제의 필요성을 모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집사님, 성경공부에 참석하신다는 집사님의 남편이 그 남편도 따라 오시는데 교회 안에서는 점잖게 침묵하다가 예배가 끝나고 차를 타는 즉시 그 교회에 대해서 말씀을 하기 시작하는데 웃긴다는 말을 합니다. 우습다, 사람들 하는 짓이 웃기다, 어떻게 저런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느냐, 웃겨 죽겠다, ridiculous, hilarious. 거룩한 것에 대하여 사람들이 무관심할 수도 있고 저항할 수도 있지만 만약 이런 것에 대해서 웃기다고 반응을 한다면 그것은 뭔가 전달방식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새신자들이 있는 가운데에서 모두가 방언을 하면 사람들이 이 사람 미쳤다고 말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내게 영적이고 내게 경건한 것이 남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그들은 이것을 비웃습니다. 이것이 의미전달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들이 왜 교회 오기를 싫어할까 궁금하게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이 교회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을까, 왜 남편들이, 왜 자식들이 교회에 따라오려고 하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는데 그 원인을 우리가 제공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교회 생활을 전달하는 방식에 있어서 선한 것을 선한 것으로, 경건한 것을 경건한 것으로, 거룩한 것을 거룩한 것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그것이 와전되고 왜곡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우리도 혼동하고 남들과 혼동하는 그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눈이 높고 또 판단하는 기준이 상당히 높아졌어요. 그래서 웬만한 것을 만만하게 넘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건을 살 때든 집을 사든 자식의 교육문제든 자식을 시집장가 보낼 때에 만만하게 넘어가지 않고 철저하게 따지고 또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습성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관대합니다.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따지려고 하지 않고 대충 넘어가려고 합니다. 의견이 있어도 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넘어가려고 하는 경우가 많아요. 한편으로 보면 순수하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 보면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분별력. 성령의 은사 중의 영분별이라는 은사가 있습니다. 영적인 것도 분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영분별의 은사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우리가 깨닫든 깨닫지 못하든 성령이 우리 안에서 영적인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고 마음이 동하는 것도 있지만 꺼림칙하고 싫고 거부감이 들고 두렵고 그런 것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게 왜 그런지 몰라요. 그게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이미 분별하고 계신 것이라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다른 것, 물건을 사든 집을 사는 것은 손해를 보더라도 이 땅에서 그치지만 영적인 손해는 다음 세상까지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판을 하지는 않더라도 분별을 할 수가 있어야 됩니다. 무엇을 분별하느냐. 이게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악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인간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성령을 말미암은 것이냐, 사람의 생각을 말미암은 것이냐, 선한 동기냐 아니면 거짓된 것이냐, 이걸 분별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점잖게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분별을 합니다. 15절에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들이 다 선한 동기로 하는 게 아니에요. 개중에는 그릇된 동기로 열심을 내든 전도를 하던 목회를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바로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그게 실제로 하나님의 뜻이 아니고 자기의 뜻일 때가 많아요. 자기의 뜻을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해서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그것을 주장하는데 그게 인간의 뜻에 불과하다면 그것처럼 큰 실수가 어디 있습니까. 남의 얘기가 아니고 우리 모두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제가 미국에서 신학교에 다닐 때 한 미국교회에 출석했는데 그 교회에 호산나라든가 이런 곡을 작곡한 찬양인도자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 찬양인도자가 미혼이었을 때 교회 자매 중에 그 찬양인도자가 하나님이 정한 배필이라고 응답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처녀가 세 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청년은 그 세 명이 아닌 다른 여자에게 장가갔어요. 그러면 그 세 명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응답을 받은 것입니까. 실수한 것입니까. 실수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도대체 예수 믿는 사람들도 이런 실수를 합니까. 

얼마든지 가능하지요. 자기가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그걸 하나님의 뜻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자기의 감정과 하나님의 인도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에 대한 기도의 응답은 그런 식의 초자연적인 것보다는 아주 심플한 방법으로 확인하는 것이 정확합니다. 서로 좋아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일단 서로 좋아야 됩니다. 서로 좋아하지 않는데 나만 좋아하면서 저 사람이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고 하면 아주 문제가 곤란해지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기도를 안 해서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 결혼하기 전에도 그렇게 싸우는데 결혼하고 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마음으로 서로 좋아하고 또 가치관이 일치하고 가는 방향이 같고 이런 데에서 이미 하나님의 인도가 있다고 생각해야지 그런 것이 부재한 상황에서 초자연적인 방법을 통해서 응답을 받으려고 하다가는 실수하기가 아주 좋습니다. 

지식이 없는 열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지식이 없는 상황에서 열심이 생기면 더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리고 17절을 보면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다 착한 마음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개중에는 별의 별 욕심 ․ 다툼 ․ 경쟁 ․ 교만 이런 것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그 사실을 모른다면 우리는 미련한 것입니다. 이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이 깨달은 것은 18절에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기에 참된 주의 종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릇된 동기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까지도 하나님은 사용하신다는 사실이에요. 그래서 잘못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하더라도 그래도 그리스도가 전파되기 때문에 나는 기뻐한다, 여기에서 참된 종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비판할 수 있고 잘못된 거 아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경우도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뻐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그런 것을 미워하고 비판하기 시작하면 나도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도 똑같은 다툼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똑같은 다툼과 시기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말이 많지만 심판하실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할렐루야. 왜냐하면 예수님이 주님이시지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에요. 

그래서 그가 말하는 것이 21절에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For me to live is Christ, 내가 사는 게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판단을 그리스도께 맡기는 것입니다. 최종적인 판단은 주님이 하실 것입니다. 그걸 내가 믿고 내가 할 말이 많이 있지만 오늘 침묵하고 잠잠하고 나의 일에 충실할 수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