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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제사장의 기도 (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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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제사장의 기도 (히 5:7)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I. 본문해설 

히브리서는 신약의 레위기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제사에 대한 기록들이 많고, 그것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서신서가 박해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쓰였다는 사실 또한 우리에게 흥미롭습니다. 결국 박해받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영원한 구속사건을 설명해 주는 것은 핍박 가운데 커다란 위로였던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한 단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곧 그가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신 것입니다. 


II.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이신 그분이 구차하게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낮고 천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늘에서 천군과 천사들의 경배를 한 몸에 받으시고, 성도들로부터 영광을 받으셔야할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이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에게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야 할지 보여주시는 모본으로 오셨습니다. 예전에는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이제는 그의 성육신 안에서 뵈올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참 인간으로서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할지 보이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중보자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셨습니다.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는 형벌이 아니라, 구원하여야 할 이 세상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적인 형벌의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기에 죽을 수 있는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내려오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온 세계와 열방 중에 뛰어난 분이셨지만 사람들은 그 아름다움을 알지 못했고, 오히려 그분을 핍박하고 대적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싫어하는 나쁜 일을 하셨거나 물질이나 명예나 권세를 다투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진리 그 자체이신 분보다 거짓을 사랑했습니다.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지만 그들이 사랑한 것은 어두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시기에 미움을 받았고, 빛이셨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박해를 받으셨습니다. 이이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계셨을 때의 삶이었습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묵상은 모든 건전한 기독교적 경건의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창조된 사물 안에 당신의 존재와 성품을 아는 희미한 빛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그 빛은 모두 희미한 그림자일 뿐입니다. 가장 찬란하게 비치는 하나님의 속성과 영광의 광채는 그리스도 예수의 성육신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세계, 그리고 나 자신에 관하여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였습니다. 


III. 심한 통곡과 눈물로 

예수님이 성육신하시고 이 같은 삶을 사신 것도 감당할 수 없는 은혜인데, 성경은“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기록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예수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6~8). 이 예수의 마음이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A.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기도 

우리는 늘 무언가 능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늘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늘 실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능력이 많으시기 때문에 무능하다고 비관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죄가 없으셨기 때문에 회개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분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탄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에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리신 그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바로 당신이 당하게 될 십자가의 잔을 옮겨달라는 것이었다고 해석합니다. 물론 마음을 다해서 당신에게 그 잔을 내게서 옮기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이 바로 그 일을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예수님께서 세 번의 간절한 기도를 하신 후 하나님께 “하오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를 끝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내용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십자가를 지고 죽고 나면 남겨질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 땅에 있는 수많은 영혼들을 위한 중보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우리를 위한 기도를 하면 그냥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정말 기도의 은혜에 강력히 사로잡혔을 때 우리는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통절히 기도할 때 가장 순수합니다. 내가 위해 기도하는 이가 많은 고통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다면, 자신은 하나님 앞에 저주를 받아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기도의 순간입니다.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골육지친 중 몇이라도 구원을 얻기를 바란다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이나, 하나님이 백성들을 버리시려거든 차라리 자신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달라고 탄원하였던 모세 역시 그렇지 않았습니까?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난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서 주님께 열납되었습니다. 

만약 우리 각 사람이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로 사랑하는 지체들을 위해 기도하고, 남을 위해서 눈물로 부르짖을 수 있다면, 이 교회는 얼마나 아름다운 교회가 되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다 보면 비로소 자신의 영혼의 불쌍한 처지에 눈뜨게 됩니다. 남의 필요한 것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다보면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혜가 생겨납니다. 

모든 관계는 아름다운 영적 연합을 이룰 것이고, 그 통로를 통해 예수의 생명과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 그리고 기도의 은혜는 강물처럼 흐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뚜렷이 구별될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은 그 성도들의 교통 아래 충만하게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사도행전을 살펴볼 때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하나님의 세 가지 요인은 바로 말씀과 기도, 그리고 성령이었습니다. 특별히 기도는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은혜를 한 데 모으는 중요한 은혜의 수단이었습니다. 간절히 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는 어두운 시대에 복음을 불같이 타오르게 하셨고, 그런 기도가 있는 곳에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사시는 동안에 가장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으로 어린 아이처럼 아버지 앞에 기도하셨습니다. 이른 새벽과 깊은 밤은 그 분을 위한 기도 시간으로 따로 떼어져 있었고, 기도할 때마다 주님은 죄 없으셨지만 죄인인 우리를 위해 오셨고, 주님은 강건하셨지만 병든 자들을 위해 통곡하셨고, 주님은 부유하셨고 가난한 삶을 기꺼이 선택하셨으나 굶주리고 헐벗은 자들을 위해 눈물로 아버지 앞에 양식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던 이유였습니다. 

B. 세상과 맞서는 기도 

다음으로 예수님의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는 세상과 맞서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셨지만 이 세상에 굴복하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분은 언제나 이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위대한 영적인 힘을 기도생활 속에서 공급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이셨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면서 금식기도하시고 귀신을 내어 쫓으시고 권세 있게 가르치시고 병든 자를 고치고 연약한 자들을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모두 세상과 맞서시기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악하게 핍박할수록 주님은 사랑으로 그 세상과 맞서시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더 많은 시간을 간구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기도했더라면 극복할 수 있는 환경 앞에 너무나 쉽게 무릎을 꿇고 좌절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이길 힘은 우리가 가진 지력이나, 물질, 어떤 결단 같은 것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바로 그렇게 세상과 맞서 이기게 하는 하늘의 능력을 공급받는 위대한 통로라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의 세계에서는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이고, 약한 사람이 강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의인보다는 오히려 겸손한 죄인 가까이에 계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날 만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계시고, 중심이 통회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이 기도는 바로 이렇게 통회하는 마음, 상한 심령에서 울려 나오는 하늘의 아름다운 가락입니다. 

오늘날은 참된 복음이 점차 잊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는 방법을 알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그 복을 이 세상에서 찾고자 합니다. 그러나 참된 복음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으니 이번에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차례이다.”라는 명제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이 세상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불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요일 2:15)라고 한 요한 사도의 말처럼 살려면 주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힘을 주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 안에는 죄의 부패성이 잔존하고, 세상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 된 세상입니다. 더욱이 하늘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들과 악한 영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세상을 능히 이길 수 있는 거룩한 힘을 공급받는 것을 알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던 주님을 기억하면서 이기는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IV. 전능하신 하나님께 

또한 성경은 바로 예수님이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해 내실 하나님께 그렇게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렇게 원수들로부터 박해를 당하실 때,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 흘리시며 기도하실 때, 원수들에게 끌려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배반을 당하며 끌려가실 때, 왕궁 수비대에 의해 벗겨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하셨을 때, 도대체 전능하신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을까요? 

그렇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절망의 기도였고,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희망을 앗아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속의 계획, 곧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이 모든 하나님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죄를 대신 지신 어린 양으로 형벌을 당하시고 난 후에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 수치스런 죽음에서 건져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게 하실 것을 아셨습니다.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우리가 대충 믿음 생활을 한다면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 때문에 왜 고민하고 슬퍼해야 합니까? 우리가 주님을 섬긴다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신하였을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랬더라면 예수님의 사도들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리스도의 복음은 거절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나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자랑스러운 영광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냥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인생을 살았더라면 당할 이유가 없었던 고난이 주님을 섬기려고 결심할 때 도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을 섬기는 기쁨도 있지만, 때로는 내동댕이쳐지고 광야에 버려진 것같이 느껴져서 어디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 흔적을 발견할 수 없는 고난의 지경에 들어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우리의 육신의 눈은 의심하여도 우리의 믿음의 눈은 인생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다는 사실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능가하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나의 인생을 붙들고 계시고, 교회를 붙들고 계시고, 이 세계의 역사를 붙들고 계시다는 삼위일체의 위대한 경륜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주님을 위해 부끄러운 고난을 당하고 난 후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에 동참할 것이라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은 미래에 이런 영광을 우리에게 주실 뿐만 아니라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내 마음 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는 때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현재적인 부활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세상의 근심과 염려로 가득 찬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와 무릎을 꿇었으나 기도가 끝난 후에는 우리 영혼을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진리의 힘을 경험합니다. 

바로 기도가 우리를 이렇게 바꾸어 놓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킵니다. 기도가 우리의 환경만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바꾸어 놓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하는 것입니다. 


V.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기도에 관한 예기치 못한 진리를 전달해 줍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런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 이유입니다.“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고 말입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이유를 종종 믿음이 결핍된 기도 혹은 간절하지 않은 기도 혹은 힘을 합하지 않은 기도 등등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에 응답되었다고만 말하지를 않고 그 기도 응답의 이유를 예수님의 지상생애의 삶과 연결을 짓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외하심의 삶입니다. 

경외는 마음과 인격, 삶 전체를 어우르는 하나님을 향한 감정입니다. 그분이 지극히 높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가까이 하기에 두려운 떨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께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그분께로 끌려가는 사랑, 떨리는 두려움과 이끌리는 사랑이 바로 경외의 진수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를 우러르고, 그 마음은 아버지를 향한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하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응답해 주셨던 것입니다. 


VI. 결론 

결국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하여 정향되어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떠하십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살리심을 얻었으니 이제 여러분의 몸과 마음, 인생까지도 여러분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여러분을 구원해 주신 그 구원의 소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아직도 하셨을 그 일을 뒤잇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이 땅에 남아계셨더라면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을 그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렇게 여러분이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함으로 예수의 뒤를 따라가는 기도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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