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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울 왕국과 다윗 왕국 (삼상 14:52, 15: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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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사울 왕국과 다윗 왕국 (Saul and David)
성경 : 삼상 14:52, 15:17~30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52절)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사무엘이 가려고 돌아설 때에 사울이 그의 겉옷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하지 않으심이니이다 하니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더라”(17-30절).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왕국입니다. 그리스도 왕국은 예수님의 초림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시까지 끊임없이 사탄 왕국을 침노하여 이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모든 권세와 능력은 예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주님은 지금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능력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말씀이 선포되는 곳에 주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여 돌아옵니다. 자연인 스스로는 불가능한 놀라운 삶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해지고, 개인의 죄와 사회의 불의를 보고 애통하게 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갈망하게 되고, 주위의 어려운 자들을 향한 자비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청결한 마음으로 가는 곳마다 화평을 가져오는 자가 되고, 심지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핍박받기를 기뻐하는 자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막 16:17-18). 

예수께서 십자가의 구속 사역을 마치시고 부활하셔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고 이 권세를 교회에 주셔서 사탄의 세력을 묶고 추방할 수 있게 하심으로, 이제 교회는 땅끝까지 복음으로 원수의 세력을 정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구약에서 발견되는 가장 이상적인 그리스도 왕국의 예표는 ‘다윗 왕국’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인 다윗을 세워 장차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이루실 그리스도 왕국을 희미하게나마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진짜가 있으면 그것에 유사한 가짜가 있게 마련입니다. 아벨에게는 가인이,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이, 야곱에게는 에서가, 그리고 다윗에게는 사울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사울을 중심으로 세워진 사울 왕국은 하나님이 처음 의도하신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위조된 하나님 나라’ 이었습니다. 일찍이 모세는 이스라엘이 언젠가 왕을 갖게 될 것이라 예언했고, 잘못된 왕을 갖게 될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했습니다(신 17:14-20).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은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는 왕을 결코 갖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왕으로 등극한 사울은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자가 아니라 백성들이 택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세속적 욕구를 채워줄 왕을 하나님께 요구했고, 하나님은 그들이 구한 것을 주셨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뼈아픈 교훈을 주시기 위해 우리의 잘못된 기도에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진실한 것을 갈망하기에 앞서 먼저 거짓된 것을 맛보고 이로 인해 가끔 혼이 나 본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예수님도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그것이 좋기 때문에 새 술을 금방 원하는 자가 없다고 하셨습니다(눅 5:39). 

사울은 사람들이 택한 자였습니다. 그는 다른 이보다 어깨 위만큼 컸습니다. 자연적인 입장에서 그는 인간적인 능력과 재능, 그리고 인간적인 지성의 최고봉을 나타냅니다. 

처음에 사람들이 그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초청했을 때 그는 숨었습니다(삼상 10:22). 그는 겸손해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울로 숨게 만든 것은 겸손이라기보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그건 진정한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 섞인 두려움과 불안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사울 경향’이라 부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울 경향’이 어떤 것인지 알아서 우리 안에 이런 것들이 존재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한 때 세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던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운동들(movements)이 나중에는 엘리트 의식과 배타주의와 교만함으로 변질되곤 했습니다. 이런 운동들은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파처럼 그들 자신의 율법과 전통에 묶여 화석화되어 하나님의 다음 역사를 반대하는 ‘사울의 집’이 되었습니다. 

교회사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새로운 역사를 이루신 후에 거의 모든 운동이 역사가 되고 존경할 만 했지만, 그 불꽃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이런 운동들은 ‘사울의 집’처럼 되어 ‘다윗의 집’이 와서 다음 정권을 인수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사울은 개인일 뿐만 아니라 소위 ‘사울의 집’이라는 집단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울의 성향을 지닌 이런 사람들은 또다른 ‘사울의 집’을 만들어내며 이는 강력한 운동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종교의 영들이 결국 ‘사울의 집’을 침공하여 장악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위조된 하나님 나라인 사울 왕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울 왕국의 특징들은 위조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사울의 집에 맞서서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이루어갔던 다윗의 모습과 비교해 보겠습니다. 둘 사이의 다른 점들을 사울의 관점에서 살펴봅시다. 


1. 하나님과의 관계 면에서: 사울은 하나님과 진정한 개인적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으나, 다윗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찾았음

19절=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본문의 배경을 잠시 살펴봅시다. 삼상 15장에는 사울의 두 번째 불순종과 두 번째 왕위 폐위 예언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앞서 사울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를 버리겠다고 말씀하셨지만, 한번의 실수로 당신이 택한 사람을 버리실만큼 냉정한 분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울에게 이전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울은 아말렉 족속의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진멸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아말렉 족속은 일찍이 모세 시대에 이제 막 출애굽하여 나온 이스라엘의 후미를 공격함으로써 하나님께 도전했던 악한 민족이었습니다(출 17:8-13, 신 25:17-19). 아말렉의 행위는 묵과할 수 없는 중대한 죄악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울을 통해서 그들에 대한 심판을 집행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거룩한 전쟁(holy war)'이자 성스러운 의무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였지만 온전히 순종하지는 않았습니다. 온전치 않은 순종, 부분적 순종은 곧 불순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아말렉 왕 아각을 살려두었고, 짐승 중에서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습니다. 아각을 살려둔 것은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였고 짐승들을 살려둔 것은 물욕을 채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보다 백성들을 더 두려워한 데서 연유한 것이었습니다(24절). 

성도 여러분! 사울의 실패 원인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데 있었습니다. 순종은 구속주요 심판주이신 하나님과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설 책임 있는 존재인 인간 사이에 바른 관계가 이루어졌다는 신앙의 핵심적 표현입니다. 순종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신앙 고백입니다. 

사울은 결코 하나님과 진정한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필요할 때면 확신을 주는 종교적 행위를 할 줄은 알았지만 진짜는 아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성직자의 옷을 입고 종교적 쇼를 하는 일부 전문사역자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의 개인 생활에는 하나님에 대한 열정이 없습니다. 주님의 임재를 진정으로 찾지 않으며 주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갈망도 없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단지 공허한 종교적 형식일 뿐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사람들을 본받거나 여러분 안에 사울의 성향이 없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분명히 사울은 하나님의 도움을 원했지만 단지 그것이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 때만 그랬습니다: “오, 하나님, 저를 축복하시고 도와주세요. 그러나 제 일을 방해하지는 마세요. 그냥 제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게만 도와주십시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할지라도 저는 어떻게 해서든 제 방식대로 그곳에 갈겁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한 사울과는 달리, 다윗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다윗의 열정은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관계 없이 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기 방식대로 어떤 것도 하길 원치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길 소원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택하신 진정한 왕이었고, 장차 오실 메시야의 예표였습니다. 

보십시오. 사울은 40년의 통치기간 내내 블레셋과 싸웠지만 결코 결정적인 승리를 한 번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 맺기에서 실패했고,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지 못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의 음성을 들어보십시오.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하지만 다윗이 왕위에 올랐을 때 그는 제일 먼저 하나님께 가서 여쭤보았습니다. “제가 블레셋을 공격하기를 원하십니까?”(삼하 5:19). 그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움직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하실 때마다 다른 전략을 주셨고, 그 결과 다윗의 세 번의 공격으로 블레셋의 전력은 완전히 와해(瓦解)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과 하나님 사이에 완전히 다른 관계가 성립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열정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사울 집’ 사람들의 기도를 버리고 다윗처럼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대로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2. 다른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 사울은 유능한 사람들을 ‘자신에게’ 불러 모았으나(삼상 14:52), 다윗은 무명한 자들을 취하여 그들을 변화시켰음 

14: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사울의 왕국이 ‘위조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사울은 왕위에 있는 동안 블레셋과의 전쟁을 위해 힘 있는 자나 용맹 있는 자를 불러모았다고 했습니다. 평소에도 항상 블레셋과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대비를 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안전을 책임진 왕으로서 나름대로 노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 원문에서 본절의 하반부를 직역하면, “그리고 사울이 강한 모든 자와 용감한 모든 자를 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들을 그에게로 (지속적으로) 불러 모았다” 가 됩니다. 

사울은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을 보면 그를 자신에게 불러모았습니다. 그는 잠재의식적으로 ‘이 사람들이 나와 내 사역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 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이 사울의 한계였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단지 자신의 프로그램을 성공시키고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 유용한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들에 대한 인간적인 부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그들이 자기 목적에 어떻게 부합되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이용만 했고 결코 그들의 개인적인 성장이나 행복에 대하여는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와 같은 사울 성향을 조심하십시오. 만일 여러분 안에 이런 성향이 조금이라도 발견된다면 하나님께서 이를 미워하시듯이 여러분도 이를 미워하십시오. 
그런데 우리의 다윗은 어떠했습니까? 성경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아둘람굴로 도망했을 때 그에게로 많은 사람들이 나아왔다고 했습니다.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다윗은 빚에 시달리고 낙담하고 환멸을 느낀 사람들을 데리고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정말 무가치한 존재들이었지만 다윗은 그들을 놀랄만한 용감한 전사로 바꾸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을 가진 지도자는 진정한 아비의 마음으로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 안에 있는 능력과 은사와 사역을 계속해서 개발해냅니다.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은사와 사역에서 영적으로 점점 더 강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위의 사람들에 대하여 어떤 종류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특히 여러분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하여 품은 마음이 ‘아비의 마음’ 입니까 아니면 단지 요구사항이 많은 지도자의 마음입니까?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진지하게 자신을 성찰해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갖지 못한 사울은 자기보다 더 큰 은사를 지닌 다윗을 보았을 때 불안해했습니다. 다윗은 너무나 성공적이어서 사울이 감당할 수가 없었고 다윗의 능력은 사울의 안정감을 위협했습니다. 사울을 닮은 지도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 대해 절대적으로 충성된 마음을 가졌지만 오히려 그는 사울의 위협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보기에 다윗은 자기보다 나은 지도자였고 능력도 많았으며 백성의 사랑도 더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삼상7) 라고 백성들은 노래했고, 육적인 사울은 이를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도망쳐야 했습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는 서로 서로 세워주고 발씻겨주며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며 사랑하는 아가페 공동체를 이루어나가는 성도들로 충만해지기를 소원합니다.


3. 주된 관심 면에서: 사울의 주된 관심은 사람들 앞에 좋게 보이는 것이었으나, 다윗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었음

30절=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내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사울 왕국이 위조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그 왕국의 주된 관심 면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사울이 정말로 관심을 가졌던 마지막 것은 사람들 앞에 좋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7일 동안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울 왕 앞에 사무엘 선지자가 마침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28절). 매우 중대한 순간입니다.

이때 사울의 태도를 보십시오. “내가 범죄하였을지라도 이제 청하옵나니 내 백성의 장로들 앞과 이스라엘 앞에서 나를 높이사...”

사울은 여전히 백성들 앞에서 좋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는 사무엘을 졸라 어떻게 해서든 장로들과 백성 앞에서 제사를 드리고자 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제사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지를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고, 자신이 살진 양과 염소를 살려둔 것을 정당화하고 싶었고, 사무엘이 자신을 지지하고 있음을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과시하고 싶었습니다. 사울의 주된 관심은 사람들 앞에 좋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라는 가짜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의 유일한 관심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후일 그가 왕이 되어 하나님의 언약궤를 오벧 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 메고 올라올 때 그는 기뻐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삼하 6:14).

그 모습을 본 사울의 딸, 그의 아내 미갈은 마음으로 다윗을 멸시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삼하 6:20).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백성들 앞에서 바보처럼 보였습니다’ 라는 말입니다. 
그녀는 사울의 딸이었기 때문에 자기 아버지처럼 사람들의 생각에 관심이 가장 많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개의치 않았고 오직 하나님이 어떻게 보시는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미갈에게 대답하는 다윗의 마음을 헤아려보십시오.

삼하 6:21-22=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만일 사울이 하나님 앞에 철저히 회개하였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만일 사울이 왕관이라도 내려놓고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고 겸허하게 통회 자복했다면 그래도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셨을까요? 단언할 수는 없지만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최소한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무리하게는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아주 중요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죄를 짓고 났을 때 했던 고백입니다.

시 51:16-17=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간음죄와 살인죄를 동시에 지었던 다윗은 어찌보면 사울왕의 경우보다 훨씬 큰 죄인이었지만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않았습니까?
성도 여러분! 하나님 나라 백성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도입니다.
본문의 사울은 하나님보다 사람의 눈을 더 의식했기 대문에 진정한 회개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윗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자백하며,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다는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 우선되어야 하겠습니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주위 이방 국가들을 모방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마음을 가지고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교훈적인 차원에서 사울을 허락하셨고, 사울은 ‘위조된 하나님 나라’ 가 어떤 것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교회는 세상을 모방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다윗과 솔로몬을 통하여 이룩된 왕국이 세상의 찬사를 한몸에 받았듯이 교회는 세상을 모방하고자 하는 자세를 버리고 그들보다 모든 면에서 탁월해지려는 야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전투를 대신해 줄 왕을 원했으나, 교회는 평신도들이 해야 할 일을 돈을 주고 전문 직업인을 고용하고자 하는 개념 자체를 철저히 버려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투를 싸워 줄 왕을 원치 않습니다. 

슥 12:8= “그 날에 여호와가 예루살렘 주민을 보호하리니 그 중에 약한 자가 그 날에는 다윗 같겠고 다윗의 족속은 하나님 같고 무리 앞에 있는 여호와의 사자 같을 것이라” 

지금 교회 시대는 가장 약한 자가 다윗과 같고 가장 작은 자가 세례요한보다 큰 시대입니다. 사도적 능력을 지닌 지도자들의 지도하에서 믿음과 연합과 조직을 갖추면 우리는 강력한 전사들로 구성된 주님의 무서운 군대가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위조된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한마디로 ‘불순종’ 입니다. 사울을 향하여 책망하는 사무엘의 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2-23절=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작은 부처상을 여러분의 침실에 놓고 거기에 절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듯이, 하나님 보시기에 교만은 우상숭배와 같이 절대 용납되지 않습니다. 두 경우 모두 귀신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둘 사이에 차이가 없습니다. 
우상 숭배자는 결국 그들이 섬기는 우상의 배후에 역사하는 귀신들에게 사로잡힙니다. 반역하고 교만히 행하는 자들은 결국 반역과 교만의 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가장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셨습니다. 히브리서 기자에 따르면,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히 5:8-9)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순종의 중심적 역할을 아시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만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권세를 주십니다. 
매일 주님과 진정한 관계를 가져서 온전한 순종에 이르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서현의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대구서현교회, 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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