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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심령, 내 중심 (시 13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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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령, 내 중심 (시 131편) 
 
 
오늘은 사무엘서에서는 잘 볼 수 없었던 다윗의 중심의 태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표제를 “다윗의 시, 올라가는 노래”라 했습니다. 성전에 올라감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시상의 전개가 계단을 올라가듯 진행된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시인은 겸손에 대해 내적인 생태인 “마음”에서 마음의 창인 “눈”으로 그리고 구체적 외부 행동인 “일”에 연관시켜 묘사합니다. 행동은 겸손해도 눈이 거만할 수 있고, 눈이 겸손을 담고 있는 듯해도 마음에는 교만을 품고 있을 수 있지요. 마음의 교만은 눈으로 나타나서 마침내 행동으로도 표현되기가 쉽습니다. 시인은 계단식으로 시상을 발전시켜서 겸손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1a).

누가 복음에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기도하는 바리새인이 등장하는데, 예수님은 그를 “자기를 높이는 자”라 하셨습니다(눅 18:11-12, 14). 물론 구체적인 겸손의 행위들을 조금도 나열하지 않는 다는 점과 타인과 비교하여 자랑삼거나 업신여기는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시인과 교만한 바리새인은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자신의 겸손을 노래한 일 자체가 자기를 높이는 교만으로 비춰질 수 있겠지요. 이 모순되어 보이는 점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등장하는 순간부터 오해를 받았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그의 형 엘리압은 다윗에게 노를 발하며 말했었지요. “나는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삼상 17:28). 사울 왕의 사위가 되었을 때에도 “왕을 격동시켜” 다윗을 집요하게 추격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삼상 26:19). 아마도 그들은 다윗이 높아지려는 마음을 품고 왕의 자리를 노린다고 모함했겠지요. 부당한 오해와 모함 속에서 살아온 시인은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중심을 보시며 낱낱이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를 선언하고 있는 것이지요.

겸손은 단순히 ‘자기를 낮춤’만을 뜻하지 않고 ‘자신에 대해 정확히 평가한 후 낮춤’을 의미합니다. 사실보다 자기를 크게 평가하는 마음으로 행동만 낮추면 겸손이 아닌 위선이나 비굴이 되지요.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라고 하셨을 때, 사실에 대한 정확한 평가였기 때문에 교만의 말이 아닌 진리의 선언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겸손하다고 고백한 다윗의 시가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자신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사람들은 다윗을 왕으로 부르고 기억합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왕인 동시에 하나님의 종이기도 함을 분명히 알고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왕들과는 달리 자기 뜻을 펼치고 자기 업적을 쌓는 일에 골몰하지 않았습니다. 부지런히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그분을 의존하고 기도했으며, 그분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지요. 그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하고 살았던 것이지요. 겸손한 삶의 토대에 자기에 대한 정확한 평가가 있었던 것입니다.

진화론에 기초한 유물론은 사람의 가치를 동물이나 물건의 자리까지 손상시켰습니다. 반면 오늘날 인간에게는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인간의 가치를 신적인 자리까지 높입니다. 시대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가장 정확한 평가는 성경일 것입니다. 

성경이 성도를 평가하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 “하나님께 종”(롬 6:22), “하나님의 백성”(벧전 2:10) 등만 생각해 봅시다. 중생해서 새롭게 되긴 했지만 여전히 피조물이면 하나님을 의존해야만 존재할 수 있고 그분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 분명하지요(요 15:5). 종이라면 주인의 뜻대로 순종한 후에도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무익한 종의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눅 17:10).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나의 왕이신 하나님의 통치를 존중하며 그분을 높이고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겠지요(고전 10:31).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평가하는 일은 중요치 않게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그 시대가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일, 그 시대가 놀랍다고 평가하는 이상을 위해 힘쓰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몰라서 과도하게 힘쓰는 것이지요. 이런 측면에서 보면 중생하지 않은 모든 자연인은 근본적으로 교만한 사람입니다. 중생을 한 후에도 교만한 본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요. 그 이유 중의 하나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자기는 어떤 존재인지 제대로 평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정확히 평가했다는 것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뿐 아니라 분수를 안다는 말도 되는데, 무엇이 내게 적절한 일인지를 알아서 과도하게 힘쓰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겸손했던 시인은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1b)고 고백합니다. 직역하면 “제가 위대한 일들로 그리고 저로부터 비상한 일들로 가지 않았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이 높은 이상이나 대망을 가지고 힘쓰는 것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자기 사명도 아닌 일들은 위대하고 놀라운 일일지라도 관심두지 않았다는 의미입니다. 관심이 많은 것을 성취하고 획득하거나 높아지는 일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순종하는데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지요. 

간혹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면서 인간이 무엇이라도 힘쓰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가 있는데,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누구보다 힘쓰고 애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도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고후 11:23)했다고 고백했으며, 디모데에게는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고 명했지요. 로마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행 19:21).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직접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 13:24)고 명령하셨으며, 받은 달란트로 최선을 다해 일하지 않은 하인을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 정죄하셨고(마 25:26),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할 것을(눅 16:10) 가르치셨습니다. 스스로도 힘쓰고 애써 간절히 기도하셨지요(눅 22:44).

성경에 비추어 자기를 정확하게 평가했다면 우리는 그분께 절대적으로 의존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하나님 백성답게 살면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그분을 의존하지 않고서도 살 수 있는 존재로 생각한다든지, 그분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뜻을 고집한다든지, 자기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한다든지 하는 것은 교만에 해당되므로 회개해야 하겠지요. 다윗 역시 항상 겸손하지는 않았지만, 죄를 지적받을 때는 회개함으로서 겸손을 회복했었습니다. 다윗이 마음을 높이는 대신에 힘쓴 일이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했지요. 젖 뗀 아이는 더 이상 젖을 달라고 보채지 않습니다. 어머니 품에 있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1절과 연관하면 크고 기이한 일들을 하려는 과욕에 사로잡혀 그분께 보채지 않았다는 의미가 되지요. 다윗은 아직 젖이 떨어지지 않아서 안달하고, 짜증내고, 울며 보채는 아이 같지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 있는 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분께 전적으로 의존해서 자신을 맡겼지요. 주님의 보호하심 속에 평온했습니다. 다윗은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보호하심에 만족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히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요 기이한 일을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은 여호와께서는 마음이 겸손한 자와 함께 계시며(사 57:15),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시고(시 10:17), 겸손한 자를 붙드시며(시 147:6),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시며(시 149:4),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증언합니다(잠 3:34). 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고(시 22:26), 겸손한 자에게는 지혜가 있고(잠 11:2), 겸손한 자는 여호와를 인하여 기쁨이 더할 것을 말씀합니다(사 29:19).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이고(잠 18:12), 겸손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며(잠 22:4), 마음이 겸손하면 영예를 얻을 것인데(잠 29:23), 그분께서 사람에게 구하시는 것 중 하나도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미 6:8)이라 가르칩니다. 신약성경 역시 구약의 가르침을 종합해서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분이심을 증언하며(약 4:6),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고 약속합니다. 이 말씀들을 다윗의 삶에 조명해보면 참으로 말씀대로 되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절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처럼 살 것을 명합니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3). 시인은 가장 비참하고 괴로운 삶이 여호와를 바라지 않는데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백성들 중에는 어려울 때는 하나님을 바라다가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 바라지 않는 사람들과 형통할 때에는 하나님을 바라다가 어려움이 닥칠 때 하나님을 원망하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지적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부터” 여호와를 바라도록 명합니다. 힘들 때마다 잠깐 잠깐이 아니라 “영원까지” 바라도록 명합니다.

이 시편이 누구보다 치열하게 전투하며 온갖 시련과 풍파를 겪었던 다윗의 고백이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그는 높은 마음을 품는 대신, 젖 뗀 아이가 어미 품이 있는 것 같이 평온한 유지하며 살았습니다. 우리의 중심은 어떠합니까? 치열하고 분주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삶의 외면적 모습 이면에 있는 중심의 근본적인 태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자신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힘쓰며 사는 지 자신의 삶을 잘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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