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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력가 다윗 (시 5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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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가 다윗 (시 51:1-19) 
 
 
❚권력의 양면

고대 그리스 사람인 다모클레스는 늘 왕의 자리를 부러워했습니다. 어느 날 왕이 다모클레스를 불러 특별히 왕좌에 한 번 앉아보도록 허락해 주었습니다. 다모클레스는 왕좌에 앉아 자신에게 머리를 숙이는 사람들을 보고 마냥 신이 났습니다만 무심코 천장을 쳐다보고는 심장이 쿵 멎는 것 같았습니다. 날카로운 칼이 가느다란 머리카락 한 올에 묶여 대롱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왕이 다모클레스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항상 내 자리가 위태롭다는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머리 위에 칼을 매달아 놓는다.” 바로 이 이야기에서 유명한 ‘다모클레스의 검’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 ‘다모클레스의 검’이라는 말은 높은 자리나 권력에 앉아 있는 사람은 늘 긴장과 불안, 위험을 지고 살 수밖에 없다는 말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이나 지위는 마치 양날이 선 검과도 같습니다. 그 자리에 올랐을 때 누리게 될 막강한 힘과 권한을 생각하면 한없는 매력을 가진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국회의원에 몇 차례 떨어져 재산 탕진하고 그야말로 패가망신한 분이 있습니다. 제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국회의원 자리가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랬더니 그 분 하는 말씀, “목사님이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권력의 맛, 그거 세상 어떤 것보다 매력 있습니다. 매력이 아니라 마력이라고 해야 할까요?”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욕은 다른 어떤 욕심보다 크고 무섭다고 합니다. 엄청난 매력, 아니 마력을 가진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은 이런 매력과 동시에 그것을 가졌을 때 한없는 책임감과 부담감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아무나 권력에 오를 수도 없지만 또한 아무나 권력에 올라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마땅히 져야 할 책임과 부담은 안 지고, 권력의 맛과 특권만 누리려 한다면 그 나라 국민이 불행해지고 많은 사람이 큰 고통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동안 이런 잘못된 지도자들을 만나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습니까? 나라뿐 아니라 회사나 가정이나 교회 같은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가 그 자리에 올라갔을 때 권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 전체가 흥할 수도, 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넘어질까 조심하라” 시리즈 세 번째 시간으로 ‘권력’에 대해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시간에는 외모와 능력, 두 번째 시간에는 재물에 대해 알아보았는데 오늘은 ‘권력’입니다. 원리가 똑같습니다. 외모나 능력, 재물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축복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걸림돌이요 엄청난 저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외모나 능력, 돈을 잘 사용하면 하나님께 더 큰 복을 받는 축복의 통로가 되기도 하지만 잘못하면 차라리 그것을 받지 않음만 못한 결과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으로부터 외모와 능력을 받은 요셉은 그것을 잘 사용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냈지만 부자 청년은 그 재물 때문에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가 누린 권력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아보려고 합니다. 과연 다윗은 임금 자리에 올랐을 때 그 권력을 축복의 통로로 사용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렸을까요? 아니면 하나님께 죄 짓고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저주의 도구로 사용했을까요? 불행하게도 후자였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다윗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 권력을 가지고 하나님께 끔찍한 죄를 짓는 도구로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그 범죄 때문에 자신도 큰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죄 지을 일이 많아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돈이 없으면 차라리 죄 지을 일이 별로 없습니다. 가난하면 죄 지을 일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아닙니다. 가난하면 먹고 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됩니다. 

그런데 돈을 벌면 방탕하고 남을 해치는 죄를 지을 일이 훨씬 많아집니다. 마찬가지로 권력도 가지면 죄 지을 일이 더 많아집니다. 힘이 없을 때는 그런 유혹이 없는데 막상 권력을 가지고 보면 내 욕심을 채우고 싶은 유혹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권력을 가질수록, 힘이 생길수록 그에 비례해 더욱 더 겸손해지고 더 엎드리고 더 기도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정말 그 권력과 지위 때문에 오히려 내가 망하게 됩니다. 차라리 그 자리에 안 오르는 것이 나을 번한 일이 생깁니다. 우리도 정치인이나 지도자들 못났다고 욕만 하지 말고 우리 자신부터 정신 바짝 차리고 내 힘, 내 능력, 내 권력과 지위를 잘 사용해야 합니다.

❚다윗의 권력

그렇다면 도대체 다윗은 권력 때문에 어떤 죄를 지어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 것일까요? 다윗은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에 오른 사람입니다. 광야에서 양을 치던 평범한 목동이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일약 국민적 스타가 되었고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인 사울의 사위가 됩니다. 그러나 장인 사울의 심한 질투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고 드디어는 광야로 도망해 10년 이상을 쫓겨 다니고 블레셋에 망명까지 합니다. 

이렇게 숱한 고생을 하다가 드디어 사울이 죽은 후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고생을 많이 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부류로 나누어집니다. 고생을 많이 해봐서 겸손해지고 남도 이해하고 도울 줄 아는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반대로 내가 고생고생 해서 이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내 인생 폈다, 내 맘대로 살자 하고 아주 교만하고 독선적인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욕심이나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가 한 순간 무너지기도 합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다같이 사무엘하 11장을 펴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암몬 족속과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1절에 보니 이런 전쟁 와중에 다윗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 같으면 누구보다 앞장서서 전쟁터를 누비던 그가 부하들만 전쟁터에 보내놓고 자신은 궁전에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이젠 왕이 되었으니 직접 전쟁터에 안 나가도 되겠지”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여기서 슬슬 이상한 징조가 보이기 시작하지요? “이 나이에 내가 하랴?”라는 말처럼 다윗의 행동에서 “내가 왕인데 내가 하랴?”는 교만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교만한 상황에서 다윗은 치명적인 유혹을 받게 됩니다. 2절 보세요. 왕궁에 남은 다윗은 저녁 때 적적했던 모양입니다. 여러분, 적적한 시간을 만들지 마세요. 지위가 높아지거나 재산이 많아지면 적적한 시간, 한가한 시간이 많아집니다. 바로 그 때가 죄가 틈탈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적적해서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19세 관람불가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왕궁 저 아래 어떤 집에서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본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입니까? 다윗이 부인이 없습니까? 첩이 없습니까? 수많은 아리따운 여인에게 둘러싸여 사는 임금입니다. 목욕하는 여인을 보았다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헌데 3절에 보니 그 여인이 너무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밧세바가 예뻤겠지요. 하지만 왕궁에는 그보다 더 젊고 아름다운 여인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입니다. 왜 하필 그 순간 목욕하는 그녀가 그리도 아름다워 보였을까요? 이것이 죄의 속성입니다. “왜 하필 그 때 그런 마음이 들었을까? 왜 하필 그때 그 물건이 탐이 났을까? 왜 하필 그 때 그 여자가 그렇게 예뻐 보였을까?” 등등 죄는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그 잠깐의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요하게 그 부분을 공략해서 우리를 죄짓게 하고 무너뜨립니다.

결국 다윗은 그 여인을 데려와서 동침합니다. 더 나쁜 것은 그녀가 자기에게 그토록 충성하는 부하 장군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임을 알고도 그 죄를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자기 죄가 발각될까 두려워 그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야를 전쟁터에 보내 교묘하게 죽게 만듭니다. 단 한 순간의 유혹이 음행 죄를 짓게 하고 그 죄를 은폐하기 위해 더 큰 살인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의 죄가 모두 다윗의 권력에서 나왔다는 점입니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왕궁으로 데려와 동침한 것도 왕의 권력으로 시킨 일이고, 이를 은폐하려고 우리야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든 것도 왕의 권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결국 권력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다윗은 이 권력을 이용해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다윗은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잃게 됩니다. 물론 하나님이 치신 것입니다. 후에 다윗의 자녀들끼리 서로 죽이고, 압살롬은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키고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며 집안이 풍비박산 난 것도 이 죄와 결코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윗이 그토록 성전을 짓기를 사모했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신 것도 우리야의 무죄한 피를 흘린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로마서 13장 1절 말씀처럼 모든 권력과 지위는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왜요? 내가 잘 나서? 내가 노력해서?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통치하고 다스려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뜻입니다. 나를 위한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권력입니다. 내 영광을 위한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권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다윗처럼 자신의 정욕을 채우고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한다면 그 권력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됩니다. 나를 넘어뜨리고 죄짓게 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정직한 영, 구원의 즐거움

그러면 이제 이런 죄를 지은 다윗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지켜보도록 합시다. 그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는 죄를 지은 다음에 드러납니다. 무슨 뜻이냐? 하나님의 사람도 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아무리 잘 믿는 사람도, 아무리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 죄를 지은 다음입니다. 죄 지은 다음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인지 아닌지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오늘 본문인 시편 51편은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그런데 제가 아까 반드시 표제를 읽자고 했지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표제에 뭐라고 나와 있습니까?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그에게 왔을 때”라고 했습니다. 즉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죄를 지은 후 선지자 나단이 그의 죄를 지적할 때 이 시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참회시’(慙悔詩)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회개하며 지은 시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참회시에서 다윗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1절과 2절에서 내 죄를 지워달라고, 깨끗이 제해달라고 하고 7절에서도 나의 죄를 씻어달라고 간구합니다. 철저하게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참회하는 것입니다. 10~12절에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같이 읽읍시다.

10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11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다윗이 죄를 지은 후 내린 결론은 무엇입니까? 내가 죄를 짓지 않으려면, 혹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죄를 씻고 용서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바로 ‘정직한 영’과 ‘구원의 즐거움’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비천한 양치기일 때도, 그리고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도 ‘정직한 영’과 ‘구원의 즐거움’을 붙잡고 있었기에 절망하지 않고 죄 짓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왕이 되고 권력의 맛을 보니 이 두 가지, ‘정직한 영’과 ‘구원의 즐거움’이 사라져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깨닫고 이 두 가지를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무리 출세하고 성공해도 이 두 가지만 잃지 않으면 타락하지 않습니다. 바로 ‘정직한 영’과 ‘구원의 즐거움, 구원의 감격’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지위에 올라 있고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위’니 ‘권력’이라는 말을 쓰니 너무 거창하게 들리시나요? 그래서 나와 별로 관계없는 것처럼 들리시나요? 아닙니다. 대통령도 권력이고 사장님도 권력이지만 아주 작은 지위나 직책(과장, 조장, 반장, 공사장의 십장)도 권력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회에서, 직장에서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직책이나 권력, 힘 말입니다. 가정에서 가장인 것도 권력이요 부모도 권력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받은 직분도 어찌 보면 권력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권력과 힘이, 이 모든 직분과 지위가 다 내 능력이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목적하신 바가 있어서 주신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어떤 목적이요? 그 자리에서, 바로 그 지위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이 목적을 절대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해야 합니다. 높아질수록 강해질수록 더 겸손하고 더 엎드리고 더 기도해야 합니다. 죄 안 짓도록 유혹과 욕심을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자세를 잃지 않을 때 이 나라가 변하고 사회가 변할 것입니다. 법으로 안 변합니다. 강제로 바꾼다고 안 변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이렇게 살 때만 가정이 변하고 교회가 변합니다. 바로 군림하는 권력이 아니라 ‘섬기는 권력’입니다. 섬김 받는 지위가 아니라 ‘섬기는 지위’입니다.

유대인이 다 하만의 계교로 다 죽게 생겼을 때 모르드개는 왕후가 된 에스더에게 민족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에스더는 두려움 때문에, 또 자신의 왕후 지위와 생명까지도 잃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주저합니다. 바로 이 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느냐(에 4:14)

그렇습니다. 우리 자녀들 가운데 이 나라, 사회, 교회를 이끌어갈 훌륭한 지도자들이 많이 나오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내가 이 자리를 얻은 것이, 내가 이 지위에 오른 것이 이 때를 위함이구나.”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때 그 일을 위해 쓰임 받기 위함인 것을 깨달아 그 사명을 능히 감당함으로 그 권력과 지위를, 그 능력과 힘을 하나님의 축복의 도구로 삼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도구로 잘 사용하시는 여러분과 자녀들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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