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응답받은 외침 (눅 18:35-43)

  • 잡초 잡초
  • 387
  • 0

첨부 1


응답 받은 외침 (눅 18:35-43)


여러분이나 저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다 보면 절망하고 아파하고 힘들어할 때가 있습니다. 절망을 경험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포기하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겹치면 낙심해, 좌절해, 심하게 되면 인생을 끊고 불행으로 인생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사진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호주 사람인 닉부이치치입니다. 이 사람은 세르비아계 후손인데 아버지가 목사이십니다. 호주에 이민 와서 살던 중에 28년 전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사진 한 번 보시겠습니다. 뭐가 없지요? 예,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팔이 없습니다. 팔만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다리도 없습니다.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없는 다리 맨 끝에 오른쪽에 발가락 두개만 있습니다. 닉부이치치! 지금 28살 인데 이 사람이 13살 때 죽으려고 자살을 여러 차례 시도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버지인 목사가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의 팔이나 너의 다리가 아니라 너라고 하는 사람 자체를 사랑한다. 인생을 포기하지 마라. 이 아버지의 말을 듣고 그 때부터 열심히 살아 지금은 전 세계를 다니면서 희망 전도사라, 몇 주 전 우리나라에도 왔었습니다. 온누리교회에서 집회를 하고 연세대학교 아주대학교 많은 곳에서 절망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증언하고 갔습니다.

얼마 전에 행복 전도사라고 하는 여자분이 자살해 죽었습니다. 그 전날엔가 우리나라에 와서 간증 집회를 한 사람입니다. 보세요. 양 팔이 없고 다리가 없어도 행복하게 희망을 갖고 전 세계에 다니면서 복음을 증언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 나는 왜 행복하냐! 그것은 내 몸이 비록 성하지 않지만 나는 예수를 만났고 예수 때문에 나는 행복하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사람을 볼 때마다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직장에 문제가 있고 또는 사업에 문제가 있고 그리고 육신의 질병이 있고 재정적인 문제가 있어 어려움을 당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 보다 더 힘들고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예수님 때문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바디메오라고 하는 어떤 거지이자 맹인인 한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도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내려가시다가 어떤 한 맹인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지어 여리고로 내려가시는데 그곳에 바디메오라고 하는 젊은 맹인이 있었습니다. 요즘도 별다른 것은 없지만 눈이 안 보이는 사람들, 제일 힘든 사람들이지요. 좀 안 들려도 말을 못해도 이런 장애인은 그런대로 직업을 가질 수도 있지요.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 장애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직업 갖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옛날 유대사회에 오늘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장애에 대한 차별이 심했던 이 때, 이 바디메오라는 젊은 맹인은 거지였습니다.

길거리에서 오고가는 사람들에게 동냥을 해서 먹고 살아 남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이 젊은 맹인, 그가 앉아서 구걸하고 있는데 많은 무리들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이상히 여겨 물어보았습니다. 도대체 누가 지나 가냐? 그랬더니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이야기 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바디메오는 가슴 속에 이상한 것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병자를 일으켰다는 그 분 아냐?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았다는 그 분 아니냐? 죽은 나사로를 살리고 귀신 들린 사람들을 살렸던 그분 아니냐? 마음속에 그 분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들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 같다고 하는 때가 되었을 때 바디메오는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는 순간에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불쌍히 여겨 달라고 호소합니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이 바디메오를 꾸짖습니다. “야 이 거지야. 조용하라, 잠잠하라.” 오늘 성경에는 꾸짖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의 방해와 꾸짖음에도 불구하고 바디메오는 다시 한 번 소리를 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을 향하여 울려 퍼지는 이 바디메오의 외침을 예수님이 들으셨습니다. 가시던 길을 멈추고 제자들을 불러 그를 데려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가만히 보니까 거지행색을 하고 있는 이 시각장애인 맹인 바디메오를 보고 예수님은 물었습니다. 

내가 네게 무엇을 해 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이 모르시나요? 바디메오의 마음속에 있던 믿음, 예수 앞에 문제를 가지고 나오면 문제가 해결 될 수 있다는 믿음이 바디메오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자리에서 바디메오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네 눈이 나았다.” 바디메오는 너무너무 기뻤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수님을 따라 다녔습니다. 주변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이 광경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보면, 한 젊은 맹인 거지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고침을 받았다는 예수님의 기적의 능력에만 관심을 갖고 이 사건을 볼 수 있지만 누가가 이 본문을 기록했을 때에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바디메오의 이 눈 뜨게 된 사건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우리는 바디메오라는 이 사람의 상황이 어떤가 알아보아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시각장애인도 많고 그 분들의 인권도 옛날 같지는 않지요? 그런데, 이 옛날 예수님 시대 때에 시각장애인은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어느 날 예수님께 사람들이 이 시각장애인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이 시각장애인을 놓고 이렇게 물었습니다. “예수님, 이 사람이 앞이 안보이게 된 것은 이 사람의 죄 때문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입니까?” 

요즘은 그러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유대사회에서는 사람이 앞이 안 보여 장애인이 된 것은 본인의 죄 때문이거나 아니면 부모의 죄 때문에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나 심판이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이 바디메오는 종교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미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거지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돌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가진 것 없고 종교적으로 신앙적으로 버림 받은 사람, 바로 바디메오의 현실입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길거리에 좌판을 깔고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에게서 동냥을 해서만 먹고 살 수 있었던 절망의 상태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요즘 육체적으로 고난당하고 재정적으로도 너무나도 어렵고 왜 사나? 직장이나 일터에서 여러분의 삶이 너무너무 힘들어 외로워하고 죽기 일보직전에 있고 절망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여러분에게 오늘 주님이 다가오셔서 이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이 바디메오는 어렵고 힘든 절망과 고난의 삶에 현실에서 이제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에 이 바디메오는 어떤 행동을 취했습니까? 오늘 35절 - 36절, 38절에 보면 이 바디메오가 취한 세 가지 동사가 있습니다. 

첫 번째, 처음 이 사람의 동작은 앉아서 구걸하는 인생이었습니다.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35절)

두 번째, 이 사람의 동사는 호기심을 갖고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냐? 누가 지나가고 있느냐?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36절)

바디메오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을 고쳤고 귀신들린 자의 귀신을 내어 쫓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내 눈이 좋지 않아 내가 예수님에게 찾아갈 수 없지만, 만약에 예수님이 내 앞을 지나가게 된다면 나는 가만 있지 아니하리라. 나도 예수님을 만나 나도 내 삶의 변화를 경험하고 싶다. 사람이 웅성웅성하니까 물은 것입니다. 전에도 사람이 웅성거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관심을 갖고 난 다음부터 바디메오는 마음속에 기대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겠지요!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누가 지나가느냐? 사람들이 대답합니다.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37절) 
  

세 번째, 그가 한 행동은 외쳐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38절)

우리는 여기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진리 하나를 깨닫게 됩니다. 여러분의 삶의 형편이 지금 바디메오처럼 앉아있을 수밖에 없고 구걸할 수밖에 없고 남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밖에 없는 아주 절대적으로 절망가운데 있는 삶에 있을지라도 여러분 곁을 지나가시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일어나 여러분이 외쳐 소리를 질러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가시는 발걸음을 멈추게 하실 수 있습니다.  

바디메오는 자기 자신의 삶의 현실을 비관만 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고 어느 누구도 도움의 손길을 펼칠 수 없는 그런 절망의 상태였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서 일어났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요? 여러분의 이웃이요? 가족이? 여러분의 친구가? 여러분을 도울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분적이고 한시적입니다. 영구적인 변화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일어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외쳐 부르는 순간 예수님은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여러분 앞에 서 계십니다. 우리는 이 바디메오를 보면서 그가 일어나 예수님을 향하여 울부짖고 외쳤다는 사실에 관심을 갖고자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바디메오의 믿음을 보면서 정말로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바로 바디메오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야말로 정말로 우리가 본 받아야 될 믿음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에 보면 바디메오가 예수님을 육신의 눈으로 본적이 있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전에 만난 적이 있다고 이야기 하지도 않습니다. 전에 예수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해서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만진 적도 없습니다. 음성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향하여 소리 지릅니다. 외쳐댑니다.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믿음은 내가 눈으로 보아야만 내가 손으로 만져야만 내가 귀로 들어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로 참다운 믿음은 들어본 적 없고 본 적 없고 만져본 적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속에 담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후서 5:7절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 하느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행동하지 내가 봤다고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가끔 교인들 가운데 이런 이야기를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내가 예수님 한 번 보기만 하면 예수님이 내게 음성을 들려주기만 하면, 예수님을 내가 만질 수가 있기만 하면 내가 정말로 잘 믿겠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나 예수 봐서 믿는다는 분이 계십니까? 여러분 중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본 적이 있는 분이 계십니까? 신앙생활 40년 했지만 예수님 음성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나는 그 흔한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본 적이 없습니다. 들어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의 마음속에는 이런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 예수, 사람을 살리고 사람에게 질병의 치유를 주고 귀신을 내어 쫓고 그리고 병든 자와 부족한 사람 버림 받은 사람을 일으켜 세워 새 생명을 허락하신 그 예수야 말로 내 삶의 변화를 가져다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는 확신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가졌던 것입니다. 

믿음은 봐야만 만져야만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어린아이지요? 여러분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나는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라고 이야기는 하는데 삶 속에서 예수님이 살아있지 않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머리로만 믿는 것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힘들고 어려운 삶 속에서도 예수님이 내 마음 속에 내 삶에 지금 살아계셔서 언젠가 내 삶을 부활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 이 사람의 믿음이야말로 진정 살아있는 믿음입니다.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본 적 없고 만진 적이 없지만, 예수 앞에 나아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는 예수님이야말로 자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분임을 믿었습니다. 이 바디메오는 예수님과 자기 자신에 대한 아주 분명한 인식을 가졌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디메오는 예수님께 나아가 예수님을 부를 때 뭐라고 불렀습니까?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38절)

두 가지, 예수님에 대해서는 “다윗의 자손 예수여!”라고 불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지금 이 바디메오가 예수님에게 못가도록 막는 군중들은 예수님을 뭐라고 표현했습니까? 오늘 본문 37절에 보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했습니다. 그런데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예수여!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예수를 그저 인간 중에 한 사람, 선한 사람, 종교의 창시자, 또는 성자,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요즘 교회에 보면, 교인들 가운데 아주 희한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냐 하면, 돈도 있습니다. 많이 배웠어요. 직장이나 사업도 아주 좋습니다. 명예도 있고 권력도 있습니다. 다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종교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래서 기독교를 하나의 액세서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가 돈도 있고 다 있는데 교회 나가서 좋은 말 들어서 조금 더 선하게 깨끗하게 살면 더 좋겠다. 그러다가 덤으로 죽어서 천국까지 가면 더 좋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교회 나오는 분들이 계십니다. 혹시 여러분들 가운데 그런 분이 안계십니까? 그런 사람에게 예수는 나사렛 예수입니다. 나사렛에서 태어난 인간 예수, 랍비, 스승 예수지요!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나사렛 예수라고 불렀지만, 바디메오는 예수님을 단순한 나사렛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바디메오에게 있어서 나사렛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후손 가운데 이스라엘 민족을 구할 영원한 왕이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바디메오는 바로 예수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신 구원자 메시야라는 사실을 믿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나와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시면 마음속에 있는 예수가 다윗의 후손 여러분의 구원자 메시여야만 합니다. 주님만이 내 삶을 내 인생을 내 영혼을 구원해 주실 유일한 분이심을 믿고 고백해야만 주님은 여러분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바디메오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무어라고 표현했습니까?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성전에 두 사람이 기도하러 들어갔다. 한 사람은 바리세인인데 이 사람은 성전 안에 들어오자마자 제일 앞으로 와서 손을 들고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금식했고 나는 내 십일조를 반드시 하나님 앞에 드렸고 나는 도적질 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하면서 자기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세리가 있었습니다. 이 세리는 성전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저 문 가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난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이 두 사람의 기도 가운데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겠느냐? 예수님이 질문했습니다. 누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셨을까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누구인지 아십니까? 교만한 사람입니다. 자기만이 가장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가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 자기가 이런 교만한 자를 하나님은 가까이 하시지 않습니다. 바디메오는 자기는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 불쌍합니까? 예수님의 도우심과 위로와 용서가 없으면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하는 자기 자신은 너무너무 더럽고 추한 존재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기도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가 주님께 기도할 수 있다고 한다면 다른 게 없습니다. 예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제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말이 더럽고 몸이 더럽고 생각이 더럽고 행동이 더럽습니다. 이 죄인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 앞에 엎드려 이 죄인을 용서해 달라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주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순간, 주님은 곁에 다가오십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디메오의 외침을 듣고 지나치실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위하여 가시는 분입니다. 어마어마한 사역을 준비하시고 계시는 주님이 이 거지 맹인 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나치시지 않았습니다. 가시던 길을 멈추시고 제자들을 향하여 이야기 하십니다. “데리고 오너라”

예수님은 여러분의 울부짖는 소리와 여러분의 외침, 가슴을 치며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외치는 여러분의 목소리, 예수님은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에도 응답하시는 주님, 그 분은 옛날 바디메오의 외침에 발걸음을 멈추셨듯이 오늘날 여러분의 외침에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십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수도 없이 많은 기도를 드리지만, 그러나 얼마나 많은 기도가 공허한 기도의 소리뿐입니까! 왜 우리의 기도가 공허한 소리고, 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이 되지 않을 까요? 그 이유는 여러 가지 이지만 그 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마음을 감동 감화 시키지 못했습니다. 가슴을 치며 통곡하며 살려달라고 나는 못한다고 나는 죄인이라고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나는 주님의 은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라고 낮아지고 겸손한 가운데 주님을 부를 때,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 이 장애인은 자신의 치유와 영적인 진보를 방해하는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였습니다.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39절)

여러분, 요즘 앉아계십니까? 요즘 절망하십니까? 주님이 이 시간에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외치라고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바디메오가 예수님에게로 갈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바디메오를 꾸짖어 못 가게 하였으나 바디메오는 거기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바디메오는 이 상황이 아니면, 오늘의 이 자리가 아니면 내 생애에 내가 변화되고 치유 받을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올지 모른다고 이런 절대적인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바디메오는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문제가 해결이 되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 외쳐야 합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외침에 주님은 귀를 기울이사 여러분을 가슴에 품고 여러분의 아픈 부위에, 여러분의 상처 난 영혼에 주님의 따뜻한 손을 펼치사 여러분을 치유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이 바디메오의 믿음을 본 받아 주님께 다가와 외침으로 주님이 여러분을 치유해 주시는, 회복시켜 주시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