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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벧전 2: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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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벧전 2:13-25)

     
오늘 본문에는 새상 권력이라는 두 가지 작은 주제, 정부 혹은 통치자의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와 고용주 혹은 상급자의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라는 주제가 나옵니다.  어떤 정부나 정권이 세워지든지 반정부주의는 늘 있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정의롭지 못한 독재정권이나 부도덕한 지도자가 통치하는 정부는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적극적으로는 반대와 물리적인 저항을 받습니다.   

베드로는 모든 권세에 순복하라 하였는데 선한 정부 혹은 정의로운 정권과 권력자에게만 순복하라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역사적인 증거로 보면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때 로마 제국은 폭군 네로 황제가 다스리던 시기였습니다.  더구나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물론 로마 사람들에게 많은 박해를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왕과 관원들에게 순복하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주인들에게 순복하라고 권하는 말은 마치 당시의 노예제도를 인정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녀가 평등하다(갈3:28)  외친 사도 바울의 선언과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을 말하면서 종들은 상전들을 섬기되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엡6:5).   그렇다면 베드로와 바울의 편지들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진리의 말씀일 수 없고 거룩한 백성들에게 주시는 복된 소리일 수도 없습니다.   과연 베드로는 불의한 권력이나 정부에 무조건 협조하고 굴복하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인권을 말살하고 약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인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사람일까요?   이런 질문들이 나옵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물론 바울도‘예’와 ‘아니오’로 단순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악한 제도를 절대로 찬성하고 두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노예제도를 개혁하고 반정부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정권을 세우라고 독려하지도 않습니다.  사회 문제 해결보다는 하나님은 이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계실까?  예수 그리스도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먼저 생각하고 주께서 보여주신 삶의 자세와 그분이 걸으셨던 발자취를 따라 걸으라고 권합니다.  이처럼 불의하고 타락한 세상을 나그네와 행인으로 살아가는 천국시민은 어떤 그리스도인으로 행동해야 할 것인가 그 원리를 제시합니다.   

오늘 본문에 ‘순복하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왕과 방백들에게 순복하라 하였고, 사환들은 주인에게 순복하라고 하였습니다.   13절의 ‘주를 위하여’라는 말씀과, 19절의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라는 말씀은 인간 세상에 세워진 모든 권세에 그리스도인이 어떤 자세로 순복해야 할 것인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21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는 말씀을 오늘의 주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핵심 구절로 삼아봅시다.  말씀의 촛점을 불완전한 현실 상황이 아니라 완전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맞추어 예수께서 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순복하자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국가의 공권력과 일터에서는 고용주 혹은 상급자의 권세를 대면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권위들 앞에 그리스도인답게 순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다는 것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본받는 나그네와 행인의 정신이며, 하나님의 제사장과 하나님 나라의 시민다운 긍지를 가지고 사는 자세입니다.  지난 시간에 읽은2장 11절, 12절은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원리에 대한 서론의 말씀이었습니다.  

첫째,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며 나의 정결한 영혼을 위하여 구별된 성도의 삶을 사는 자세입니다.   둘째, 이방인들 사이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우리의 선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별된 성도의 삶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전파되도록 하는 자세입니다.   이것이 나그네와 행인의 삶이며, 하나님 나라 시민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뿌리심을 얻기 위하여 택함 받은 사람들이며 그의 피로 구원받은 자녀들입니다.  순종하는  자녀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따라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순종하는 자녀들에게 완전한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요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세상에 인간의 몸으로 오셨을 때 그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으신 분일 뿐 아니라 인간의 권세 아래 다스림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헤롯 왕이 내린 유아살해 명령을 피하여 부모의 품에 안겨 애굽으로 피신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분노한 사람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들 때 그 자리를 피하여 떠나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이며 자신이 곧 성전이라 하셨던 그분이 성전을 출입하실 때 성전세를 꼬박꼬박 내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으로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고 물을 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심으로 로마 정부의 통치 아래 사는 시민들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 대답하셨습니다.   

끝내는 유대인의 제사장들이 보낸 군병들에게 체포되셨고, 대제사장들에게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심문을 당하셨으며, 빌라도 총독 앞에서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그 권력의 정당하고 부당함을 떠나 인간의 권세 앞에서 아무 죄도 없는 정의로운 하나님의 아들이 갖은 모욕과 수치를 묵묵히 당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검을 빼어 대제사장의 하인 말고의 귀를 베었을 때 책망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26:52-54)하셨습니다.  부당한 폭력으로 체포하고 고문하며 구타하는 세상 권세 앞에 하나님의 아들은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처럼 묵묵히 자신의 몸을 맡기셨습니다.    

그 고난 중에 아무 변명이나 악담이나 저주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본을 보이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순복하는 것은 나약하거나 비굴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을 따르기 때문입니다.   선을 행하다가 미움을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한다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이지만 도적질하고 살인하며 사기와 공갈과 성추행과 폭력범으로 고소를 당하며 형벌을 받는다면 어찌 자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방을 받습니까?   복음이 악을 가르치기 때문입니까?    예수께서 악행을 권장하셨습니까?   주를 믿는 사람들이 복음을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로 나의 정욕을 만족시키고 악한 행실을 덮는 구실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을 존중하고 형제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다운 삶입니다.   

베드로는 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정치 권력으로부터 핍박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총독과 왕들은 로마 황제의 명을 따라 백성들을 다스리는 방백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기독교를 비방하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로마 정권에 동조하는 사람이었겠습니까?   베드로나 바울이 자기 시대의 세상 권력이 타락하고 불의한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의에 저항하되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맡기며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주께서 가신 길을 따라갔습니다.   인간 사회에 세워진 모든 제도를 순복하되 ‘주를 위하여’ 순복하라는 말씀에 촛점을 둡시다.     

베드로와 동일한 시기에 활동했던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세상 권력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를 좀더 상세하게 말씀하였습니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이때 권세는 물론 선하고 정의로운 힘입니다.   그러나 세상 권력이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른 적이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모든 백성은 하나님의 대행자로 세상을 다스리고 질서를 주관하는 왕에게 순복함으로 하나님께 순복합니다.  누구든지 이 권세에 저항하고 거스리는 사람은 고된 심판이 따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관원들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사람은 경찰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지만 교통신호를 위반한 사람은 뒤따라오는 경찰차를 보면 혹시 나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닐까 하여 경찰차가 지나갈 때까지 마음이 편안하지 못합니다.   불법을 행할 때 권세자들이 두려워 보입니다.  그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13장에서,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는 이유는 법을 위반하여 받을 벌이 두렵기  때문만이 아니라 나의 양심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국가에 세금을 바쳐야 할 시민이 탈세하였을 때 국법으로 심판을 받는 것을 두려운 줄 알고 순복해야 하지만 또한 나의 선한 양심에 거리낌이 되기 때문에 세금을 내야 합니다.  모든 공세와 국세를 정당하게 바치고 두려워 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순복하는 시민의 정당한 자세입니다.   

국가의 공권력에 대하여 순복함으로 국민의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말한 베드로는 주인의 집에서 종살이 하는 사환들도 모든 일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의 권세에 순복하라고 권합니다.  순복하되 선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 뿐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복해야 합니다.  성실하게 일했고 아무 잘못이 없는데 주인에게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생각하며 슬픔을 참으면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말은 그 까다로운 주인을 세우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의 권위에 순복함입니다.  애매하게 고난을 받을 때 분노와 복수의 불길이 타오르지만 공의로운 하나님을 의식하며 슬픔을 참는 것이 신앙의 비결입니다.

‘보디발의 가정총무로 일하던 요셉이 얼마나 성실한 일군이었습니까?   그런데 주인집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것 때문에 미움을 받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요셉은 감옥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기다립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시도해 보지도 않고 바보처럼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너그러움이며 정의라는 말이 아닙니다.  강력한 힘 앞에 도무지 맞설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며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일입니다. ‘억울하고 힘들지? 그렇지만 잘 견디고 있다. 훌륭하다!’라고 칭찬하십니다.

예수께서 바로 이런 점에서 우리의 본이 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심으로 본을 보이셨고 그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본을 보이셨습니까?   그리스도는 그 어떤 죄를 범하지도 않았고, 그 입에 거짓이 없었으며, 욕을 당하였지만 대항하여 똑같은 방식으로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았지만 그들을 위협하지도 않으셨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결국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심은 우리로 하여금 죄를 위하여 살지 않고 의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던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그리스도께 돌아왔습니다.  

베드로가 그리고 같은 시대에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바울이 성도들에게 권하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그분이 걸으신 발자취를 따라가라는 것입니다.  정부에 대한 무력충돌이나 악한 주인에 대한 보복과 물리적인 대항을 가르치지 않고 선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오직 선한 행실로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불의에 동조하고 협력하시지도 않았지만 세상 정권이나 인간 권력에 맞서 투쟁하는 것을 사역의 중심으로 삼지 않으셨습니다.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바리새인 등 유대인의 불의한 권세자들을 향하여 무서운 책망과 경고의 말씀을 거침없이 쏟아내셨지만 만왕의 왕이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권력자들 앞에 힘없는 범인들처럼 온갖 비방과 조롱을 당하셨습니다.  유대인 지도자들은 혹시라도 나사렛 예수가 제자들과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들의 권력에 항거하거나 로마 정부를 타도하는 물리적 혁명을 일으킬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그들이 염려하던 일과는 거리가 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 나라와 평화는 그들이 오해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사도들 역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의 공회나 대제사장의 종교권력과 맞서 물리적 힘으로 싸우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핍박을 당할 때 고난을 기쁘게 받았고 다른 곳으로 피신을 하되 악한 권력을 향해 동일한 방식으로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로마를 비롯하여 로마 제국 전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전하고 그 말씀대로 살때 온갖 핍박과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악한 정권 아래 순교의 제물들이 될지언정 칼과 창으로 로마 제국과 맞서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약화되었고 기독교인들은 나약하고 비겁한 종교인들이었으며 그 결과 교회가 지상에서 사라졌습니까?   아니, 오히려 순교자의 피가 흘린 곳에 더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났고 하나님의 나라가 왕성하게 자라갔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방식입니다.   

베드로가 아시아 여러 곳에 흩어진 나그네들, 믿음의 형제들에게 당부한 말씀은 오늘날도 하늘에 산 소망을 둔 거듭난 하늘나라 시민들에게 주시는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세상의 악한 권력과 나라는 잠시 있다가 사라질 임시적이지만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야 할 진리와 그 나라는 영원하며 변함이 없습니다.   이중국적을 가진 천국시민은 임시적으로 머무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법도에 순복해야 합니다.   

만왕의 왕이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세상의 군왕들을 세우기도 하시고 폐하기도 하십니다.  선한 지도자가 하나님의 뜻을 선하게 대행하는가 하면 악한 지도자들이 권력을 오용하고 남용하여 그 뜻을 거스리기도 합니다.   정의로운 국가와 권력은 즐겁게 찬성할 수 있지만 불의한 국가와 권력은 용납할 수 없는 갈등이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어떻게 불의한 권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순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악한 권력자들일지라도 하나님의 허락없이 나온 것이 아니기에 그들을 통해 유지되는 사회 질서에 순복할 의무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악한 정부와 권력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악한 권력이 무정부 상태보다는 사회질서를 효과적으로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통해 더 큰 악을 방지하고 고난 당하는 약자들을 보호하며 연단하십니다.   비록 악한 임금과 방백들일지라도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칭찬하고 상을 줍니다.  세상이 악하고 내일에 대한 소망이 없으니 오늘을 편하게 살기 위하여 악한 권력에 머리를 조아리고 함께 죄악을 행하는 것이 자유인의 참 자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는 주 안에서 누리는 양심의 자유이며 죄와 죄의 형벌이 주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나를 억울하게 만들고 괴롭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용서하고 도리어 복을 빌 수 있는 자유입니다.   악이 비록 왕성할지라도 진리는 더욱 강합니다.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지만 죄악에 동참하지 않고 견디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자들입니다.  악한 정부와 권력은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엄한 책망과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위하여 기도할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선하고 정의로운 사람들만 있었을까요?  선하고 악한 것을 떠나 모든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다른 정권을 위하여, 내가 찬성할 수 없는 통치이념을 가진 정부를 위하여 기도해야 할까요? 성경의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부정하고 부도덕한 정권이나 통치자가 더 견고하고 왕성하기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청지기로 세움을 받은 그들이 하나님의 통치 이념을 깨닫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정직하고 공의로운 정치를 펼쳐나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평화로운 가운데 하나님을 예배하고 경건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하였습니다(딤전2:1-4). 

바울과 베드로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황제와 그의 방백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했으며, 독재정권 하에 신음하던 백성들은 그 악한 정권을 위하여 기도해야 하고 오늘 우리 기독인들은 현 정부와 지도자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인간의 모든 제도를 세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기도함으로 순복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을 행하며 국가의 공정한 질서에 순복할 때 하나님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 십자가 복음과 교회,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잘 알지 못하고 비방하는 말을 막아주십니다.   

선하고 너그러운 상전 뿐 아니라 나를 괴롭히며 까다롭게 대하는 상전에게도 두려운 마음으로 순복하는 것이 성경이 권하는 천국시민의 자세입니다.  주인에게 떳떳하지 못한 죄가 있어 매를 맞으면서 이 다음에 복수하리라 앙심을 품고 이를 악물고 참는다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상급자의 부당한 대우와 비열한 행동 때문에 괴롬을 당하는 분이 있습니까?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길이 참아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기회로 삼기 바랍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며 도리어 복을 빌어주는 선한 행실로(3:8,9)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치고 비방하는 말을 막을 수 있다고 하십니다.  정욕이 이끄는대로 따라가면 함께 더러움에 빠지고 말지만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의로운 백성으로 살게 됩니다.   

이것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으로부터 불러내셨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시려고 우리를 불러내어 당신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전에 우리가 주님을 알지 못할 때는 나의 자유를 남용하여 세상의 악한 것들을 사랑하고 정욕을 만족시키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길을 잃은 양처럼 거친 세상을 헤매던 우리에게 목자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나를 부르시는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에게로 모였으며 우리의 감독이신 주님에게 돌아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진정한 임금과 지도자는 바로 양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주를 위하여, 하나님을 생각하며 오늘 여러분이 몸 담고 있는 세상의 권세들에게 순복함으로 주님의 제자된 책임과 의무를 다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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