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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에 관한 좀 더 깊은 고찰(히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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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우리의 삶을 믿음의 경주라고 부릅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히 12:1). 이 경주는 단거리가 아니라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 마라톤입니다. 우리는 경주를 이기고 코스를 완주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원의 산책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지는 긴 믿음의 전투입니다. 이 전투의 대표 주자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 만나 회심한 후부터 수십 년 동안 문자 그대로 산전수전을 겪었습니다. 서기 68~69년에 이를 때까지 바울은 거의 모든 일을 다 목격했고, 30년 이상 해 온 자신의 전도 사역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가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중요한 지시를 편지로 써 보냈던 것도 이 시점입니다. 
바울은 몇 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었으며, 아마 감옥에서나 짧은 석방 기간에 편지를 썼을 것입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확실한 명령을 전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딤전 6:12). 
바울이 디모데에게 흠 없이 지키라고 했던 첫 번째 명령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교훈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두 번째 고별 편지를 쓸 때 자신의 때가 왔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순교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디모데후서 4장6절에서 이를 분명히 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30년 이상 주님을 섬겨온 삶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그의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랜 싸움이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 명령은 지금 우리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믿음의 싸움을 싸우지 않는다면 유일한 대안은 마귀와 평화조약을 맺어 타협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처럼 우리도 사실은 싸우는 것 외에 다른 대책이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소위 “믿음장”으로 불리는 히 11장의 전반부입니다. 여기에 보면 성경기자는 믿음이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전적인 신뢰로서 보이지 않는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확신하는 것이며(1절), 또한 하나님의 권능을 보지 못하고도 인정하는 것(3절)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선진들은 바로 이 사실을 이미 생활 가운데서 보여줌으로써 영생과 구원의 약속을 성취받았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2절). 그들은 모두 선한 싸움을 치열하게 싸웠던 하나님의 군사들이었습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이 싸움을 이기려면 먼저 믿음에 관해 좀 더 깊이 알아야겠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과연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믿음에 관하여 자주 놓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자, 성경 속의 믿음의 정원으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1. 우리가 믿어야 할 두 가지 사실

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1) 먼저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 대한 성경적 정의를 찾아보기 전에 먼저 본절의 의미에 대해 살펴봅시다. 하나님은 ‘이전에 계신 분’ 정도로 알면 안 됩니다. 그분은 ‘지금’ 이나 ‘앞으로 계실’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현존하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계십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믿음에 구비되어야 할 첫 번째 요소는 바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믿음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는 무신론자입니다. 이 사람들은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데, 독일의 철학자 니체(F.W. Nietzsche)와 프랑스의 실존주의 철학자 사르트르(J.P. Sartre)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처럼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들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이 인간답게 살려고 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현존에 대한 신뢰이며, 그 구체적인 증거가 외경심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외경심을 ‘지혜의 근본’(잠 1:7)이라 가르칩니다. 

2)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분을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주님이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셔서 자기를 찾는 것에 대한 보답을 반드시 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 없이는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 그분의 존재를 믿는 문제 못지 않게 이것 또한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서 우리의 시간을 엉뚱한 데에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면서 세상 것에 대한 상실감으로 고통받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더 보람있고 풍성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일 보다 더 유익한 일은 결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는 것은 가치로 따질 수 없는 것들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복이 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강물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입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이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을 열심히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심을 확신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믿어야 할 이 두 가지 사실을 다시 한번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2. 믿음은 실상이요 증거이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이제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정의를 살펴봅시다. 많은 분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믿음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믿음과 유사하지만 믿음이 아닌 것에는 ‘소망’과 ‘지식’이 있습니다. 
‘소망’은 좋은 것이고 진정한 믿음으로 나가는 발걸음일 경우가 많지만, 믿음과 혼동되어서는 안 됩니다. 소망은 진정한 믿음에는 있을 수 없는 불확실한 태도를 동반합니다. 
‘지식’은 믿음과 섞이기 쉽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믿기 전에 무언가를 보고 듣고 느끼거나 알게 되기를 기다린다면, 여러분은 믿음으로가 아니라 지식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본문 1절은 믿음에 대한 성경의 정의를 보여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정의는 “믿음은 ...” 이라는 단순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믿음은 미래시제로는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늘 현재시제입니다. 믿음은 현재시제로 작용하지만, 이미 일어났고 과거에 완성된 어떤 일에 근거합니다. 

본 서신이 기록된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당시 상황은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자들이 유대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엄청난 박해를 피하기 어려운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본서 기자는 이들에게 죽음도 불사하면서 믿음을 지켜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은 융통성이 없거나 강압적인 권면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값지고 가장 아름다운 것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귀한 권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1절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증거인 믿음으로 인하여 얻는 최고의 대가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세상의 안락입니까 아니면 인생을 즐기는 것입니까? 최고의 대가는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여기 ‘실상’(substance)이란 단어는 ‘확신’이나 ‘자신감’으로 번역됩니다. 원문의 ‘휘포스타시스’는 문자적으로 ‘권위 아래에 있음’을 뜻하는데, 1세기에는 땅이나 소유에 확실한 권리를 부여하는 법정문서들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권리증서’라고 부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권리증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을 구매하는 것을 예로 들어봅시다. 여러분이 좋은 집을 발견하고 그 집을 사겠다고 제안하더라도 법적인 상황이 정리될 동안 그 집은 아직 여러분의 집은 아닙니다. 누군가 “새 집을 사셨어요?” 라고 물으면 아직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법적 서류에 서명하고 계약이 체결되어 권리증서를 받는 과정이 마무리되면 이제 여러분은 당당하게 “네, 제게 새 집이 생겼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여러분은 단지 새집을 갖고 싶은 꿈을 지니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이 손에 지닌 권리증서는 여러분이 그 집의 소유자요 그 집을 원하는 대로 꾸밀 수 있다는 확신을 부여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권리증서입니다. 그것은 꿈과 갈망과 희망에서 출발해 영적 세계에서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것의 권리증서와 소유권을 가지는 데까지 이르게 합니다. 

2)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여기 ‘증거’(헬,엘렉코스)는 ‘설득력 있는 증언’을 뜻합니다. 이 단어도 법률용어로서, 지방검찰관이 용의자를 기소하고자 할 때 배심원들 앞에서 사건에 대한 자신의 증거를 제시하고 그들을 설득할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배심원들은 검사의 증거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 되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피고인에게 유죄평결을 내립니다. 마치 그들의 눈으로 직접 범죄를 목격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곳에 간 적도 없고 아무것도 보지 못해도 그들은 마치 목격자처럼 행동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믿음은 우리에게 이런 영향을 미칩니다. 설령 우리가 전혀 눈으로 보지 못한 상황이라 해도 믿음은 우리가 이를 확실한 사실로 바라보도록 우리를 설득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우리는 검사의 증언을 듣고 난 뒤 설득된 배심원과 동일한 확신과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법률상의 권리증서인 땅문서는 우리가 그 토지를 실제로 보지 못했다 해도 그 땅이 그곳에 실제로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이미 천국의 영역에서는 존재하지만 아직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 믿음을 굳게 붙들 때 마침내 그 믿음은 현실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위대한 덕목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3. 믿음은 창조할 수 없고 다만 얻을 수 있을 뿐이다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에 관해 좀더 깊은 생각을 하는 성도라면 우리가 믿음을 창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은 사물(things)의 실상이요 사물의 증거이며, 꿈이나 상상이 아니라는 데 주목하십시오. ‘바라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에서 ‘것들’(사물)은 가시적인 현실을 말합니다. 그들이 물질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실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믿음으로’ 창조하려 드는 잘못을 범합니다. 믿음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창조할 수 없고 다만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그림을 그린다고 존재하지 않는 땅의 진짜 법적 권리증서를 갖게 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위조에 해당됩니다. 가짜 권리증서를 만든다고 존재하지 않는 땅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있지도 않은 일을 믿음으로 붙들려고 애쓰는 것은 ‘추측’일 뿐입니다. 
영적 세계는 상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만일 믿음으로 어떤 일이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자연 세계에서 실현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영적 세계에서는 틀림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영적인 영역의 일들은 당연히 볼 수 없지만, 실제로는 이 물질세계에서 보는 어떤 것들보다 더 실제적이고 영원합니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8). 
우리가 다루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입니다. 진정한 믿음은 우리가 이 자연계에서 손으로 물 한 잔 움켜쥐는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영적 영역의 사물들을 파악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분의 존재로부터 그분의 말씀이라 불리는 창조의 능력이 흘러나옵니다. 하나님이 어떤 구체적인 일을 말씀하시면 이는 하나님의 일부인 까닭에 바로 하나님의 실체를 담습니다. 그분이 말씀으로 무언가를 창조하신다면 이는 영적 세계에서 생명을 얻고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려지면 이는 생명을 재생산하여 존재케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를 향하여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 구절이 어떤 시제로 기록되었는지 주목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방금 신자가 되었다고 합시다. 이 사람은 알콜 중독에 세상을 향해 불같은 원망을 쏟아내는 사람입니다.그의 삶은 모든 면에서 엉망입니다. 여러분은 그를 바라보며 “자, 그리스도 안에 새로운 피조물은 대체 어디 있습니까?”
그 대답은 ‘이 새로운 피조물이 영의 영역에 이미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지상에서 이 사람이 살아가는 삶에서는 아직 나타나지 않는다 해도 하늘의 영역에서는 영광스러운 새 삶이 이미 존재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롬 4:16-17).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늙었고 자녀가 없으며, 사라 역시 경수가 끊어진 지 오래일 때 그들에게 수많은 자손을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때 그들에게는 많은 민족의 조상은 고사하고 한 명의 자녀라도 갖는 것도 가망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이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떠했습니까?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아브라함이 믿은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분’ 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언가를 만드는 데 있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저에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고 말해도 하나님은 그 때문에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취하셔서 말씀만 하시면 당장 생겨납니다. 주님은 어떤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뭔가 약간은 필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어떤 불량자의 삶에 거룩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해도 주님은 그것을 기어이 만들어 내실 분이십니다. 
비록 여러분이 심각한 문제아였다 해도 그분은 말씀으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나타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살아오는 내내 학대를 받았거나 남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운 끔찍한 삶의 배경을 갖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평생 쓸모 없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라고 멸시받아 왔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도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내가 너를 변화시켜 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하겠다.”


[나오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과거 구약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은 일점 일획이라도 어김 없이 그대로 이루져 왔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민 23:19=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니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고 인생이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하지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하지 않으시랴!”

에덴 동산에서 아담 하와에게 주셨던 말씀, 노아에게 주신 언약의 말씀, 아브라함에게, 그리고 족장들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그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과 선지자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 그대로 성취되었고, 이제도 이루어져가고 있습니다. 
신약의 사도들을 통해, 그리고 특히 요한 계시록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종말의 사건들에 대한 말씀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착착 진행되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약속대로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을 보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약속대로 이제 속히 다시 오셔서 그리스도 왕국을 완성하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이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 다음 주님이 이미 말씀하신 것은 우리의 삶에 물질로 된 실체가 되고, 우리는 믿음의 행동을 통해 말씀으로 이야기 하신 부분을 경험합니다. 
“선한 싸움의 터”로 부름받은 그리스도의 군사 여러분!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이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대구서현교회,박순오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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