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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라의 고통에서 극복하는 길 (출 15: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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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고통에서 극복하는 길 (출 15:22-27)


금년에 제가 울산지역 영남신학대학교 동문회 서기를 맡는 바람에 이런 저런 공문 수발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수요일에 동문들에게 25일 총동문 체육대회 참석을 독려하는 문자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자를 보내고 곧 이어서 어느 집사님으로부터 한 통의 문자를 받았습니다.
"목사님, 저는 동문이 아닌데 저도 참석해야 하나요? ㅎㅎㅎ"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싶어서 생각을 하다가 제가 두 가지 큰 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전혀 관련이 없는 많은 사람들에게 문자를 보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가 문자를 보내기 위해서 사이트에 돈을 지급하고 알을 샀는데, 낭비하지 말아야 할 돈을 날려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의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문자를 받아든 분들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목사님께서 왜 이런 문자를 나에게 보냈느냐?  의도가 무엇이냐?"라고 하는 항의성 내지는 부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반면에 어떤 분들은 우리 목사님께서 실수를 하셔서 알을 날려 버렸다면서 실수를 하셨다고 그냥 한 번 웃어버리는 긍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인생에서는 일어난 사건보다 그 사건에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똑같은 사건이지만 그 사건에 반응하는 것은 결국 두 가지로 귀결됩니다.  긍정적인 반응과 부정적인 반응입니다.  모름지기 모든 믿음의 사람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 언제나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반응하셔야 합니다.  마음의 반응, 그 마음의 결정은 결국에는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에게는 운명은 없습니다.  

믿는 사람에게는 팔자도 없습니다.  다만 때마다 시간마다 지난날은 잘못되었다고 할지라도 오늘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고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해방할 수 있는 마음의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사는 길이 있습니다.  이 시간 하나님의 영으로 다시 권능의 채움을 받으십시오.  무엇보다 먼저 눈앞에 있는 현실의 장애물에 얽매이지 말고,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믿음의 큰 눈들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무엇이 평범한 사람의 인생을 그토록 값지게 만들까요?  목회를 하면서 보면 낙심과 불행과 고난 가운데 있던 그런 사람들이 어느 날 갑자기 아주 값비싼 인생의 삶으로 전환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무엇이 저 사람의 생애를 저토록 값지게 만들었을까?  자유입니다.  갑자기 나타나는 모든 일체의 구속과 속박으로부터 흘러 넘치고 이길 수 있는 삶의 용솟음치는 자유의 능력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찾는 백성을 모든 속박에서 자유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믿는 자녀들에게 모든 편견과 모든 오해와 모든 선입관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모든 질병과 병마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모든 포로된 환경으로부터 자유하십시오.  모든 굴레로부터 자유하십시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영어 표현 가운데 'happiness short-lived'라는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단명하다' 혹은 '오래 가지 못한다'라는 말로 번역될 수가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행복 자체보다도 행복을 느끼는 인간의 감정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를 들여다 볼 것 같으면 그들이 일종의 행복의 절정감을 맛보았던 때가 있었다면 그것은 아마도 그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갈 때가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죽음의 절망 앞에 서 있던 그 백성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지고 갈라진 그 바다를 마치 육지처럼 건너가던 그 때의 그 스릴과 감동이 어떠했을까요?  그리고 그 백성들이 바다를 거의 다 건너갔을 때 바다는 다시 닫히고 그들을 추격하던 바로의 수많은 군대들이 바다 속에 수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홍해를 지나 광야로 발을 내딛는 그 순간의 감동이 얼마나 대단했을까요?

우리가 본문이 포함되어 있는 출애굽기 1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다를 건너자마자 그들의 마음에는 거대한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15장 1절을 보면 그들의 감동에 가득한 찬양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노래했습니다.  그들은 춤을 추었습니다.  그들은 축제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노래와 춤사위가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딱 사흘 갔습니다.  사흘 후에 모든 것은 다시 역전이 됩니다.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22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무엇이 문제였습니까?  물이 문제였습니다.  사막 길을 걷다보면 사막에서 가장 절박한 것이 물입니다.  그래서 항상 물을 가지고 다닙니다.  그런데 사흘 동안 물을 마시지 못한 그 백성들의 타는 목마름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백성들은 마침내 원망하기 시작합니다.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원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거기에서 우물물을 발견하게 됩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그런데 막상 물을 마실려고 하니까 그 물은 쓴 물이었습니다.  더러 어떤 사람들은 이미 그 물을 마시고 다시 토해 내고 병들어 눕기 시작합니다.  이런 쓴 고통의 경험을 안겨다 주었던 바로 그 장소가 '마라'라는 곳이었습니다.

본문 23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여기에서 '마라'라는 말은 '쓴 것', '쓴 맛'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bitterness', '쓰디쓴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넜습니다.  건넌 후에 그들은 남동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사흘 길을 여행하게 됩니다.  거의 2백만에 가까운 수많은 대 인구의 이동을 고려하면 그들이 하루에 걸어야 얼마나 걷겠습니까?  많이 걸어야 20km일 것입니다.  사흘 길을 걸었으니까 아마도 60km 내지는 75km정도 걸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 마라라고 하는 장소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지 순례를 하면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버스를 타고 1시간쯤 가다보면 수에즈 운하에 도착하게 됩니다.  수에즈 운하의 해저 터널을 통과해서 남쪽으로 약 15km 정도를 내려가면 대추 야자나무가 무성한 한 오아시스 마을에 도착하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 전승에 의하면 이 장소가 성경의 마라라고 하는 지명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 장소를 가리켜서 '아윤 무사'(Ayun musa), '모세의 우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혹은 전통적으로 이 지역을 '아인 호와라'(Ayn Howara)라는 지명으로 그 동안 알려져 왔습니다.  이 곳에는 지금도 우물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우물의 물들은 바다에서 멀지 않은 가까운 곳이어서 아주 쓰고 짜서 지금도 마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마라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쓰디쓴 고통 속에 준비되지 못한 채로 내 던지움을 받는 그런 가슴 아픈 경험이 인생의 자리에 도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럴 때 우리의 육신에서 나오는 고백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우리는 이런 고백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도처에 이렇게 고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구나."

어느 날 준비되지 못한 채로 저와 여러분의 인생의 행로에서 이런 마라의 자리에 도달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대로 그 고통의 자리에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인생 마라의 고통을 극복하고 일어나 다시 믿음의 여정을 계속하셔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생의 마라의 자리에서 일어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시도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 마라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기도로 주께 나아와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쓰디쓴 고통에 직면한 이 시점에서 주의 백성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기도 말고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 백성들은 먼저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 백성들이 먼저 한 일은 원망이었습니다.

본문 2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본문을 보십시오.  백성들은 원망했습니다.  그런데 이 백성을 인도하고 있던 지도자인 모세는 무엇을 했습니까?  다음 절인 25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어느 날 갑자기 내 인생을 향해 고통이 덮쳐올 때 여러분은 원망하십니까, 아니면 기도하십니까?  원망 대신에 기도하는 사람이 바로 지도자입니다.  그가 바로 성경적인 지도자의 모습입니다.  누구나 다 원망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가 성경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지도자라면 그는 엎드려 기도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원망은 상황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원망은 우리로 하여금 이 상황을 돌파하는데 전혀 어떤 도움도 줄 수가 없습니다.  원망은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원망은 한 마디로 백해무익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문제 해결의 시작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면 상황은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하면 문제는 해결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고통이 우리의 삶에 다가올 때 우리는 원망하기 보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불평하기 보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염려하기 보다 기도하셔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지도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원망은 누구나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망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가 아닙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은 하나님이 쓰시는 리더십의 자리에서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모세인들 왜 원망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원망하는 대신에 그 문제를 끌어안고 엎드려 주님께 부르짖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한다는 것이 그냥 부르짖기만 하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어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주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 한국 교회의 성도들은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도, 간구하는 기도에는 상당히 익숙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국 교회의 성도들에게 익숙하지 못한 기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듣는 기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기도한다는 것은 주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지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부르짖어 구하기는 하지만 그 다음에 들으려고 하는 삶의 여유를 가지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르짖으십시오.  그러나 부르짖은 이후에 잠시 침묵의 시간을 반드시 가지십시오.  그리고 좀 들어보십시오.  주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를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있는지를 들으십시오.  들어야 거기서 해결책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소리질러 부르짖어 충분히 기도했거든 이제 침묵 속에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기다려 보십시오.  그 침묵 속에 어떤 생각이 떠오르십니까?  우리는 그 떠오르는 생각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모세의 기도의 상황을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본문 25절을 다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기도하던 모세에게 한 나무가 보였습니다.  사실 성경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그 나무를 보여주셨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그 나무가 보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를 붙들고 물에 던져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쓴 물이 단물로 변했다고 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아마도 이 나무가 그 우물물의 해독제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모세가 기도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 해답이 기도와 함께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시지 못할 쓴 물에 대한 해답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을 잘 보십시오.  모세가 기도하기 전에는 해결책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기도가 진행되면서 그 해결책이 그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해결책, 기도하기 전에는 막막했던 미래, 그런데 주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해결책이 보여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앞에 고통의 장면이 펼쳐질 때 그냥 원망만 하십니까, 아니면 엎드려 기도하십니까?  그리고 기도하면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니까?  주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 것이 보이십니까?  기도하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그 해결의 단서가 기도하면서 떠오르기 시작하면서 모든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쓴 물을 단 물로 변화시킨 하나님의 능력, 이제 상황은 바뀌어지고 있습니다.  환경은 치유되고 있습니다.  기도가 응답된 것입니다.  동일한 응답의 역사가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의 장에도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원망하는 대신에, 불평하는 대신에 우리의 원망과 불평을 그치고 우리에게 닥친 그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와 엎드리십시오.  참으로 주 앞에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러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상황은 달라질 것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라의 인생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 두 번째는, 말씀에 대한 순종을 결단하셔야 합니다.

마라의 쓴 물이 변하여 단 물이 된 이후에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25절의 하반부를 주목하십시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롭게 율례를 주십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을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왜 이 시점에서 말씀을 주셨습니까?  이어지는 26절의 말씀을 주목하십시오.  본문 26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키라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시점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삼스럽게 말씀을 주시고, 그리고 말씀에 대한 순종을 요구하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주 풍족했던 고센땅을 떠나서 광야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습니다.  왜 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센땅을 떠나간 이유, 그리고 그들이 광야를 행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순종의 행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종의 행진이 가져왔던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순종의 결과로 홍해 바다 앞에서는 물에 빠져 죽을 뻔했습니다.  마라의 땅에서는 목말라 죽을 뻔했습니다.  보십시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은 어떤 생각이었겠습니까?  순종해서 내게 유익이 무엇인가?  계속해서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았자 별로가 아닌가?  이런 생각이 틀림없이 그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이 마라의 기적을 통해서 쓴 물을 단물로 변화시켜 주신 다음에 하나님이 다시 그 백성들에게 율례와 법도를 베풀어주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본문 25절 마지막 대목을 보면 우리는 중요한 단어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것이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순종하겠느냐는 겁니다.  너희들이 순종함으로써 순종의 길을 걷다가 어려움을 당해도 그래도 변함없이 순종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반드시 만사형통하는 길만은 아닙니다.  찬송가는 만사형통을 말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의 경험과도 다를 수가 있습니다.  순종했는데 오히려 상황은 악화될 수 있습니다.  순종했는데 삶의 길은 더욱 어려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말씀을 주십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순종하다가 어려움을 당했지만 이 말씀이 진리라고 믿는 것입니다.  나를 따라오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고 믿는다면 그래도 순종하겠느냐는 겁니다.  바로 이 시험인 것입니다.  순종의 길에서 어려움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래도 변함없이 나를 따르겠느냐?  변함없이 순종하겠느냐?  이 순종의 시험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험은 왜 주어집니까?  저와 여러분은 학교 다니던 학창시절에 참으로 시험을 많이 치렀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내가 학생 시절에 시험 때가 가까워오면 나는 가슴이 설레이면서 시험이 좋아서 너무너무 시험을 기다렸다.  이런 분은 한 번 손을 들어보십시오.  질문을 하나 더 하겠습니다.  이 고통스러운 시험, 이것은 우리들의 교육의 시스템에서 아예 없어져야 한다고 확신하시는 분은 손을 번쩍 들어보십시오.

그렇다면 여러분은 저에게 두 가지를 동의하신 것입니다.  아무도 시험을 즐거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필요한 것입니다.  시험은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시험에 직면했을 때 그 시험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보완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성숙입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발전인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의 진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험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길에는 홍해도 필요하고, 마라도 필요한 것입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 다시 주의 백성들을 연단하시기 위해서 시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말씀을 의탁하고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순종의 걸음으로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제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살기를 결단한다면, 그리고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기로 주님 앞에 고백한다면 주께서 무엇을 언약하십니까?
26절 하반부입니다.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너희가 정말 순종하고 산다면 너희들의 인생과 너희들의 건강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니 설혹 질병에 걸리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호와 라파,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는 겁니다.  그 하나님께서 고쳐주신다는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그분은 그분의 치료의 능력을 그 백성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마라의 쓴 물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나뭇가지를 던졌을 때 그 쓴 물이 변하여 단물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치유입니다.  환경이 치유된 것입니다.  상황이 치유된 것입니다.  그들은 치유의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 치유하시는 하나님, 전능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열악해도, 환경이 불편해도 무엇을 염려하시겠습니까?  무엇을 걱정하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풍성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건강관리도 중요하고, 운동도 중요하고 적절한 보약을 먹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날마다 순종하며 사는 훈련입니다.  그래서 잠언 기자는 3장 1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주시고 싶어하셨던 이 말씀을 붙들고 살라는 것입니다.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8절에서 이런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를 윤택하게 하리라."  여기에서 이것이 무엇입니까?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몸에 약이 된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비타민을 꼬박꼬박 찾아 드시는 신사숙녀 여러분, 비타민만 챙기지 마시고 구약과 신약도 챙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이 건강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약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이 예방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날마다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의 시간이 중요하고, QT가 중요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의 마라를 극복하는 비밀은 부르짖어 기도하고,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그 자리가 이 고통을 극복하는 삶의 비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인생 마라의 고통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까?
세 번째로, 믿음의 행진을 계속하셔야 합니다.

믿음으로 앞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가셔야 합니다.
많은 경우, 우리들이 인생의 시련의 장에서 부르짖어 기도했지만, 그리고 말씀에 대한 순종을 결심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는 크게 변화가 따라주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변화의 징조가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광야의 낮은 여전히 덥습니다.  광야의 밤은 여전히 춥습니다.  물은 여전히 넉넉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래도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도를 들으실 그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 여전히 믿음으로 한 발자국씩 앞으로 걸어나가기로 결단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일어나셔야 합니다.  마라의 땅에서 벌떡 일어나셔서 내 기도를 들으신 그분 앞에, 그분이 지금 여기 마라의 현장에서 주신 그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 믿음의 한 발걸음, 한 발걸음을 앞을 향해 내 디디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십시오.  홍해가 열리던 그 광경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마라의 우물의 물이 변하던 그 순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모든 기적의 주인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분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일어나십시오.  일어나 다시 약속의 땅을 향한 순례를 계속하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의 땅에서 믿음으로 조금 더 내려왔습니다.  남쪽을 향해서 약 10km를 더 전진하게 됩니다.  그때 도착했던 장소가 엘림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엘림은 어떤 곳이었습니까?  본문 27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사막에서는 물 샘 하나도 소중합니다.  그런데 엘림에 왔더니 물 샘이 열두 개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막에는 한 그루의 종려나무만 있어도 그것이 얼마나 시원한 그늘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엘림에는 종려나무가 칠십그루가 있었습니다.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 그루"  이 정도면 오아시스입니다.  그것도 그냥 오아시스가 아니라 환상의 오아시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마라의 고통의 장소에서 불과 남쪽으로 10km를 내려왔더니 그곳에 엘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의 땅에서 불평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원망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거기에서 삶에 대한 자폭을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단순합니다.  엘림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엘림이 거기에 있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엘림은 내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엘림을 예비하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엘림을 몰랐어도 하나님은 미리 엘림을 아시고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이 놀라운 인생의 오아시스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위로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치료의 장소가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혹여 우리들 가운데 마라의 우물가에 주저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더 이상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계신 분이 계십니까?
조금만 참으십시오.  말씀을 붙들고 일어나 보십시오.  그리고 조금만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아가 보십시오.  조금만 더 가 보십시오.  조금만 더 가시면 엘림에 도달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치료의 장소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당신이 그 자리에 앉아서 원망하고 불평하고 있다면 결코 마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주저앉아 있는 만큼 고통의 시간은 길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어나 말씀을 붙들고 믿음의 여정을 계속하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축복의 땅, 약속의 땅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끝으로 청교도들의 인사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믿음 때문에 당시에 많은 고난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당시의 사회 속에서 오해를 당하고 핍박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고통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이 그러한 고통을 견디던 시절에 요즘 서양 사람들의 보편적인 명언으로 쓰여지는 한 메시지가 탄생한 것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The Best is yet to come)
이 말의 원조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삶이 힘드십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자신에게 외쳐 보십시오.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고 말입니다.
고단하게 살고 있는 이웃들이 보이십니까?  그 곁에 조용히 다가가 이렇게 말해 주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오늘의 본문 식으로 바꾸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일어나 다시 한번 외치고 믿음의 여행을 계속하십시다.
"우리는 아직 엘림에 오지 않았습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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