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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와 함께 하는 사람이 기쁘시게 합니다 (시 139:17-18, 고후 5: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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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와 함께 하는 사람이 기쁘시게 합니다 (시 139:17-18, 고후 5:8-9)


리더스 다이제스트 2009년 3월호에는 재미있는 통계자료를 실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이 더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세요?”라는 설문에 대한 국가별 통계입니다.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겠다는 응답이 스페인이 50%로 가장 높았습니다. 그리고 브라질, 캐나다, 영국, 남아공, 미국, 호주, 한국 등이 많은 응답을 했는데 한국은 33%가 응답했다고 합니다. 운동을 하겠다는 응답이 터키, 이탈리아 등입니다. 일을 더 하겠다는 응답은 인도가 제일로 50%가 응답을 했습니다. 잠을 자겠다는 응답이 독일이 제일 많았는데 37%였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더 하겠다거나, 성경을 더 보겠다거나, 좋은 영성 훈련에 참가하겠다거나, 이웃을 돌보겠다는 응답은 아예 없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가지겠다는 응답도 물론 없습니다. 그나마 가족과 함께 하겠다는 나라가 많다는 것이 다행이면서 동시에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는 현상을 말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시어머니가 무섭냐, 애들이 무섭냐?’라고 하면 젊은 며느리들은 ‘시어머니가 뭐가 무섭냐, 애들이 무섭지’ 그런답니다. 요즘은 애들이 무섭지요. 애들이 무서운 것은 애들과 대화는 시간이 적기 때문입니다. 흔히 하는 말로 애들과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애들 눈치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애들과 대화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고교생 22%, 중학생 17%가 아버지와 하루에 대화하는 시간이 채 1분도 안 된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처방을 내렸습니다. “5분 이상 설교하는 대신 아침밥을 함께 드세요”. 아이들에게 잔소리는 하지만 아이들과 대화는 없습니다. 함께 하지 않는 가족은 가족이 아닌 사람보다 더 큰 문제를 발생하게 됩니다. 
  
지난주 금요일 새벽에 서울 하왕십리 어느 아파트에 화재가 나서 일가족 4명이 사망했습니다. 알고 보니 방화범은 14세 된 그 집 아들이었습니다. 아들은 춤을 좋아하고 사진을 좋아하고 에디터가 되기를 원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판검사가 되라고 강요했습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골프채로 아들을 때렸습니다. 아들은 휘발유를 사놓고 범행을 계획했습니다. 불이 난 후 1시간 반 후에 다시 집으로 돌아와 “우리 엄마 어떡해?”하면서 통곡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아버지만 죽게 하고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은 살리려고 했는데 불이 거세게 번져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무리 얼결이지만 아들이 “우리 아빠 어떡해?”란 말은 죽어도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던 아들은 온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한 사람 때문에 온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창세기 28:15에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야곱이 주체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야곱과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야곱이 함께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야곱에게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함께”라는 말은 하나님 편에서 더 간절한 말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가지신 이름 가운에 하나가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인간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 되게 하시기 위하여 중간에 막힌 죄라는 담을 허신 것입니다. ‘임마누엘’, 이 한 마디 때문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임마누엘’입니다. 
  
마태복음의 마지막 말씀은 마지막 절인 28:20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지상에서의 생애인 탄생과 승천은 “함께” 때문입니다. 함께 하시려고 오시고 하늘로 가셔도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돈을 벌어주고 뭘 해줬다는 것보다 함께 하는 사람이 됐다는 것 자체가 가장 큰 기쁨입니다. 함께 하는 이것이 사랑입니다. 사랑하면 오래 함께 할 수 있고, 사랑하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함께 하는 사람을 주님은 기뻐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함께’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데 주님과 함께 하니 주님이 기뻐하실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알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몸으로 있으면서 주와 함께 해야 합니다. 
  
9절에는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노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육체에 거하면서, 육체적으로 살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바울의 유일한 관심은 ‘주를 기쁘시게’하는 일입니다. 그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주님을 만나 주님을 따랐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대로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온갖 고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흔적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죽었습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바울에게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님을 웃게 하라, 그리하면 네가 웃을 것이다”. 주님이 기뻐하실 때 내가 기뻐야 진정한 기쁨입니다.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사람을 ‘엔터테이너’아고 합니다. 흔히 연예인을 그렇게 부릅니다. 엔터테이너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이 나의 존재가치입니다. 내 삶의 목적입니다. 지난 번 칠레 산호세광산 참사에서도 보니 33인 가운데 한 사람은 엔터테이너 역할을 해서 절망적인 환경에서 기쁨을 선사하는 역할을 하여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주님의 기쁨’이라는 바울의 목표 때문에 그는 고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고린도후서11장에 보면 바울은 무수한 고난을 당했지만 그 고난을 열거하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이 주님께 기쁨이 된다면 견디지 못할 것이 없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면 자랑스럽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골로새서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억지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기쁘게 채웠습니다. 
  
몸으로 있으면 주와 함께 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육체의 본성은 주와 함께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7:5에서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인간의 육체는 주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육체대로 놔두면 주님과 멀고 먼 삶을 살게 합니다. 
  
인간의 본능은 육체적으로는 안전하고, 풍성하고, 안정적인 것을 원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떠나 살고 싶어 합니다. 권력자들이나, 탕자나,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가 어렵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멀리하고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주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일 몸으로 함께 하지 못하면 몸에서 떠나면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어리석은 부자를 보세요. 세상에 살 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세상에서 많은 재물을 가지는 꿈만 꾸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죽은 후에 음부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몸을 떠날 때에 주와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젊은 부자 관원을 보세요. 이 젊은이는 세상에서 재물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재물이 많아 주와 함께할 수 없었고 주님을 떠났습니다. 몸 밖에서는 영원히 주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영성가 윌리엄 로우는 “당신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을 사랑할 때 당신은 그분과 함께 행동하고 있으며 그분과 만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사랑하십니까? 재물입니까? 권력입니까? 명예입니까? 이런 것으로는 절대로 주와 함께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것을 사랑해야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동양에서는 누군가와 식사를 함께 한다는 것은 화평과 신뢰와 형제애와 용서의 상징이라고 합니다.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은 삶을 나누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유대인이 “당신과 저녁식사를 함께하고 싶다”는 말은 “당신과 우정을 맺고 싶다”는 말이라고 합니다.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 싫은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것은 고역입니다. 좋은 사람과 하는 식사는 그 자체가 맛이 있는 식사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은 주님과의 신뢰를 뜻합니다. 주님과의 화평을 의미합니다. 주님과의 우정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데 내가 예수님께 친구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주님께서 내게 친구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나의 친구 내 가까이 계시도다”라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완전히 나를 비우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일하게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그분의 일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5장은 아담과 그의 후손 10사람에 대한 역사입니다. 그래서 흔히 ‘10고조’라고 합니다. 이들의 나이는 대부분이 900세 이상입니다. 제일 오래 산 므두셀라는 969세를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제일 짧게 산 사람은 에녹입니다. 5:24에는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합니다. 에녹은 제일 짧게 살았지만 제일 오래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죽지 않고 올라갔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함께 하늘에서 살 것입니다. 에녹은 이 땅에서나 저 땅에서나 여기서나 거기서나 어디서나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삽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오래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옛날에 태어나서 살다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고 있으니 가장 오래 산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에 십자가까지 같이 갔던 여인들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25에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막달라 마리아가 있었다고 합니다. 네 사람의 여인 중에 세 사람이 마리아였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삶 가운데 가장 어려운 동행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겠다던 제자들은 도망 간 다음이지만 여인들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위선자와 참 성도는 위기에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위선자는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지만 갈보리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끝까지 몸으로 있으면서 주와 함께 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까지 주와 함께 가려하네. 피땀 흘린 동산까지 주와 함께 함께 가려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라는 찬송이 그냥 입으로 부르는 찬송이 아니라 우리의 삶의 고백이 되어 주님과 함께 십자가까지 가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몸을 떠나 있으면서 주와 함께 해야 합니다. 
  
8절에는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것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 합니다. 살아있는 육체로 부활을 경험하고자 희망했던 바울은 점차 죽음의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죽음을 기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제 죽음조차 주와 함께 하는 것임을 알고 몸이 주는 고통을 넘어 몸을 떠나 주와 함께 하려고 합니다. 
  
바울만큼 육체 때문에 고민했던 사람도 없습니다. 바울은 육체 때문에 죄를 짓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한탄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는 드디어 환상을 말하면서 셋째 하늘을 체험하였다고 간증합니다. 그는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신령한 체험 가운데서 바울은 몸 밖에서 주와 함께 있음을 직접 체험하였습니다. 
  
바울은 몸 안에 있어도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몸 밖에 있어도 주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바울에게 삶과 죽음은 일치하였습니다. 사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다 같이 주와 함께 있는 삶이었습니다. 이것이 그가 환상을 통하여 알게 된 사실입니다. 몸 안에 있을 때는 오히려 주님을 떠나 세상과 짝하고 살지만 몸 밖에 있으면 주와 함께 삽니다. ‘영적 결혼’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바라던 주와 함께 하는 영적 삶입니다. 
  
낙원에 들어간 십자가의 강도는 몸을 떠나는 순간 주와 함께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사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을 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단숨에 주와 함께 영원히 사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를 당할 때에 죽음 직전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습니다. 스데반이 아직은 몸 안에 있었지만 이미 몸 밖에서 하늘나라의 광경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하는 광경을 본 것입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세상에서 거지로 산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멍에는 함께 묶는 것입니다. 함께 멍에를 지고 가면 서로 경쟁하지 않으며 조화를 이루게 됩니다. 마태복음 11:29-30에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고 하십니다. 주님과 멍에를 함께 매는 것은 주님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멍에를 매고 산다면 이것이야 말로 무한한 영광입니다. 
  
‘성별’(consecration)이란 말은 하나님에 대한 헌신으로 정의로 정의합니다. 이 말은 ‘함께’(com)라는 말과 ‘거룩한’(sacer)이란 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위로하다’(comfort)란 말은 확신을 준다는 의미입니다. 그분이 나와 함께 하시며 내가 하는 일을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말합니다. 그 외에도 ‘공동체’(community), ‘동정심’(compassion), ‘친교’(communion) 등의 단어들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들입니다. ‘함께’(com)에서 파생된 말들입니다.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란 단어는 문자 그대로 ‘함께 공통점을 만들어 가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진정한 공동체, 동정심, 친교, 전달이 가능합니다. 진정한 ‘성별’은 하나님과 함께 할 때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기도란 아무런 가감이 없이 행동에 신경 쓰지 않고 아무런 꾸밈없이 진정한 모습으로 의식하며 그분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예수와 함께 있으려는 열망에서 태동합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기도 시간에 기도 장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간단히 답해서 그냥 예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기도야 말로 가장 영적 세계입니다. 기도는 주님과 함께 하는 세계입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에 가장 영적인 세계는 하늘나라입니다. 주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세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하여 이런 세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찰리 채플린은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 나는 평화롭다. 나의 갈등은 인간과 함께 있을 때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므로 내가 기쁜 일입니다. 
  
사람은 모두 홀로 죽어서 미지의 세계에 직면합니다. 우리는 모두 홀로 죽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와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아무도 함께 할 수 없을 때에 하나님은 함께 하십니다. 시편 139:18에는 “내가 깰 때에도 여전히 주와 함께 있나이다”라고 합니다. 살아도 죽어도 함께 하는 삶은 가장 거룩하고 고상한 삶입니다. 

  
결론 

파울로 코엘료는 ‘순례자’에서 “춤은 무한한 지혜와 소통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수단입니다”라고 합니다. 성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춤을 배워라.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천사들이 너와 함께 시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사를 춤추는 존재로 상상하였습니다. 천사들은 하늘에서 우리와 함께 춤추고 싶어 합니다. 

교부 히폴리투스는 예수님을 하늘나라 무도회의 무용수라 칭하였습니다. 왜 춤을 춥니까? 춤은 기쁨의 표시입니다. 춤을 어떻게 춥니까? 춤은 혼자 추지 않습니다. 함께 춥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춤을 춥니다. 혼자서 춤을 출 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춤은 함께 춥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늘나라의 춤을 춥시다. 예수님과 함께 춤을 추는 것, 이것이 하늘나라의 축제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합시다. 우리가 몸으로 있든, 몸을 떠나 있든 주님과 함께 하므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종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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