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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면 기쁘시게 합니다 (신 10:13-15, 요 17: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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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면 기쁘시게 합니다 (신 10:13-15, 요 17:13-14)


거룩함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카데쉬’이며, 헬라어로는 ‘하기오스’입니다. 이 말은 ‘나누다’라는 뜻이며, ‘거룩하다’는 말은 ‘구분하다’, ‘분리하다’, ‘특별한 용도로 사용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함은 인간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독특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거룩함과 동격으로 비유할 만한 개념이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적합하도록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절대로 완전한 만족을 누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닮게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고, 하나님을 닮았으니 세상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이런 사람을 좋아할 리가 없습니다. 
  
온전한 하나님의 제자는 세상의 흐름에 역류하는 ‘급진적’(Radical)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의 특징은 세상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현대 우리의 영적 세계를 지배하는 다원주의, 물질주의 등을 신앙 공동체로 맞서 나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고 합니다. 세상과 벗이 된 사람은 하나님과는 원수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성경도 가르칩니다. 
  
타티안은 “세상에서 날뛰는 난리와 법석을 포기하고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라. 그리고 하나님의 성품을 인정하고 너희 속의 옛 자아를 버린 다음 하나님을 위해 살라”고 조언합니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은 지혜입니다. 세상의 것을 포기해야 비로소 하나님의 것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세상에 있지만 속하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일입니다. 
  
로마서 12:2에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라고 합니다. 성경의 많은 번역 가운데 필립스 번역에는 ‘세상이 너희를 그 틀 속으로 끼워 맞추지 못하게 하라’고 합니다. 우리 자신이 세상의 틀 속에 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의 사람이 아니므로 세상을 초월하고, 세상을 빗겨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때로는 세상을 역류해야 합니다. 우회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때로는 정면 돌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한 번은 가족들과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여행을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우리가 가려는 길을 가는데 비가 와서 길이 끊어졌습니다. 길 입구에는 어디쯤 가면 ‘우회도로가 없습니다’(‘No Detour Available’)라고 써 놓았지만 ‘설마’ 하면서 따라갔습니다. 

얼마쯤 갔더니 정말 길이 막히고 갈 수 없었습니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데 몇 시간은 더 소모한 것 기억이 납니다. 빨리 돌아가는 게 현명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돌아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정면 돌파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군대에 있을 때 주일에 교회에 간다고 매를 맞았지만 맞으면서도 교회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얼만 후에는ㅍ구대장이 포기하고 저를 주일이면 교회에 보내 주었습니다.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므로 손해 보고, 고생하고,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첫째, 그리스도에게 속하면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13절에는 “내가 세상에서 이 말을 하옵는 것은 그들로 내 기쁨을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합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한 증거는 기쁨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 기쁨은 비길 데 없습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그 자체가 기쁨입니다. 
  
예수님의 고별설교인 다락방강화에 보면 요한복음 15:11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합니다. 16:22에는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이유 있는 기쁨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물입니다. 그 기쁨은 하나님의 보호에 따른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보호하십니까? 하나님 것이니까 보호하십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했으니까 보호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에서 기본적인 문제로 고민하는 것이 “나는 누구인가”라는 정체성(identity)의 문제입니다. 소속감을 가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정체성이란 어디에 소속되어 있느냐 따라 결정됩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 중의 하나는 어디엔가 속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누구에게 초대받고 싶은 욕구입니다. 그래서 ‘왕따’가 되어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고 요즘 아이들에게는 가장 심각한 문제입니다. ‘나는 소속되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도 이런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우리말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혈연사회에서는 절실한 말입니다. ‘우리’라는 말을 들으면 ‘필’이 옵니다.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이 우리라는 말입니다. ‘우리’라는 말은 집합적 사고를 하는 우리네들이 쓰는 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나’ 보다 ‘우리’가 앞섭니다. 소속감이나 연대감을 유난히 강조하고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도 정치에서는 쉽게 통합니다. 한국인이 즐겨 따지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에 의하여 사람의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흔히 삼연(三緣)이라고 합니다. 혈연, 지연, 학연을 말합니다. 사회생활에서 이 세 가지 연은 반드시 필요하며 아주 중요한 요인이 됩니다. 
  
‘우리’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개인이 소속된 단체도 많습니다. 동창회, 향우회, 화수회 등 수없이 많은 모임들이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많은 모임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최근에는 우리교회 부목사님 출신들이 모여 ‘옥계선교회’라는 것을 조직하였습니다. 그 외에 나도 모르게 소속된 모임도 더러 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나이별 이상형이 있다고 합니다. 10대 여자는 공부 잘 하고 키 크고 잘 생기고 운동 잘하는 만능 스포츠맨이 이상형입니다. 20대 여자는 유명 대학을 졸업하고 장래가 총망되는 멋진 남자가 이상형입니다. 30대 여자는 직업이 좋고 돈이 많고 능력이 있는 남자가 이상형인데 대머리만 아니면 좋다고 합니다. 40대 여자는 TV나 영화에 멋진 얼짱 스타일의 연예인이 이상형입니다. 50대 여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는 내 아들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아들의 여자 친구가 미워요’라고 합니다. 10대 남자는 예쁜 여자가 이상형입니다. 20대 남자는 예쁜 여자가 이상형입니다. 30대 남자는 예쁜 여자가 이상형입니다. 40대 남자는 예쁜 여자가 이상형입니다. 50대 남자는 예쁜 여자가 이상영입니다. 남자란 참 이상하지요? 
  
여러분은 누가 제일 예뻐요? 내 자식입니다. 저도 저의 손자들이 너무 예쁩니다. 손자 중의 한 아이는 제가 봐도 참 묘하게 생겼습니다. 누굴 닮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녀석이 너무 예쁩니다. 왜요? 내 손자니까 예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만 혈연을 따집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혈연에는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아들의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 ‘피로 값 주고 사신 성도’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셨으니 하나님의 혈연은 우리보다 훨씬 더 진합니다. 그래서 우리를 싸움에서 구하시고, 받을 만하지 못하지만 복을 주시고, 온갖 은혜를 베푸십니다. 
  
이사야 43:1에는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내 것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너를 낳았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낳은 아들, 낳은 딸을 끔찍이 챙기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속한 자를 기뻐하시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원하시는 당연한 것입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던 바울도 팔이 안으로 굽었습니다. 로마서 9:3에는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방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방인 사도로 세웠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가는 곳마다 먼저 회당에 들어가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에게 복음을 먼저 전했습니다. 바울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속한 민족에게 정성을 더 기울였습니다. 
  
양을 찾으면 목자는 기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99마리를 두고 찾아 나선 보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잃었던 양이 다시 목자에게 속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기뻐하여 잔치를 베풉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죽었다가 살았으며 잃었다가 얻은 아들이 되어 다시 아버지에게 속한 아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면 그리스도의 기쁨이 충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께 속하여서 무엇을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속한 그 자체만을 가지고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기뻐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하여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14절에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태생은 세상이 아닙니다. 세상에 태어나고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이 역설이며 역설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고통을 당하며, 많은 순교자가 생겼습니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라고 합니다. 왜 미워하는지 아시지요?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사람이 아니니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세상이 하나님의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세상은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거짓을 깨우치니까 세상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내가 세상적이지 않음같이 그들도 세상적이지 않습니다”라고 번역한 성경도 있습니다. 헬라어 본문의 뜻은 “내가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았듯이 그들도 세상에 기원을 두지 않습니다”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출신이나 소속이 세상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출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났고, 영으로 거듭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즘 세상에 왜 기독교 안티가 많은지 아십니까? 세상에 속하지 아나하므로 안티가 많습니다. 안티 불교 보셨습니까? 안티 천주교 보셨습니까? 안티 천도교 보셨습니까? 없습니다.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과 함께 살면 안티가 없습니다. 
  
최근 동영상으로 올라와 있는 ‘봉은사 땅 밟기’는 충격적입니다. 찬양하고 전도하는 것을 어떤 기독교인이 반대하겠습니까? 그러나 타종교를 배려하지 않고, 기독교의 교리와 열정만을 가지고 폄훼하는 것은 다종교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이런 배려 없는 행동은 폭력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지나친 열심 때문에 기독교가 오히려 전도의 문이 막히고, 안티가 많아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도둑질하고 잘못을 저질러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습니까? 베드로전서 2:20에도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라고 합니다. 
  
세상은 바다와 같습니다. 성경에서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바다에는 사람이 빠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베드로가 밤새 배를 저어 건너편으로 가다가 새벽에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다가 물을 보고 물에 빠졌습니다. 그런데 물에 빠진 베드로를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사실은 베드로가 물에 빠지지 않은 것이 기적입니다. 물에 빠진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물에 안 빠지려고 주님을 바라보고 잠시라도 갔던 베드로가 장한 것입니다. 
  
오리는 아무리 깊은 물에라도 빠지지 않습니다. 오리는 물에 빠지지 않는 법을 알고 있습니다. 꽁무니에서 나온 기름으로 온 몸에 기름을 바릅니다. 기름 때문에 물에 빠지지 않고 몸을 드러내고 물 위에 거니는 것입니다. 우리 몸에 성령의 기름으로 바르면 세상이 아무리 깊다고 하더라도 세상에 빠지지 않습니다. 세상을 넉넉히 이깁니다. 연꽃은 더러운 연못에 살지만 뿌리는 항상 깨끗한 물이 나오는 쪽으로 뻗어 있습니다. 이것이 연꽃이 아름다운 자태를 나타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신명기 10:15에는 “여호와께서 오직 네 조상들을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들의 후손인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과 같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선민으로 택정된 것은 그들의 공로나 의로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예정으로 구원받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은 세상에 속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정순의 ‘줄의 운명’이란 책에는 아무리 좋은 모체에서도 탯줄을 끊고 떠나지 않으면 세상 사람이 될 수 없듯이 모든 시작은 끊음으로써 새롭게 시작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탯줄을 끊음으로 세상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모체를 떠나야 세상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을 끊어야 하나님 나라의 사람이 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은 끊어야 할 것과 절대로 끊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세상을 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절대로 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합니다. 로마서 8:39에는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끊을 수 없는 사랑의 줄이 있습니다. 세상이 끊을 수 없는 줄입니다. 그 사랑의 줄 때문에 우리가 살고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가 되면 그 줄을 잡아끌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때로는 세상에 빠지지만 영원히 빠지지 않는 삶을 삽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이런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 보시면 얼마나 예쁠까요? 이런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의 기쁨이 됩니다. 
  
한 은둔자가 다른 은둔자에게 “나는 세상에 대해 죽었소”라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은둔자가 “정말로 죽기 전까지는 그렇게 확신하지 마시오. 당신은 세상에 대해 죽었을지 몰라도 사탄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시오”라고 하였답니다. 세상에 대하여 죽는 것이 어렵기도 하고, 지속적인 우리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까닭이 바로 사탄이 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아니라 그 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지해야 세상에 속하지 않고 바르게 살 수 있습니다. 
  
토마스 왓슨은 “죄는 세상을 사용하는데 있지 않고 세상을 사랑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세상을 잘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 속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1:10에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라고 합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속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결론 

중국 남송 시대의 철학자 주신중이 ‘인생의 5계’를 다음과 같이 얘기했습니다. 첫째는 생계(生計)로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둘째는 신계(身計)로서 ‘우리는 어떻게 입신해야 하는가’입니다. 셋째는 가계(家計)로서 ‘우리는 어떻게 가정을 꾸려야 하는가’입니다. 넷째는 노계(老計)로서 ‘우리는 어떻게 늙어가야 하는가’입니다. 다섯째는 사계(死計)로서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입니다. 인생의 5게에서는 ‘어떻게’ 만 있습니다. 
  
인생에서 ‘어떻게’라는 기술만 가지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기술만 가지고는 바른 인생이 되지 못합니다. ‘어떻게’라는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디에’라는 존재감입니다. 인생의 정체성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어디에’라는 소속감, 정체성 문제가 해결되면 ‘어떻게’라는 기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우리 인생은 세상 속하든 하나님께 속하든 둘 중의 하나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하여 우리 하나님께 무한한 기쁨이 되는 주님의 귀한 자녀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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