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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에게 달린 결과 (요 5: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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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달린 결과 (요 5:5-15)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집에 종종 심방을 오시던 여자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목사님은 예배를 인도하신 후에 예언기도를 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소위 신령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 중에 ‘요즘에는 은혜가 말랐어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무슨 말인가 궁금하게 생각했습니다. 개인의 사정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교계 전반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인지, 만일 교계 전반의 상황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왜 신문에는 아무 보도가 없었는지. 그런데 제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할 때가 있고 하나님의 은혜가 말랐다고 느끼는 때가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제가 대학생이었을 때 출석하던 미국인교회 목사님은 과거에 안수기도를 하면 사람들이 뒤로 펑펑 넘어지곤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더 이상 그런 역사가 일어나지 않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은사를 거두어가셨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것은 매우 솔직한 고백이지요. 하나님이 거두어 가셨는데 아직 있는 것처럼 흉내 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신령한 것에 관심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느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신령한 은사를 주시지만 이것이 우리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제가 이래 봬도 전도사 시절에는 교인들에게 안수기도를 하려고 손이 근질근질 했어요. 그리고 안수기도를 하면 예언이 튀어나왔어요. 그런데 단독목회를 하면서 발견하는 것은 그쪽의 은사가 줄어들더라는 것입니다. 설교의 비중이 커질수록 다른 은사의 비중이 줄어드는 것을 느낍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 진이 빠질 정도로 설교를 합니다. 제 안에 있는 것을 다 쏟아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 후에 추가로 그 무엇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변화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은사가 정말로 성령의 은사라면 우리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성령이 주도하시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평소에 기도로 준비하고 성령이 역사하고자 하실 때 순종하는 것입니다. 장마철을 대비해서 우로를 준비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비가 오게 할 수는 없지만 비가 올 때 빗물을 받을 준비를 할 수는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은 성령의 은사를 자유자재로 사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누구를 고치려고 했는데 한 번도 낫지 않았다든가 실패했다든가 귀신이 나가지 않았다든가 그런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야구 용어를 빌면 예수님은 타석에 섰을 때 열 번 안타를 치셨다는 얘기입니다. 100 타율이에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다 성공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위대하였다든가 그러므로 예수님은 참 좋겠다든가 이런 말을 하기 위해서 성경이 기록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이 기록된 목적은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이러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이 기록된 이유는 우리에게 교훈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38년 된 병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아직 38세가 되지 않으신 분들도 계시는데 병을 38년을 앓았다면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앓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람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물어보십니다. 당연한 질문 아닙니까. 38년이나 병을 앓았으니 낫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당연한 것을 물어보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38년이라는 세월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낫기를 원하게 만든 게 아니고 낫기를 포기하게 만든 것입니다. 나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더 이상 믿지 않은 것입니다. 더 이상 그의 생각이 내가 낫는다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세월동안 병을 앓은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병을 나을 수 있다는 생각이 아니고 나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네가 낫고자 하느냐고 먼저 물어보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낫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나을 수 있다는 얘기냐. 요즘 우리 사회 정서가 그런 쪽으로 흘러가지요. 무엇을 간절히 바라면 이룰 수 있다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월드컵 경기 때도 ‘꿈은 이루어진다’ 이런 현수막을 내걸었지 않습니까. 그러나 성경적인 정답부터 말씀드리면 이 병자가 낫기를 원하는 것만으로는 나을 수가 없고 예수님이 함께 하셔야 나을 수가 있어요. 그게 차이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에게 물어보신 것입니다. 

만일 다른 사람이 물어본다면 효험이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고 그리고 이 병자가 낫기를 원해야 병이 나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콤비네이션. 예수님이 함께 하셔야 되고 또 낫고자 하는 마음이 갖춰져야 됩니다. 콤비네이션이 이루어져야 됩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도 그 약속을 믿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가 있고 사람의 믿음이 갖춰졌을 때 비로소 그것이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의지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의 약속의 있어야 되고 사람이 그것을 믿어야 되고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 질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땅으로 인도하겠다고 하셨지만 이스라엘도 그것을 믿어야했습니다. 그럴 때 비로소 그 약속대로 이루어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갖춰져야 되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둘째는 사람의 믿음과 순종이 갖춰져야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병자의 경우가 그런 것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물어보시는 예수님이 계셔야 되고 그게 우선이고 그리고 낫기를 원하는 본인의 마음, 이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잇고 또 순종이라고 부를 수도 있습니다마는 이 두 가지가 갖춰졌을 때 38년이나 되었던 이 병이 즉시 나은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증명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것이 예컨대 열 개가 있다고 했을 때 열 개를 다 받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요. 많이 받아봤자 한 여섯, 일곱 개 정도를 받지 않을까.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하나, 둘을 받아도 많은 것이 아닐까. 이건 증명할 수는 없지만 대체적으로 봤을 때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 개를 예비해서 주려고 한다고 했을 때 열 개 다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많이 받으면 여섯, 일곱 개를 받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한두 개, 세 개 정도 받고 끝나는 것이 아닐까. 그 이유는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 프랑스에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사람이 많지요. 노조가 반대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는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십대 청소년이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데 왜 연금개혁에 대해서 십대가 반대하느냐. 그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아세요? 은퇴나이를 65세에서 67세로 늘리는 것을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노느냐. 우리는 언제 노느냐. 우리는 놀고 싶다. 인생을 즐기고 싶다.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별 일이 다 있지요. 더 일할 수 있게 해준다는데 인생을 즐기고 싶기 때문에 67세까지 일하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데모를 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신다는 데 원치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나는 놀고 싶다, 나는 힘들다, 나는 부담스럽다…. 부담이라는 말은 간이 붓는다는 말인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을 맡기시는 것에 대해서 간이 붓기 때문에 싫다는 사람이 많아요. 부담스럽다는 사람 많아요. 예수님이 38년 된 이 병자를 고쳐주시겠다고 하시더라도 이 병자가 얼마든지 거절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 병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싫습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내가 나으면 다시 직장으로 돌아가야 되기 때문에 싫습니다. 내가 나으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싫습니다. 나는 돌아갈 데가 없습니다. 내 가족도 나를 버렸고 친구도 나를 버렸고 차라리 나는 이곳에서 여기 있는 다른 병자들과 사는 것이 익숙합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였던 캐서린 쿨만은 여성이에요. 신유의 은사가 있는 아주 유명한 부흥사였습니다. 아주 잘 알려진 전설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캐서린이 이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나님의 first choice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처음에 남자를 선택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이 일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필요가 있는 말이지요. 그게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처음에 다른 사람을 부르셨는데 그 사람이 그걸 감당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하나님이 first choice, second choice 다 제쳐놓고 찾다보니까 여자 캐서린 쿨만에게까지 차례가 왔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신 것을 다 받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게 안주신다고 불평하는데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게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이 주시려는 것도 사람이 안 받으려고 하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받을 준비가 돼있지 않은 데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그것을 받음으로써 지불해야 되는 대가를 원치 않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에는 대가가 있어요. 그것이 성공이든 명예든 능력이든 임금의 자리이든 섬기는 일이든 은사든 어떤 일이든 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일에는 거기에 따르는 대가가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되니까 대가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는 백성답게 살아야 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목사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목사가 되고나니까 지불해야 되는 대가가 있는 게 아닙니까. 은사를 갖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은사를 받으면 그걸 섬기는 일에 제대로 사용해야 될 대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소위 똑똑하다는 사람이 그 대가를 지불할 용의가 없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것입니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예수 믿고 싶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안주셔서 그렇다고 불평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주셨고 내가 원해서 그것을 받은 후에 감당을 못해서 잃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이 주시고 우리가 받았는데 우리가 감당을 못해서 잃어버리는 경우입니다. 이 38년 된 병자가 나은 다음에 예수님이 다시 그 사람을 만나서 뭐라고 말씀 하셨느냐면 오늘 본문 14절에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무서운 말씀입니다.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지금은 나았지만 만일 죄의 삶으로 돌아가면 더 큰 병이 생길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무엇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구원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얘기냐.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죄를 지으면 구원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얘기냐. 그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렇지만 그런 식으로 이 구절을 해석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아, 이건 너무 어려운 요구사항이 아닙니까. 만약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신다면 제정신이 아닙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 don''t sin ever again’ 무서운 말씀인데 너무 심한 요구 아닙니까. 

누가 이 말씀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38년 된 병을 고쳐주신 그 결과로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결코 심한 요구가 아니에요. 감기를 고쳐주신 다음에 말씀하신 게 아니에요. 38년이나 된 병을 고쳐주고 나서 하신 말씀으로는 주님은 얼마든지 이런 요구를 우리에게 하실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장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때 많은 사람들은 그때 가서 하나님에게 할 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게 설명을 요구할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 하나님 왜 이렇게 하십니까. 그런데 정작 그 자리에 가서 할 말이 있는 분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그어주신 선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넘어갔어요.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한다는 얘기입니까. 할 말이 없지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더 나은 결과가 있기를 우리는 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 9절을 보면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을 확신하노라’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우리가 이것처럼 엄하게 말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아마 해당이 안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 이런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굉장히 엄하지만 아마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라고, 더 나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기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휴~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됩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과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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