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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말이 응하리니 (겔 33: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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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이 응하리니 (겔 33:30-33)  


'우이독경'(牛耳讀經) 즉 '쇠귀에 경 읽기'라는 뜻의 유명한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소의 귀에 대고 그 어떤 심오한 경전을 읽어 준다 해도 소가 그 말을 단 한 마디도 알아들을 리가 없는 것처럼,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주어도 전혀 깨닫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속담입니다.
그렇다면 이 '쇠귀에 경 읽기'라는 현상이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경우는 무엇이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이 바로 우리 기독교의 예배 중 설교 시간일지도 모릅니다.
  
교인의 한 쪽 귀로 들어온 말씀이 다른 한 쪽 귀로 그대로 흘러가 버리고, 주일예배 시간마다 듣는 그 많고도 좋은 말씀들이 자신의 심령에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고 자신의 생활에 그 어떤 변화도 주지 못하는 중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실로 안타까운 '우이독경'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옛날 유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있던 땅 바벨론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던 선지자 에스겔 역시 똑같은 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제2차 예루살렘 침공 때에 바벨론 땅으로 끌려왔던 에스겔은 함께 포로가 된 백성들을 향하여 유다 민족이 고국을 잃고 이방인의 종이 된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까닭이라고 외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바벨론에 잡혀 와 있던 유다인들은 그런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도 전혀 각성하는 빛이 없었습니다.
회개를 촉구하는 에스겔의 외침은 그야말로 메아리도 없이 허공에 사라져 갔던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당신의 말씀을 그처럼 외롭게 외치고 있던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에스겔아, 이 백성들이 네 말을 듣고도 조금도 그대로 준행치 아니하는구나."라고 같이 안타까워하시는 장면입니다.
왜 예나 지금이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는 들어도 몸으로 행치 아니 하는' 것이겠습니까?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본문을 통하여 그 이유를 세 가지로 살펴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과연 '설교 말씀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체험할' 수 있는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상습적으로 듣는 습관을 버리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으로 청종해야 합니다.

본문 30절과 31절 상반절에 "30인자야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각각 그 형제로 더불어 말하여 이르기를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 하고 31a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포로된 바벨론 땅에서도 안식일마다 정기적인 예배를 드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그저 습관적인 형식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유다 백성들이 "자, 가서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말씀이 나오는가 들어보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오늘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주시는지 귀담아 들어봅시다.'라는 의미가 결코 아닙니다. 이것은 '자, 오늘 또 모일 날이 되었으니 어쨌든 회당에 가서 에스겔이 또 무슨 소리를 하는지 들어나 봅시다.'라는 뉘앙스입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선지자의 설교를 듣는 것이란 그저 으레 있는 주간행사요 상습적인 일에 불과했던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이어지는 31절 상반절에서 하나님께서 그 유다인들이 안식일 예배에 모이는 자세를 두고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게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때에 더욱 명백해집니다.
여기서 "모이는 것같이"라고 번역된 말은 '항상 모였던 대로'라는 의미입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절실히 사모해서가 아니라, 매주 안식일이 다가오면 항상 했던 그대로, 옛날 예루살렘에 있을 때부터 늘 그래 왔던 대로 그저 '관습적으로' 모였을 뿐이었습니다.
그 바벨론의 포로된 땅에서도 아무 회개의 눈물이나 간절한 마음도 없이 그저 이국땅에서 동족끼리 인사나 나누고 회포나 풀기 위해서 안식일마다 정기 모임을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바로 오늘 주일 아침에 어떤 마음으로 이 예배당에 나오셨습니까?
'주님, 제가 주님께서 임재하고 계시는 성전에 나아갑니다. 오늘도 말씀을 통하여 이 못나고 약한 죄인을 다시 한 번 소생시켜 주시고 지난 주간보다는 다가오는 새 한 주간을 더 바르게 살도록 은혜와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라는 간절한 기도와 함께 나오셨습니까?
아니면, '아이고, 벌써 주일이 또 왔구나. 오늘 안 가면 우리 전도사님이 전화다 심방이다 하면서 귀찮게 할 것이니 어쨌든 가기는 가야지.'하고, 그저 교인 노릇 하기 위해서 일주일에 딱 한 번만 나오면 되는 주간행사처럼 참석하셨습니까? 

상습적으로 예배에 나와서 상습적으로 설교를 듣던 유다 백성들을 가리켜 하나님께서는 무어라고 말씀하시는 줄 아십니까?
"백성이 모이는 것같이 네 앞에 나아오며 내 백성처럼 네 앞에 앉아서 네 말을 들으나"라고 하십니다.
그런 교인들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인 것처럼' 모여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인정하지는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비록 선지자 앞에 앉아서 선지자의 설교를 듣고 있기는 하지만,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는 내 백성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들은 내 백성이 아니다.' - 이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에스겔 선지자 앞에는 안식일마다 많은 청중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아마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있던 대부분의 유다 백성들이 다 안식일마다 에스겔 선지자 앞에 모여 예배를 드리면서 그의 설교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많은 청중들이 다 '진짜 하나님의 백성'은 결코 아니었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주일만 되면 이 지구상 방방곡곡에서 수천만 수억의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여 목사의 설교를 듣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그저 '하나님의 백성처럼' 보이기만 하는 교인들,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내 백성'으로 쳐 주지 않으시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왜냐하면 간절한 마음 없이 그저 습관적으로 모여서 습관적으로 설교를 듣는 교인은 단지 '설교자의 청중'의 숫자에만 포함될 뿐이지 '하나님의 친자녀'의 숫자에는 결코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하는 하나님의 진짜 백성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상습적인 예배 참석 자세부터 완전히 청산하고 항상 은혜를 진심으로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하여 말씀 한 절 한 절을 청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사리사욕에 끌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는 것을 순종해야 합니다. 

이어지는 31절 하반절 말씀에 "31b그대로 행치 아니하니 이는 그 입으로는 사랑을 나타내어도 마음은 이욕을 좇음이라"고 기록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말씀을 듣기는 들어도 그대로 행치 아니한' 또 하나의 이유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요구하고 명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구에만 전적으로 끌리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에 "사랑"이라고 직역되어 있는 단어는 문맥으로 볼 때에는 '헌신'(devotion)의 의미이며 실제로 그렇게 의역해 놓은 영어성경들도 있습니다.
'입으로만 나타내는 헌신적인 사랑' - 이것은 곧 '말로만 유창하게 하는 신앙고백'을 가리킵니다.

유다 백성들은 안식일뿐 아니라 매일 이른바 '쉐마'라고 불리는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까지의 말씀, 즉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신앙고백을 낭송했습니다.
즉 그들은 날이면 날마다 자기네의 입술로는 더없이 열성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 유다인들의 "마음은 이욕(利慾)을 좇고" 있었습니다.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던 그들의 '진짜 마음과 성품과 힘'은 전혀 딴 곳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에 바쁜' 생활이었습니다.
그 각박한 포로 생활 중에도 어찌하든지 남보다 좀 더 잘 살아 보겠다고 버둥거렸습니다.
그저 어떻게 하면 내 한 몸부터 조금이라도 더 잘 먹고 잘 입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옆집 이웃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습니다.
  
그처럼 당장 자기 자신의 현실적인 필요와 욕구에만 온통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하나님께서 왜 유다 백성에게 진노하셨는지, 앞으로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는지, 하나님께서 지금 선지자의 말씀을 통하여 그들에게 명령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마음도, 순종할 자세도 전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헌신한다 하면서도 그 진짜 속마음은 자기 욕심만 차리고 있다.' - 오늘날 역시 우리의 정곡을 콕 찌르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예배 시간에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라고 신앙고백도 하고 "나 구주 위해 살리라"라고 헌신의 찬송도 같이 부르고 있지만, 실제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교인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주일 예배에 나오느라고 장사도 못하게 되었는데 하필 오늘 우리 가게를 찾아왔다가 그냥 가 버린 손님들이 몇 명이나 될까?'라고 머릿속에서는 자기 '이욕'의 계산만 바삐 돌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원로목사님을 통하여 "목적으로서의 예수, 수단으로서의 삶"이라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면서도 실제 생활은 오로지 '목적으로서의 내 인생 행복, 수단으로서의 신앙생활'에서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교인들도 참 많을 것입니다.
이 교회에 몇 년, 혹은 몇십 년을 출입하면서도 과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한 일을 위하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진정 헌신적으로 희생하며 섬긴 봉사의 족적이라고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지는 않습니까?

그것이 바로 늘 자기 자신을 위해 먼저 할 것부터 다 해 놓고 보자는 '이욕'을 좇기 때문입니다.
내가 입을 것 다 입고, 내가 먹을 것 다 먹고,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해 놓고서 마지막에 조금 남는 것 가지고 주님 섬긴답시고 생색을 냅니다.
내게 급한 일이라면 주일이라도 쓰고 싶은 시간 다 쓰고,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라면 십일조까지도 일단 먼저 갖다 쓴 후에 그래도 좀 여유가 있으면 그것을 가지고 '헌신'이라는 미명을 위하여 체면치레하려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솔직히 돌이켜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목사니 장로니 집사니 해도 실은 네 인생의 최우선 순위는 교회가 아니라 네 자신과 네 가정에 있었지?'라고 하나님께서 물어 보신다면 과연 저와 여러분 가운데 '하나님,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그처럼 많이 듣고도 그 말씀에 순종하여 행한 것이 이토록 적은 이유는, 아무 변명할 여지없이,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는 다 자기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먼저 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 한 몸'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게 살아 보겠다는 욕구만을 위하여 정신과 힘을 온통 다 쏟아 붓다 보니까 정작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위해서는 절로 인색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라고 잘라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면 그것과 대치되는 자신의 모든 이욕을 철저히 억제하고서 오로지 그 말씀에 즉시, 그리고 100퍼센트 순종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다 아시고 넉넉히 더하여 주시는' 축복까지 충만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우리는 설교자를 세상의 연예인처럼 여기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 존중해야 합니다. 

32절과 33절에 기록하기를 "32그들이 너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나니 네 말을 듣고도 준행치 아니 하거니와 33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정말 기가 막히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들이 너를" 즉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어떤 사람으로 여기고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실로 적나라한 표현을 동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음악을 잘하며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이 여겼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설교 시간에 노래를 불렀다든지 혹은 그의 설교하는 목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아름다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마치 '가수'처럼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에스겔을 무슨 세상의 연예인처럼 대했다는 뜻인 것입니다.
마치 청중들이 무대에 선 가수가 신나는 노래로 그들의 귀를 즐겁게 해 줄 것을 기다리듯이, 마치 시청자들이 텔레비전에 나오는 코미디언들이 그들의 기분을 즐겁게 전환시켜 줄 것을 기대하듯이, 유다 백성들 역시 에스겔 선지자를 어떤 '엔터테이너'처럼 여겼습니다.
그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그 외롭고 무미건조한 타향에서 오랜만에 동족끼리 모인 자리를 즐겁게 이끌어 주는 사람, 그 포로생활의 울적한 기분을 달래 주고 약간의 위안거리가 될 만한 몇 마디 '좋은 말씀'만 들려주는 사람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오늘날도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이 유다 백성들과 똑같은 자세로 교회에 모이고 있겠습니까?
예배당의 강단을 무슨 무대처럼 여기는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조차 예배 시간에 드리는 것이 뭐가 그렇게 거북하고 어색한지 마치 극장에 입장료 내고 들어오는 관람객처럼 예배당 바깥 입구에 놓인 헌금함에 넣어야 '자연스럽고 편하다고' 생각하는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찬양대의 찬양을 듣는 것도 무슨 '콘서트'에서 가수의 노래를 듣는 자리나 마찬가지일 것이고, 목사가 강단에서 선포하는 설교를 듣는 것도 무슨 '토크쇼'의 방청객으로 앉아 있는 기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교인들이 어떻게 '말씀을 듣고 준행할' 리가 있겠습니까?
지금 막 '쇼' 하나 보고 온 사람, 지금 무슨 '공연' 하나 감상하고 돌아온 사람이 그것 때문에 자신의 생활에서 무슨 '준행해야 할 일'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내 돈 내고 어느 가수의 공연장에 갔으면 그냥 그 자리에서 즐기면 됐지, 집에 와서 그 '노래의 가사'를 따라서 '순종해야 할' 의무란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토크쇼의 방청객 자리에 앉아서 MC와 게스트 연예인들이 서로 주고받는 재미있는 농담이나 일화를 듣고 한바탕 크게 웃었으면 됐지, 거기서 나온 이야기를 자기 일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실천해야 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목사를 그런 연예인 비슷하게 여기는 교인은 아무리 예배에 참석하고 설교를 들어도 그 '말씀대로 준행할' 그 어떤 필요성도, 의무도 느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처럼 '선지자'를 '사랑의 노래를 하는 가수' 쯤으로 여기는 자들이 결정적으로 모르고 있는 사실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을 두고 33절에서 "그 말이 응하리니 응할 때에는 그들이 한 선지자가 자기 가운데 있었던 줄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얼마나 충격적인 반어법을 쓰고 계십니까?

바벨론 땅에 살고 있던 유다 백성들이 '그들 가운데 한 선지자가 살고 있었던 줄'을 정말 몰랐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에스겔을 부를 때 누구나 다 '에스겔 선지자님'이라고 호칭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먼 훗날 그 말이 이루어질 때 그제야 비로소 그들은 옛날에 자기네 가운데 한 선지자가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이 선지자인 것은 알았지만, 그 선지자라는 것이 어떤 직분인지, 그 선지자가 선포하는 말씀이 어떤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그 선지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예언이 그 얼마나 정확무오한 진리인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란 문자 그대로 '미리 알고 예언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선지자들은 결코 자기 자신의 추측이나 예지력에 의존하여 예언(預言)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서 '장차 벌어질 일에 대하여 미리 알려 주신 말씀'을 대언(代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바로 이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목이 터져라 외치는 경고와 회개 촉구의 소리가, 사실은 에스겔 자신의 말이 결코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의 선지자의 입술을 통하여 전달하시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에스겔 선지자를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로 대하지 못했을 때 그 결과는 30절 상반절에 나왔던 대로 "네 민족이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라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에스겔은 그저 좋은 잡담거리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담 곁이나 집 문에 삼삼오오 모여 있을 때에 그들의 대표적인 화제 중에 하나가 바로 에스겔 선지자에 대한 흉이나 헛소문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목사들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목사를 무슨 '쇼 진행자'나 '카운셀러' 정도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 혹 그저 심심풀이 화제의 대상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께서는 '목사가 목사인 줄'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중에 혹시 그 분들이 정말 목사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가서야 알게 될 사람은 없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장면을 보게 되어서야 비로소 "아, 그때 나보고 교회 나오고 예수 믿으라고 그렇게 전도하시던 분이 정말 선지자였구나!"라고, 자기 동네에 한 선지자가 지척에 살고 있었던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될 사람은 혹 없겠습니까?
"매주일 설교를 들을 때마다 '목사라면 으레 하는 그 소리지.'하고 흘려버렸더니, 그게 아니었구나. 그 말씀이 목사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목사의 입을 통하여 선포해 주신 진짜 예언이었구나!"라고, 뒤늦게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사람은 혹 이 자리에 없겠습니까?
목사는 '자신의 의견이나 조언'을 가지고 설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장차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이루어질 예언을 정확하게 선포해 주는 '하나님 말씀의 대언자'인 줄로 알고 그 전하는 말씀을 믿고 따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에서는 '참된 교회의 삼표식' 중에 '말씀 선포'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그런 까닭에 교인들이 주일예배나 수요예배, 혹은 그 외의 성경공부나 기도회에서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나누게 되는 시간이 바로 성경 말씀을 읽고 전하고 듣는 시간이 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정말 심각한 문제는 그 말씀 선포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현상, 즉 그 귀한 말씀이 적지 않은 교인들에게 그저 '쇠귀에 경 읽기'로 끝나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소야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사람이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위대하고도 오묘한 계시를 이 '성경'을 통하여 '인간의 언어'로 우리에게 나타내고 계십니다.
그것만 해도 참 고맙기 짝이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자(使者)들을 강단에 세우셔서 그 '기록된 말씀'을 '선포된 말씀'으로 우리의 귀에 들려주기까지 하십니다.
사람이 눈으로 책을 읽는 것보다도 그냥 귀로 말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쉽고 편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처럼 '선포되는 말씀'조차 '듣고 준행하지 못한다면' 정말 '소나 다름없는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그 '응할 때'가 오고야 맙니다.
하지만 그 말씀이 한 절도 빠짐없이 다 성취되는 그 날에 가서야 '아차, 그때 주일마다 들었던 설교가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었구나! 그때 그 말씀을 선포하시던 목사님이 진짜 하나님의 사자였구나!'라고 땅을 치고 후회한들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아직도 '은혜의 기회'가 계속되고 있는 이때에 '상습적인 자세'를 버리고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자신의 이욕'을 억누르면서 그 명령을 '준행'하며 그 말씀을 전하는 선지자를 '세상의 연예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언자'로 모심으로써, 그 '말씀이 응할 때'에 '저주의 영벌'이 아니라 '언약의 영생'을 꼭 함께 나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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