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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삶 (요 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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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삶 (요 21:1-17)


시편 73편에서 기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복된 인생을 살기를 원하신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성경에는 하나님을 가까이 했던 사람들도 인생의 여정에서 고난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언제나 형통한 삶을 살았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을 보십시오.  창세기 39장 2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함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가까이, 곁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형통'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번영케 하다, 번성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성공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요셉이 가는 곳마다 성공하는 자가 되었더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요셉이 가는 곳마다 언제나 하나님과 가까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셉만 번영했던 것이 아니라 요셉이 머물고 있었던 보디발의 집과 애굽이 번영했다고 했습니다.  보십시오.  요셉이 하는 일마다 눈에 띄게 나아졌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불신자들이 그 삶의 가시적인 현상을 보고서 하나님이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 요셉이 가는 곳마다 번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아브라함이 가도 그랬고, 야곱이 가도 그랬습니다.  모세가 가도 번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은 번영의 역사를 일으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번영의 역사가 일어나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여러분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과 사업이 번영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인생의 모든 일의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믿는다면 하나님을 가까이 하십시오.  멀찍이 떨어지지 마시고 주님을 꼭 붙드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여, 내 가는 곳마다 번영의 역사가 나타나게 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은 베드로가 주님의 다른 일곱 명의 제자들과 함께 물고기를 잡으러 가면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3년 전, 예수님께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고 있던 어부 베드로를 부르셨습니다.  그 이후로 베드로는 주님의 사랑도 많이 받았고, 칭찬도 많이 받으면서 따랐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충성을 가장 많이 한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주를 향한 신앙고백도 탁월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감람산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향해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그는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겠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정작 연약한 소녀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죽을지라도 부인하지 않겠다던 그의 맹세는 헛된 맹세가 되었습니다.

그 후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한 제자로 끝났습니다.  3년 동안 신앙고백으로 칭찬도 받고, 주님을 따르는 열정에서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는 주님을 부인하는 수치스러운 제자라는 과오를 남긴 채 좌절에 빠졌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처음 부르셨던 소명의 열정을 회복하지 못한 채 과거에 고기를 잡던 그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는 3년 동안이나 방치해 두었던 배를 띄웠습니다.  비린내 나는 그물을 다시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를 못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또 던져보았지만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채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제자들이 무엇 때문에 갈릴리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갔을까요?  이것은 현실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 공동체와 함께 있을 때는 의식주를 비롯한 모든 문제를 예수님이 친히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 공동체에 예수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는 이 상황 속에서 저들에게 닥친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아마 먹고 사는 문제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앞장서서 내가 한 번 해결해 보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3절 마지막에 보면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베드로의 일행은 차리리 안간 것만 못했습니다.  이제는 제자로서도 실패하고, 고기 잡는 어부로서도 실패한 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과 인도하심도 믿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가 믿는 신앙이 삶의 현장 한 가운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문제와 부딪힐 때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당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의 믿음으로는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실제 생활에서는 그것을 버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으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문제가 남이 아닌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문제들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믿음으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실제 내 삶에서 일어나는 시련들 앞에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와 제자들이 겪고 있는 문제도 우리는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생사의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지고 또 던졌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이것은 예수 없이 살아가는 인생들의 슬픈 고백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부딪히는 여러 가지 문제에 짓눌리다 보면 예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교회를 향해 불평합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신앙을 무너뜨립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밤이 새도록 그물을 던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것도 잡지 못한 실패의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절망의 자리에서 울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집안에 갇혀 꼼짝하지 못하고 불안에 떨고 있을 때에, 삶의 현장에서 빈 그물을 들고 낙심해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어느덧 날이 새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없나이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그 결과는 없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몸도 마음도 다 지쳐 있는 그 순간에 왠 낯모르는 사람이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지라고 합니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제자들은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리고는 그물을 끌어올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제자들 가운데는 3년 전에 주님께서 자기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에 있었던 사건을 생각합니다.  그 날도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지만 빈 배로 돌아오는 그들에게 주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대로 했을 때에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혔던 일을 말입니다.  그 순간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저분은 주님이시다."  주님이시다는 말에 베드로는 바다로 뛰어내렸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여기에서 본문을 다시 한번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 잡는 어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뱃사람, 그래서 비린내 나는 그물을 만지면서 평생을 갈릴리 바다에서 살아야 할 베드로를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낚는 어부로, 위대한 사명자로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고 저주했습니다.  그야말로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부활하신 후에 한 번 이상 베드로를 만나주셨습니다.  그렇게 만나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자기 자책감에 빠집니다.  그 자신이 예수님을 대면하기가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면목이 없었습니다.  나는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  예수님 앞에도 죄송하고, 자기 자신을 볼 때에도 부끄러워서 그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갈릴리 바다로 갔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자신의 과거에 묶여서 사명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지난날의 아픈 잘못을 기억하면서 제자됨을 포기했습니다.  자신의 쓴 뿌리에 스스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오늘 주 앞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과거에 얽매여서 오늘을 살지 마십시오.  우리의 신앙은 과거에 얽매여 있는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래를 향한 현재 진행형이어야 합니다.  미래에 이루어질 어떤 목표를 끝없이 추구하고 바라보면서 오늘을 사십시오.  사도 바울도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오직 앞에 있는 사명을 향해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지나온 날들은 다 잊어버리십시오.  믿음의 사람은 과거를 교훈으로 삼아야 하겠지만 그러나 과거를 붙잡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과거는 어떻게 하시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과거를 붙잡고 일을 이루시지도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실패의 빈 그물을 들고 좌절감에 젖어 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절망하고 있을 때에 찾아오십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좌절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내 인생이 마지막 벼랑 끝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예수님은 찾아오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예수님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아오신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찾아오시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집니다.  불안이 평안으로 바뀌어집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집니다.  제자들을 찾아오셨던 예수님! 그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본문 5절의 말씀을 다같이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호칭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얘들아!"  얘들은 눈앞에 누군가 있으면 있다고 하고 없으면 없는 줄 압니다.  눈앞에 있으면 나를 도와줄 수 있고, 없으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을 키워보았지 않습니까?  아이가 아빠 얼굴을 알아 볼 때쯤 되어서 아빠 얼굴을 알아보고 생글생글 웃으면 간장이 녹습니다.  그런데 아이를 쳐다보다가 장난을 칩니다.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아이가 울먹울먹하면서 울려고 합니다.  금방 눈앞에 있던 얼굴이 온데 간데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다가 손바닥을 치우면서 "까꿍!" 하면 깔깔대고 웃습니다.  다시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 금방 눈앞에 있던 아빠가 사라진 것입니다.  "아빠가 어디 갔지?"  다시 울려고 합니다.  손을 떼면서 "까꿍!" 하면 아이는 깔깔대고 웃습니다.  아이들은 이렇습니다.  눈앞에 있는 손바닥으로 가리기만 해도 아빠가 어디로 사라진 줄 압니다.  이것이 얘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하는 행동과 생각이 얘들 생각이고 얘들 신앙수준이라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인생의 모든 죄 짐을 담당하셨습니다.  심판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며 부딪힐 수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 가장 근본적인 문제, 가장 엄청난 문제를 주님께서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눈앞에 그분이 보이지 않는다고 마치 하나님이 돌아가신 것처럼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분인 것처럼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내 앞에 일어난 그 사건 하나에 매달려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헌신도 하지 않습니다.  뒤로 멀찍이 물러나서 방관자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애들 생각, 애들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와 제자들이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노력하며 땀흘리며 일하고 공부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없이 하겠다는 생각이 문제였습니다.  애들 생각을 버리십시오.

실패의 밤을 지내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인생에서 얼키고 설킨 문제 때문에 울부짖으며 몸부림치는 분이 계십니까?  지친 몸과 마음으로 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실망과 좌절의 밤을 보내는 빈 그물을 들고 인생을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하십니까?  지금까지 믿어도 소용이 없다고 깨끗이 포기하고 이제는 내 살 길이나 찾자고 생각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까?  그래서 헌신과 기도의 자리를 버리고 멀찍이 주저앉아 있는 분이 계십니까?  바로 그 생각이 얘들 생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도 그물을 내리면 고기가 잡힐 줄 알았습니까?  "이제는 내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제는 어린아이의 신앙을 버리십시오.  아직도 젖병이나 빠는 그런 애들 신앙에서 벗어나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들을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빈 그물을 들고 새벽 바다를 저어오는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너무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제자들을 파도소리만 들려오는 갈릴리 바다에 고아들처럼 버려 둘 수가 없어서 찾아오신 것입니다.  외로운 제자들, 절망으로 예수를 떠난 제자들을 그냥 버려 두실 수가 없어서 찾아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가 힘들 때도 기쁠 때도 나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고독한 분이 있습니까?  망망한 바다에서 흔들리는 배 한 척처럼 아슬아슬한 삶을 사는 분이 있습니까?  아무도 나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외로워하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안심하십시오.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아니 주님께서는 언제나 한결같은 모습으로 당신 곁에 계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이 왜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까?  그것은 베드로의 상처를 치유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실패한 과거를 묻고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과거를 묻지 않습니다.  그의 실수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원인을 추궁하지도 않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런데 실패가 인생을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실패로 인한 좌절된 그 마음이 힘들게 합니다.  실패한 그 사건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무너진 내 마음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이 마음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나간 과거의 실패는 잊어버리십시오.  아픈 상처도 잊어버리십시오.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들도 거의가 다 실패의 경험을 뼈저리게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패를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기회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므로 실패를 인생의 파멸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는 기회로 만드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 방황하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지금 예수님은 베드로라 부르지 않고, 시몬이라고 부르십니다.  시몬은 주님을 알기 전에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 시절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된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하시면서 주신 반석이라는 뜻을 가진 좋은 이름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베드로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은 견고하고 단단한 반석의 베드로가 아니라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그 이름을 부르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했던 베드로, 이제는 사명과 비전을 잃어버리고 다시 물고기를 잡으러 갈릴리 바다에 돌아온 그는 반석은 고사하고 작은 돌맹이도 되지 못한 시몬이었습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낭패와 실망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베드로가 아닌 시몬을 보고 계십니다.  인생의 바다에서 밤이 맞도록 수고하였지만 결과가 없는 시몬을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풍랑이 일어나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생과 수고로 지쳐있는 그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주님의 이 질문은 본문 그대로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방금 잡은 신선한 고기들과 배와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면서 "이 모든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의도하신 내용이 무엇인지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하고도 확실한 것은 이것입니다.  "베드로야,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주님께서는 이 질문을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세 번씩이나 하십니다.  이 어색한 질문을 주님께서는 왜 세 번씩이나 다잡아서 물으셨을까?

주님께서 이렇게 세 번씩이나 물으셨던 것은 영적으로 깊은 상처를 입고 방황하는 베드로를 치유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는 마태복음 26장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린다 해도 저는 절대로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제 목숨도 버리겠다"고 선언했었습니다.  언제나 자신만만하게 신앙을 고백했던 베드로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다음에 새 계명에 대해서 말씀하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때 베드로는 요한복음 13장 37절에서 자신만만하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을 바꾸면 "주님, 나는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하는 말과 같습니다.  아주 자신 있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의 순간에 지금까지의 그의 모든 고백과 결심과 믿음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저주하면서 부인했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 남기 위해서 얼굴을 감싸고 줄행랑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울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 이후에 베드로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어쩌면 그는 여러 날을 통곡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실패자였습니다.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결국 영적으로 병든 그는 갈릴리 바다로 떠나갑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결과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를 떠난 인생은 성공 같아 보이지만 실패입니다.  주를 떠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영과 육이 지칠 대로 지쳐 있는 베드로 앞에 자기가 부인했던 그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앉아 계십니다.  그리고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으로 고기를 구워서 "배고픈데 먹어라"고 하시면서 자기 앞에서 섬기고 계십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이 못난 놈 같으니"라고 호통을 치면서 망신을 주든지 꾸중을 했다면 오히려 속이 후련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아니하시고, "배고픈데 먹어라.  추운데 불 옆에 오너라."고 하시니 우리말로 말하면 환장하고 미칠 노릇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베드로가 어디 제대로 먹기나 했겠습니까?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고개를 떨군 채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는 숯불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그 숯불은 자기가 예수를 부인하던 자리에서 활활 타고 있었던 장작불을 연상시키기에 아주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그쳐 묻는 예수님의 질문은 마치 자기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그 악몽 같은 순간들을 다시 떠올리기에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그 질문을 받고 대답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겠습니까?

분명히 베드로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고백하던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다 구멍이 나 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처절하게 병들고, 처절하게 지쳐 있는 그를 향해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이 질문은 베드로의 과거를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은 주님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 깨닫게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는 사람은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가 먼저 사랑하지 않으면서 남보고 사랑하느냐고 묻는 사람은 아주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너무 너무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를 향해서 묻고 계십니다.  "베드로야, 너 날 사랑하니?"  이 말은 바꾸어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야, 나는 이 모든 것들, 저 바다와 배와 그물과 물고기와 다른 그 모든 것들보다 너를 더 사랑한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에는 나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한다는 마음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을 세 번 받으면서 예수님의 강한 사랑에 베드로의 심령이 터치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속에 남아 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가 나무 타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있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는 예수님이 자기를 가장 필요로 하실 때에 냉정하게 버렸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경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부끄럽고 어색하지만 대답을 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저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이 질문에 세 번씩이나 대답을 하면서 베드로는 치유 받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입었던 깊은 상처로부터 그는 치유되고 있었습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랑의 힘은 강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합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계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치유를 받았는지 여러분, 베드로의 남은 인생을 한번 보십시오.  성경을 보면, 베드로가 그 후로 다시는 자기의 아픈 과거를 가지고 씨름하고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했다는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모든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씻음 받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받은 위대한 사명자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치유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제자들이 있어야 하는 자리는 갈릴리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거기서부터 복음운동 즉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해야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받는 자의 삶입니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베드로가 로마에 들어가 전도하고 있을 때 큰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로마를 잠시 떠나 피하는 것이 좋겠다는 교인들의 권유도 있고 해서 로마 시가지를 벗어나 교외로 떠나가고 있었습니다.  새벽녘 로마 언덕을 넘어가고 있을 때에 아침 햇살을 타고 예수님께서 걸어오고 계셨습니다.  깜짝 놀란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쿼바디스 도미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야, 나느 네가 버리는 양 무리를 돌보기 위하여 로마로 들어간다.  또 십자가에 매달려 죽기 위하여 로마로 내려간다."  거기서 베드로는 자신의 망명길을 돌이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영적으로 병든 베드로를 치유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도 동일하게 치유의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사랑의 주님을 만나보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느껴보십시오.  그분은 당신 한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사랑의 주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결코 잊지 마십시오.  주님은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원합니다.  듣는 자는 깨어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자가 일어날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 속에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하는 주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는 심령마다 어떤 상처를 입었던지 나음을 입게 될 것입니다.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씨름하던지, 어떤 실패를 맛보았던지, 어떤 절망의 자리에 떨어져서 고통을 하던지 간에 주님의 사랑이 그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들으면서 나도 모르게 고백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부끄럽지만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다 치유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 앞에서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헌신은 말로 되지 않습니다.  계산해서 되지 않습니다.  나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안 됩니다.  오직 주님이 기뻐하시는 헌신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헌신은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에게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충성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있으면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순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우리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으로부터 말할 수 없는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실패와 좌절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 몫에 태인 십자가를 지고 중단 없이 사명자의 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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