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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존 토마스 선교사의 한국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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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명섭 박사(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한국의 성결운동은 초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민족주의자로부터는 친일파라는 오해를 받았고, 기존교회로부터는 뜨거운 구령의 열정과 성결의 복음 때문에 이단시되기도 했다. 한국의 성결운동가들은 이런 문제들에 직면하면서 외국인 선교사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한국에 들어온 선교사가 존 토마스(John Thomas) 목사였다. 그는 영국의 스타 홀(Star Hall) 선교회에서 핵심 사역자로 일하다가, 한국선교의 책임자로 일해 달라는 동양선교회의 요청을 받고, 1910년 11월에 동양선교회 최초의 재한선교사로 입국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일제 경찰에 의해 구타당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1920년 2월에 한국을 떠날 때까지 한국사역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있으면서 한국성결교회의 초석을 마련하는데 기여했다.

무엇보다도 토마스는 동양선교회 경성성서학원(서울신학대학교 전신)의 초대 원장으로 학교의 기틀을 마련하고, 제 궤도에 올려놓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성경공부반 형식으로 운영되던 기존의 체제를 3년 과정으로 학제를 정비하여 보다 체계적인 교육기반을 마련하였고. 1912년에는 최초로 독립된 성서학원 건물을 완성하여 외적 인프라도 구축하였다. 그리고 경성성서학원의 교육비전을 “성령 충만한 순복음전도자의 양성”에 두고, 성서와 현장중심의 철저한 교육을 통해 그 비전을 이루어갔다. 이것은 그가 토착사역자를 통한 선교라는 동양선교회의 선교정책에 충실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당시 한국의 상황에서는 보기 드문 남녀공학 및 부부공학 제도를 경성성서학원에서 실시하여 남녀 모두에게 배움과 사역의 기회를 제공하고자 하였다.

토마스는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의 확장에도 크게 공헌했다. 그는 성서학원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한편, 각 지역의 복음전도관 설립과 그에 대한 순회 선교사역 등을 통해 성결운동의 확장에 기여하였다. 내한 후, 그가 세운 최초의 복음전도관은 부여 규암전도관이었다. 규암전도관은 성서학원생 박재원이 여름방학 중 규암에서 전도활동을 벌인 결과로 생겨났다. 이후 규암전도관은 충남지역 성결운동의 거점이 되었고, 주변으로 성결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은산전도관과 홍산전도관이 차례로 세워졌다. 토마스가 한국을 떠날 때에는 20곳이 넘는 지역에 복음전도관이 세워졌는데, 토마스의 리더십이 그 중심에 자리하고 있었다.

토마스는 복음전도관에 대한 기존교회의 오해를 불식시키는 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내한 이후 그는 교파를 뛰어넘어 장로교 및 감리교 선교사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연합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실제로 장감 선교사들은 토마스의 성결론에 귀를 기울였고, 그도 성결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다면 언제든지 그들과 협력했다. 특히 토마스는 북장로교의 언더우드, 남감리교의 저다인, 영국성서공회의 베시 선교사 등과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그런 가운데 성결운동에 대한 기존 교회의 오해가 풀려졌던 것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사역을 견인했던 힘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신뢰였다. 토마스는 참된 선교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고 믿었다. 예수의 제자들도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야 본격적으로 이방인 선교에 나섰던 것처럼, 오늘의 선교에 있어서도 오순절의 경험은 절대 필수요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성결과 선교를 하나라고 보았다: “성결파의 제일 원칙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요, 그를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어떻게 온전한 성화와 성령세례를 고백하는 사람이 동시에 우리 주님의 마지막 명령에 불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즉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땅 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주님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토마스는 초대 한국감독 겸 성서학원 원장으로 사역하면서 한국성결교회의 초석을 놓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1919년 3월 20일 충청남도 강경에서, 토마스가 일제 경찰로부터 구타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당시 토마스는 새로 구입한 강경 복음전도관을 시찰할 목적으로 해당 경찰서와 영국영사관에 여행신고를 하고 강경에 내려갔다. 거기에는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는 이장하 목사도 동행했다. 그들이 현지 사역자와 함께 복음전도관 부지와 사택을 살피고 있었는데, 5명의 젊은이들이 “만세”를 부르면서 언덕을 내려오더니 그들의 곁을 지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 권총을 든 4명의 군인과 몇몇 순경이 따라 내려오더니, 다짜고짜로 토마스 일행을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 마디의 설명도 들으려고 하지 않고, 토마스 일행을 경찰서로 끌고 갔다. 경찰서로 가는 도중에 토마스는 경찰에게 자신의 여권과 여행증명서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경찰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 땅에 던져 버렸다. 이에 토마스가 그것을 주우려고 하자 그를 넘어뜨리고 다시 머리를 무수히 때리고 발로 찼다. 그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일본인이 난데없이 뛰어들더니 팔뚝만한 몽둥이로 토마스를 내리쳤다. 토마스와 함께 했던 한국인 사역자들도 아주 잔혹하게 맞았으며, 한 명의 얼굴에서는 선명한 피까지 흘러내렸다. 특히 한국인 사역자들은 경찰서에 도착해서도 심한 구타를 당했다.

사건 직후 병원에서 검사를 받은 결과 토마스의 몸에서는 29개의 상처가 발견되었다. 그 상처는 영구적인 불구가 될 것인지 아닌지를 당장 판단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결국 이 문제는 영국정부와 일본정부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영국 정부가 5만 불의 배상금을 제시하자, 일본정부는 배상의 조건으로 토마스의 한국추방을 요구했다. 이에 한국사역을 계속하기 원했던 토마스는 영국정부에게 배상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말도록 부탁했다. 하지만 영국정부는 그것을 거부했다. 그래서 토마스는 할 수 없이 한국을 떠나 미국인과 결혼한 두 딸이 있는 미국으로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한국교회에 대한 후원운동을 전개하는 등 토마스의 한국사랑은 계속되었다.

- 출처 : 크리스천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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