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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 때 그 일, 끝나지 않았다 (창 4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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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그 일, 끝나지 않았다 (창 42:1-8)


어떤 가정이 등록해서 심방을 갔더니 그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는 행복한 가정임을 직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자매의 마음 깊은 곳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1992년 6월, 서대문구 남가좌동에 위치한 친정집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출산 후 꼭 20일째 되던 어느 날 오전, 친정어머니는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면서 날씨도 덥고 하니 현관문을 빼꼼이 열어놓고 나갔습니다. 5분여가 지났을까 집안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안방에 뉘여 놓았던 아이가 없어진 것입니다. 밖으로 뛰쳐나와 아무리 찾아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지금 그 아이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크고 있을 것입니다. 아이를 유괴하여 지난 20여 년 동안 마치 자기가 낳은 것처럼 키우고 있는 당사자는 어떨까요? “요즈음 간단히 친자(親子)를 판별해낸다는 DNA검사라도 몰래한다면, 그래서 등통난다면 어쩌지?” 그야말로 좌불안석일 것입니다. 

이 설교가 방송으로 전파됩니다. 혹시 이 설교를 듣는 자 중에 18년 전 1992년 6월24일, 서대문구 남가좌동의 한 아파트에서 안방에 뉘여 놓은 아이를 몰려 훔쳐 지금 마치 내 딸처럼 위장하여 키우고 있는 자에게 이렇게 전하고 싶습니다. “그때 그일,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요셉스토리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애굽에 칠년흉년이 들었습니다. 애굽 인근의 가나안도 칠년흉년을 피해갈 수 없었습니다. 야곱의 귀에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이 소식이 자식들 귀에는 들리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자식들은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주저하고 있습니다. 곡식을 구하기 위해 애굽으로 가는 것 자체가 대단히 위험했기 때문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서 기근을 만났을 때 애굽으로 내려갔던 적이 있습니다(창 12:10). 이삭도 마찬가지로 기근을 만났을 때 조금도 망설임 없이 애굽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창 26:3). 이것은 가나안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이 위험하지 않았으며, 당시 서로 간에 교류가 빈번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왜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을까요? 애굽은 동생 요셉을 팔아넘긴 곳입니다. 때문에 의도적으로 애굽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애굽이라는 말만 나와도 그때 그일, 자신들이 지었던 죄가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입에서 ‘애굽’이라는 말이 터져 나옵니다. 아버지 야곱은 ‘그때 그일’이 있은 후부터 자식들의 행동에서 미심쩍은 부분들이 있음을 발견한 듯합니다. “야곱이 요셉의 아우 베냐민은 그의 형들과 함께 보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의 생각에 재난이 그에게 미칠까 두려워함이었더라”(창 42:4). 야곱이 공개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요셉의 실종사건’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열 형제들은 지난 20년 동안 단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간 애굽에서 저들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일을 만납니다. 총리라는 자가 양식을 구하러온 자신들을 정탐꾼으로 몰아붙입니다. 그러자 저들은 요셉의 실종과 관련된 자신들의 가정 내력까지 세세하게 다 아룁니다(창 42:13). 저들의 내면세계에 어떤 사건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들 마음속에 평강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죄는 내 마음에서 제일먼저 평안을 빼앗아갑니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죄는 언젠가 수면위로 떠오르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눅 12:2-3).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창 4:10). 죄는 결국 드러나게 됩니다. 

이 죄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내 마음에 평안을 앗아가는 죄, 언젠가는 수면위로 떠올라 나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죄를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을까요?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창 42:21). 

요셉의 형들은 요셉 앞에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사자인 요셉 앞에서 저들이 먼저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도록 만드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보다 먼저 말입니다(창 44:16).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하라 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옥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마 5:23-25). 

무엇보다 먼저 당사자에게 고백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이 부분을 간과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면 끝난다는 생각 말입니다. 물론 죄의 회개는 하나님께 해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당사자를 도외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용서함을 받으면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다시는 그 죄에 대해 부담감을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마지막 날에 그 죄를 직고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내가 그들의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그들의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8:12).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4).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으시는 부분을 굳이 고백하고, 직고하게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요, 축복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때 그일’, 나에게는 없습니까? 있다면 무엇입니까?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영원히 감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사 1:18).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때 그일’, 처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먼저 당사자에게 용서를 구하고, 다음 하나님 앞에 진지하게 회개함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 평안과 기쁨을 맛보는 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옥성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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