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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살후 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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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에 합당한 교회 (살후 1:11-12)

 
"Good News or Bad News?"
미국 사람들이 즐겨 쓰는 표현입니다. 뭔가 전할 소식이 있는데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 중에 어떤 소식을 먼저 듣고 싶으냐고 묻는 표현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이 표현을 사용하는 것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Good News or Bad News?"
보통 사람들은 좋은 소식부터 먼저 듣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지혜로운 사람들은 나쁜 소식부터 먼저 듣고 싶어 합니다. 마치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고 하는 것처럼... 이런 것을 볼 때 미국 사람들은 그리스 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합니다. 영혼과 육체, 선과 악, 흑과 백,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 등 모든 것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 사상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늘 봉독한 본문 말씀 바로 앞에 기록되어 있는 데살로니가후서 1장 3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그 성격이 좀 모호한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좋은 소식 같고 또 어찌 보면 아주 나쁜 소식 같지 않습니까?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쁜 소식을 듣고 감사할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는다고 한 것은 결코 좋은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지극히 나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무 자르듯이 둘로 나누는 것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말해서 데살로니가 교회의 형편에 관한 소식은 나쁜 소식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좋은 소식, 기쁜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여러 가지 모양의 박해와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괴롭히는 악한 세력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도 있었고 또 교회 밖에도 있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모든 환난을 데살로니가 교회는 인내와 믿음으로 참고 견디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다른 교회들 앞에서 자랑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다만 자랑할 뿐 아니라 그 믿음이 더욱 자라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어떤 점에 대해서 그가 늘 감사하고 있었습니까?

먼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믿음을 잃어버리기 쉬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형편은 평안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믿음 때문에 실제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얼마나 대견합니까? 그들은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믿음이 더욱 자라고 있었습니다. 결코 인간적인 방법이나 인간의 의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찍이 주님도 믿음이 적은 사람은 책망하셨습니다.
반면에 큰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이 자기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인은 계속해서 주님께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냉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나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더욱 끈질기게 매달렸습니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주님이 감동을 받으셨습니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믿음이 더욱 자라는 것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또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각기 서로 풍성하게 사랑하는 것 때문에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더욱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환난 중에 믿음을 지키는 것도 어렵지만 사랑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환난과 핍박을 당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 사랑이 또 어떻게 더 풍성하게 될 수 있느냐는 말입니다. 풍성하다는 것은 넘치도록 많다는 말이 아닙니까?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서로 사랑하되 더욱 풍성하게 사랑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총을 생각할 때에 그들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고 또한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사랑이 풍성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사랑을 실천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땀을 흘렸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누가 시켜서 억지로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며 즐겁게 서로 사랑을 실천했을 것입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지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더 큰 기쁨을 맛보게 마련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창세기 29장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외삼촌을 칠 년 동안 섬겼습니다. 외삼촌의 작은 딸 라헬을 아내로 삼고 싶어서 칠 년 동안 머슴처럼 일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떤 마음으로 라반을 섬겼다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습니까?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창 29:20)
뜨겁게 사랑했기 때문에 머슴처럼 섬기는 것도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데살로니가 교회가 사도 바울이 칭찬한 것처럼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 같습니까?
그들이 정말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 같습니까? 그들이 정말 서로 사랑함이 더 풍성했을 것 같습니까? 그들의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았으면 애써 이 편지를 써 보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사랑이 풍성했으면 이미 한 번 편지를 써 보냈는데 왜 또 이 편지를 써 보냈겠습니까? 이미 편지를 써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완전히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부랴부랴 또 이 편지를 써 보냈던 것입니다. 물론 믿음을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잃어버릴 수도 있었기 때문에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 급하게 붓을 들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랑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팎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 때문에 그 사랑도 식을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해서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고난 당하는 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오히려 자랑스럽다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살후 1:4)
뿐만 아니라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라는 표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장차 하나님께서 친히 갚으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로 환난 받게 하는 자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환난을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살후 1:6~7상반절)
그렇습니다!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끝이 아닙니다. 머지않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바로 그 심판까지 믿는 것입니다.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합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하여 항상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합니까? 먼저 그들을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도록 위하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믿음을 잃지 않도록, 그리고 사랑이 더욱 풍성하도록 위하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이 오직 믿음으로 모든 선한 일들을 기쁘게 감당할 수 있도록 위하여 기도한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존재 목적은 아주 분명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 부르심을 받은 우리의 삶의 목적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개혁자들이 소리 높혀 외쳤던 것처럼 오직 주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 어떤 다른 이름이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우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마지막 때에 비록 환난과 핍박이 있을지라도 오직 성령의 도우심을 힘입고 믿음과 사랑으로 끝까지 싸워 이김으로써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참으로 복된 여러분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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