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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행복한 인생 (요 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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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생 (요 1:12-14)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이런 우화가 있습니다. 어느 부잣집 뜰에 난초가 자라고 있었는데, 그 난초사이에 두꺼비 한 마리가 와서 앉아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주인이 와서 난초를 아주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가꾸는 애지중지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두꺼비는 너무 부러운 나머지 난초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나는 목이 말라도 누가 물 한 모금 주는 이가 없고, 뱀은 날마다 나를 잡아먹으려고 좇아다니고 어디를 가나 천대만 받는 천덕꾸러기인데 너는 무슨 팔자가 좋아서 주인이 그렇게 곱게 키워주고 사랑해주느냐! 너는 참 행복하겠다.”하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난초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너 그것 잘 몰라서 한 소리야. 나는 발이 없으니 목이타도 주인이 물을 줄 때까지 기다려야하고 소가 와서 나를 뜯어먹어도 도망가지도 못하고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데 너는 발이 있지 않니! 그래서 너는 자유스럽게 목이 마르면 물도 마시고 도망가고 싶을 때는 도망도 가지 않니!” 그 말을 들은 두꺼비는 비로소 난초가 갖고 있지 않는 또 다른 행복이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화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만 그 가운데 하나의 진리를 담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소유한 것에 만족이 없고 그것 때문에 불행하다고 느끼며 살아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합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마 여러분도 다 그러실 겁니다. 말하자면 누구에게나 행복 추구의 본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든 인간에게 마땅한 기본 권리입니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소위 ‘행복추구권’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맹자는 인생을 사는데 정말 재미있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맛있는 것을 먹는 것과 성을 즐기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 사람들이 정말로 이것은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섹스도 사람들이 그렇게 탐닉하고 빠져드는 것을 보면 엄청난 즐거움으로 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손에 넣으면, 그런 것들을 원하는 만큼 소유하고 즐기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에 불을 켜고 쫓아다닙니다. 그러나 명예와 권세가 행복을 줍니까? 행복을 주었다고 말한 사람이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만약에 이런 것들이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선진국에서 사는 팔자 좋은 사람들은 벌써 무릉도원에서의 인생을 구가하고 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선진국일수록 왜 자살하는 사람이 많습니까? 왜 아스피린이나 진통제를 복용하는 사람이 그리 많습니까? 왜 밤이면 진정제나 수면제를 먹어야 자는 사람이 그토록 많습니까? 왜 이처럼 행복을 추구하고 또 그것이 행복인 줄 알고 취했지만, 그것이 내 인생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죄 때문입니다. 무엇 때문이라고요? “죄”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싫어합니다. 잘 기억하십시오. 죄는 우리의 눈을 가립니다. 우리를 속입니다. 죄는 행복을 주지만 그 행복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죄에 끌려가면 일시적으로는 굉장히 만족스럽고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섹스를 추구하든지, 돈을 추구하든지, 세상의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지 죄는 우리를 잠깐 동안은 행복을 느끼게 만듭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입니다. 그 속임수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거짓입니다. 쾌락도 우리에게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재물도 행복을 주지 못합니다. 명예나 권력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이 죄는 우리 인간의 행복뿐만 아니라 죽음까지 몰고 가는 무서운 것입니다. 롬5:12절에 보면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사람이 죄의 노예가 되었고, 그 결과 죽음이 모든 사람 위에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죽음의 씨를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누구든지 구원을 받지 못하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서울시만 해도 하루에 463명의 아니가 태어난다고 합니다. 태어난 아이들을 보세요. 얼마나 천진난만 합니까? 깨물어 주고 싶고 기쁨이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죽음의 씨를 안고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한 카운트다운이 시작이 됩니다. 여기에는 한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가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구원 받을 수가 있습니까? 노력하면 영적인 생명을 얻을 수가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엡2:5절에 보면 우리는 이미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시체가 무엇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시체가 스스로 몸부림친다고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시체에게 기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우리 힘으로나 노력으로 영적 생명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인생에게 참된 소식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읽었던 요1:12절의 말씀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선포하십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예수를 말합니다. 이 예수의 뜻은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말입니다. 예수 바로 그 분이 내 인생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의 삶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내 삶이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일 때는 모든 일을 나 자신이 주관하므로 자주 좌절과 혼란에 빠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일 때는 모든 일을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시므로 하나님의 계획과 일치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사랑이 강수처럼 쏟아져 들어옵니다. 지금까지 구멍이 나 있던 내 마음에 시원한 하늘의 강수가 가득 찹니다. 하나님의 의의 태양빛이 은빛처럼 반짝이면서 내 가슴속에 놀라운 하늘의 찬송이 울려 퍼집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마음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덮어줄 수 있고 그를 대신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본 분이 있습니까? 저는 서너 번을 봤습니다. 제가 어릴 때 대한극장에서 그 영화가 처음 개봉됐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서 사람들이 한 1킬로미터나 줄을 섰습니다. 그런데 그 영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복수를 하려고 칼을 들고 날뛰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자마자 그 손에서 칼이 떠나고 원수를 사랑으로 받아주었다는 것이 그 주제입니다. 

이 영화 대본을 써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던 사람이 월리스란 사람입니다. 그분이 처음에는 크리서천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장군이고, 스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가만히 보니 아니꼽기 짝이 없습니다. 거짓말 같은 것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이라는 사람들이 저렇게 속고 있는데 내가 연구를 좀 해서 예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증거해보여야겠다.’고 생각하고는 그의 친구 잉거슨과 둘이서 유럽과 미국에 있는 도서관을 찾아다니면서 예수님의 부활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확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전부 모아가지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대한 반박 논문을 쓰려면 무엇을 가장 많이 읽어야 합니까? 성경을 제일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진실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아, 내가 도무지 이 진실을 거짓말이라고 할 자신이 없구나.’하고 펜대를 집어던지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주여, 예수님은 나의 구주입니다. 나의 구원자입니다.’하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가 크리스천이 되어 쓴 작품이 바로 벤허입니다. 

도대체 그 예수가 누구이길래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가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송명희씨를 여러분이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는 뇌성마비로 한번도 정상적인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뇌성마비로 온 몸이 비비 꼬여서, 말 한마디를 하려고 하면 죽다 살아나는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해야 할 정도로 일급 장애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얼마나 많은 시를 썼는지 모릅니다. 그 시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슴에 저미어 오는 감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가 쓴 시 가운데 "그 이름"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예수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을 그 이름 속에 있는 사랑을 그 사랑을 말할 수 없어서 그 풍부함 표현 못해서 비밀이 되었네 그 이름 비밀이 되었네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지만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 뇌성마비에 걸려 몸을 쓰지 못하는 한 소녀에게도 예수님의 이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노래한 그 노래들은 지난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수없이 많은 노래들의 사연들을 보면 꼭 예수 이름 때문에 복 받고 장수하고 잘되고 돈 많이 벌어서가 아니라 사실은 오히려 지금 겪고 있는 고난과 역경 그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이름과 고통의 한 복판에서 이 이름 하나 때문에 위로 받고 용기를 얻었고 힘을 얻었던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어떤 분은 병상에서 그 예수를 그 이름을 부르면서 힘을 얻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형수로 죽어가면서 뒤늦게나마 그 이름 예수를 믿은 것에 너무 감격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사형장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도 그 이름 때문에 죽을 수 있다는 것에 감격하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드립니다. 어떤 사람은 그 이름은 건축자가 내버린 돌맹이처럼 하찮게 내버렸지만 어떤 사람의 가슴속에는 그 것이 어느 보물보다 더 귀하고 소중하고 귀한 보석으로 품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 오늘 왜 교회가 여러분을 여기에 초청을 하신 줄 아십니까?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한 분들이 왜 그렇게 성가시게 하면서 까지 이 자리를 오게 하십니까? 삼고초려(三顧草廬)란 말을 아십니까? 유비가 융중에 있는 제갈량을 세 번이나 찾아가는 정성을 보였다는데 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유비는 눈보라 치는 추운 겨울에도 두 번씩이나 허탕을 치며 성의를 다해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봄이 되자 사흘이나 목욕재계를 한 후 다시 제갈량을 찾아갔습니다. 

어떤 면에서 삼고초려는 여러분을 여기까지 인도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유비가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기 위해서 제갈량을 찾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여러분을 찾아간 것입니다. 유비의 발걸음을 재촉한 것이 제갈량의 탁월한 재능이었다면, 우리의 발걸음을 포기 할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을 모른 채 지옥으로 걸어가는 불쌍한 영혼 때문에, 그 한 사람의 구원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여기까지 여러분을 초대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구원자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했습니다.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는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예수 외에는 하나님이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전혀 주시지 않았습니다. 이런 면에서 기독교는 대단히 독단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도대체 기독교의 그 독단적인 이야기 때문에 늘 비위가 상해.’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종교가 다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고상한 것 같고 인격자 같고 좋아 보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의사가 죽을 환자를 앞에 놓고 의사들끼리 의논하면서 한 사람이 “배를 쨉시다.”하면 다른 의사들이 “그것도 좋지요.”하고, 또 한 사람이 “주사만 줍시다.”하면 다들 “아, 그것도 좋지요.” 한다면, 그 의사들은 사람 죽이는 의사입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는데, 불교도 좋고 마호메트도 좋다고 하면, 이게 어디 정신 나간 소리가 아니겠습니까? 기독교는 굉장히 독단적입니다. 진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만 열어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볼 때는 굉장히 편협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참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절대 타협하지 않습니다. 

예수 외에는 우리에게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그 분 안에서만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비록 이 땅위 것을 가지거나 누리지 못할찌라도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된 기쁨이 바로 예수 안에 있습니다. 그분을 여러분이 마음에 영접하고 사망의 몸에서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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