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믿음의 의 (롬 4:1-8)

  • 잡초 잡초
  • 340
  • 0

첨부 1


믿음의 의 (롬 4:1-8)

   
성경의 핵심 주제는 “구원”입니다. 성경 66권 전체가 이 구원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우선 성경 전체의 서론이라 할 수 있는 창 1-11장을 보면 “시작”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천지 만물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인간이 어떻게 이 땅에 존재하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중요한 것은 “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왜 인간에게 구원이 필요한가를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들은 한 마디로 구원이 필요한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다음으로 성경 전체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창 12장 이하를 보면 그런 대하 드리마가 없을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그 방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로 요약해 본다면 하나님께서 인간 구원을 위해 어떻게 행하셨는가에 관해 말씀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선민 공동체를 만드셨고, 이 공동체를 중심으로 인간 구원을 이루시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내용입니다. 그러다 급기야 외아들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시고, 이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에는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에 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인간이 성경에 제시되어있는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멸망의 길로 걷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구원에 관해 안내해 주는 성경을 보면서도 잘못된 구원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에서 그런 안타까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행위의 의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논증을 시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행위를 통해서 의를 얻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행위의 의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안타깝게도 이것이 잘못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행위의 의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도덕적인 의입니다. 한 마디로 착하게 살면서 쌓아가는 의를 말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선행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을 선행으로 쌓은 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에서 중요한 힌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농촌에 친구도 없이 외롭게 그리고 인색하게 살고 있는 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이 부인이 자기 채소밭을 가꾸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배고픈 거지가, "마님! 먹을 것 좀 주세요."하고 구걸을 했습니다. 

이 인색한 부인은 탐스럽게 열린 토마토나 오이, 가지 같은 채소는 아까워서 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뭐 하나 줄 것이 없나 하고 채소 밭 주변을 돌아보다 밭고랑 언덕에 씨가 잘못 떨어져 자라고 있는 무 한포기가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선심이나 쓰듯이 그 무를 거지에게 던져주었습니다. 이 부인으로서는 그나마 평생 처음 선행을 한 셈이었습니다.

얼마 후, 이 부인이 죽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간 곳이 지옥이었습니다. 이 부인은 거세게 항의를 했습니다. “내가 왜 이런 지옥에 와야 하느냐? 나도 세상에서 살 때 선행을 한 일이 있다.” 담당 천사가 무슨 선행을 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 때 부인은 궁색하지만  "아무 때 배가 고파하는 거지에게 무 한 포기를 준 일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때에 천사는, "한번 확인하고 오겠다."고 하고는, 창고에 들어가서 여인이 행한 착한 일을 찾아보니, 과연 시들시들한 무 한 포기가 여인의 이름 밑에 놓여 있었습니다. 천사는 그 무 한 포기로 부인을 건질 수 있을까 하여 무 잎을 들고는 부인더러 무 밑 둥을 단단히 잡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지옥에서 낙원을 향하여 날아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옥에서 천국을 행해 날아가던 도중 무 잎줄기가 끊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지옥으로 떨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인간의 선행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옥에서 저 천국으로 붙잡고 날아갈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선행의 끈을 만들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행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행위의 의는 종교적인 의입니다. 한 마디로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쌓아가는 의를 말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의무를 철저하게 준행하며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습니다. 천국에 갈 수 있는 기준을 종교적 헌신으로 쌓은 의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이 종교적인 의를 추구한 사람들의 대표적인 예로 바리새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로부터 종교적 열심에 대해 인정을 받고 있던 부류의 신앙인들이었습니다. 여기서 “바리새”라는 말은 분리주의자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땅의 백성이라 하여 율법을 모르는 자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들이라고 비난하면서 그들과 구별된 삶을 살고자 한 사람들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전해져 내려온 율법을 체계화해서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금식, 기도, 예배,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규정을 문자적으로 철저하게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 중에 서기관들은 일생을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던 율법의 권위자들이었습니다. 

마 5:20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도 저들의 종교적 의를 높이 평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는 저들의 열심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종교적인 의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 종교적인 의는 사람들 앞에서는 대단해 보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종교적인 의가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거리는 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구원 받을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도 이 종교적인 의를 자랑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종교에 적을 두면 그 자체로 구원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렸을 적 옆 집 할머니가 생각이 납니다. 이 분은 사월 초파일만 되면 꼭 절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식구 수대로 절 마당에 연등을 매달았습니다. 출가한 딸 사위 외손주까지 다 등을 달았습니다. 심지어 사위가 목사인데도 연등에 그 이름 적어 달았습니다. 이 할머니 생각에 그 이름을 연등에 달아 매달아야 부처님의 자비를 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등록해서 적을 두면 구원을 받을 것처럼 생각합니다. 

둘째로 종교적인 열심 자체가 구원의 보증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아는 재벌 가운데 절을 8개나 지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에 가지도 않고 불교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도 나름대로 절을 지어 바칩니다. 그 정성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인들 가운데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 봉사하면 하나님께서 원해주시겠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헌금도 많이 하고 전도도 많이 하고 봉사도 열심히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종교적인 의는 칭찬 받을 자격은 될 수 있지만 결코 구원 받을 자격인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 받을 자격은 무엇입니까? 구원을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믿음의 의

바로 “믿음의 의”입니다. 그러면 믿음의 의란 무엇입니까?

본문 3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5절을 보면 또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9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리고 1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상속자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이 말씀들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이런 것들입니다.

첫째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의가 아니라 다만 칭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들입니다. 아무리 선행을 하고 종교적인 열심을 낸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가 될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실 때만 그것이 의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얻는 의는 칭의일 뿐입니다.

둘째로,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칭의를 얻기 위해 해야 할 조건을 제시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칭의를 얻기 위해 어떤 행위를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을 만족시켜드릴 어떤 행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 생각일 뿐입니다. 

본문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특히 10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김을 받은 시점 즉 칭의의 시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은 시점이 할례 받은 이후가 아니고 할례 받은 이전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 시점이 중요할까요? 할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 되는 하나의 전환점이기 때문입니다. 할례 받기 전과 할례 받은 후는 아브라함의 존재 자체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례 받기 전과 세례 받고 난 후가 달라진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칭의를 받은 것이 할례 받기 전이라는 점입니다. 아직 할례를 받기 전에 이미 칭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종교적 행위가 칭의에 미친 영향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칭의를 받게 된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겨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된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첫째,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본문 1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가 믿음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시니라” 

이 말씀은 바울이 창 17장의 내용을 인용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창 17:1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99세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엘 샤다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명칭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처음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 뜻은 함께 하셔서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남자가 100세이고 그 아내가 90세라도 아들을 낳게 할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은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자기 나이가 100세이고, 아내는 90세이지만 그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상황을 보지 않고, 가능성을 보지 않고 하나님만 보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영시가 있습니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 is not shinning
I believe in the love even when I am alone
I believe in the God even when He is silent

유대인이 독가스실에 끌려가 전 대기실에 손가락으로 파서 새겨놓은 시입니다. 저들은 상황을 보거나 가능성을 보지 않고 끝까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 엘 샤다이로 믿는 사람들을 의롭다고 여기십니다.

둘째,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롬 4: 21 이하를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고 나아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여기셨다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새끼를 훈련시키는 방법은 어찌 보면 잔인할 정도입니다. 새끼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새끼가 반쯤 자라면 둥지에서 꺼내어 벼랑 끝에 둡니다. 그리고 밀쳐서 벼랑 끝에서 떨어지게 합니다. 밀쳐진 새끼는 날개를 펴서 팔딱거리며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웁니다. 물론 이 때 제대로 날지 못하고 떨어지면 날아가 낚아챕니다. 그리고 다시 벼랑 끝에 세웁니다. 이런 훈련을 거듭하면서 하늘을 날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백성을 이와 같이 훈련시키십니다.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벼랑 끝에 세우십니다. 그 약속을 믿고 나아가라고 명하십니다. 그들이 믿고 벼랑 아래로 뛰어들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약속은 날개와 같습니다. 벼랑 끝에서 활짝 펼쳐저서 저 약속의 땅으로 날아가게 하는 날개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펴집니다. 믿는 사람들에게만 힘이 되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는 사람들 그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속으면 안 됩니다. 행위의 의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속으면 안 됩니다. 행위의 의는 결코 하나님께서 의로 여겨주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은 믿음의 의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믿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