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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절] 감사, 삶의 열쇳말 (레 23:3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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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삶의 열쇳말 (레 23:39-44)


[“밭에서 난 곡식을 다 거두고 난 다음, 너희는 일곱째 달 보름날부터 이레 동안 주에게 절기를 지켜야 한다. 첫날은 안식하는 날이다. 여드렛날도 안식하는 날이다. 첫날 너희는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 오고, 또 종려나무 가지와 무성한 나뭇가지와 갯버들을 꺾어 들고, 주 너희의 하나님 앞에서 이레 동안 절기를 즐겨라. 너희는 해마다 이렇게 이레 동안 주에게 절기를 지켜야 한다. 이것은 너희가 대대로 길이 지켜야 할 규례이다. 일곱째 달이 되면, 너희는 이 절기를 지켜야 한다. 이레 동안 너희는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의 본토 사람은 누구나 초막에서 지내야 한다. 이렇게 하여야 너희의 자손이,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그들을 초막에서 살게 한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이렇게 모세는 주님께서 명하신 여러 절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주었다.]

• 절기, 시간의 매듭

추수감사절 예배에 참석한 교우 여러분 모두에게 한량없으신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교회는 몇 해 전부터 11월 첫 주를 추수감사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살아온 날들을 감사함으로 돌아보며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자리를 재확인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立冬입니다. 겨울 채비를 해야 할 때입니다. 비록 도시에 살고는 있지만 저는 습관처럼 24절기를 의식하며 삽니다. 절기라는 말은 ‘마디 절節’과 ‘기운 혹은 숨 氣’가 결합된 말입니다. 옛 어른들은 유장하게 흐르는 자연의 순환과 숨결을 나름대로 구획지어 놓고 철에 따라 사셨습니다. 그 숨결을 거스르지 않으니 삶이 여유로웠고 푼푼했던 것 같습니다.

이 맘 때가 되면 나뭇잎도 떨어지고 고니는 끼룩거리며 높이 납니다. 여성들은 무와 배추를 수확해 김장을 담그고, 남자들은 독이나 중두리, 바탱이 항아리를 짚으로 감싸 땅에 깊이 묻었습니다. 요즘이야 집집마다 김치냉장고를 들여놓고 지냅니다만, 살림하는 재미는 좀 덜하지 않나 싶습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은 참 많았습니다. 방고래에 쌓인 재를 고무래로 긁어내야 했고, 바람벽에 맥질도 해야 했습니다.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뚫어놓은 창호문도 새로 해야 했고, 쥐구멍도 막아야 했습니다. 소나 돼지가 살고 있는 외양간에는 떼적을 쳐주어야 하고, 땔 나무도 준비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분주하다고 해서 정신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은 함께 어울려 떡도 하고 술도 빚어 신명나게 놀며 부모의 은혜도 기억하고 하늘의 은혜도 기렸습니다. 그때가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단지 오래된 기억이기 때문일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때에 비해 삶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족해지고 편리해졌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헛헛합니다. 뭔가 고갱이가 쏙 빠진 것 같아 쓸쓸합니다. 엊그제 신문에서 명지대 김정운 교수의 칼럼을 보다가 혼자 피식 웃었습니다. 그는 도무지 그리운 게 없이 사는 자기 삶을 반성조로 돌아보다가 마지막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낙엽이 이렇게 서럽게 지는데도 도무지 그리운 게 하나 없다. 아, 이렇게 맛이 가는 거다.”(한겨레신문, 2010/11/4일 자)

• 순례 축제

그리움이 없다면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세상만사에 다 심드렁해지면 우울해지기 쉽습니다. 김정운 교수는 그리운 것도 없고, 쓸쓸하기만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 제시합니다. 아주 처절하게 고독해 보라는 것입니다. 혼자 길을 떠나 며칠이고 사람과 만나지 말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라는 것입니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가 가끔 삶이 무겁다고 느끼는 것은 내 속에 침묵과 고독의 빈 터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제 가슴을 설레게 하는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순례’입니다. 순례란 물론 종교인들이 자기들의 정체성의 뿌리가 될 만한 곳을 찾아가는 여정을 뜻하지만, 사실은 자기를 찾아가는 먼 여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지순례라 하여 사람들이 패키지로 몰려다니는 순례 말고, 정말 철저히 고독한 순례를 해보고 싶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숨결이 머물고 있는 갈릴리나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걸으셨던 고난의 길via dolorosa을 걷고 싶어 합니다. 

순례란 자기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종교라는 말은 어원인 ‘religare’는 우리를 근원과 다시 연결시킨다는 뜻입니다. 팔레스타인 인근에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일 년에 세 차례, 유월절(Pascha), 칠칠절(Shavuot), 초막절(Sukkot)에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 절기들은 원래는 농사력과 관련되어 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역사적 경험과 결부시켰습니다. 

니산월(우리의 경우 3-4월)에 있는 유월절은 보리와 아마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였는데 나중에는 출애굽 사건과 연결되었습니다. 이른 무화과와 포도 수확을 기념하는 절기인 칠칠절은 시내산에서 맺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념하는 절기라는 의미가 덧입혀졌습니다. 대추야자와 여름 무화과를 수확한 후에 즐기는 초막절은 이스라엘의 광야생활 경험과 결부되었습니다. 각각의 절기마다 자연의 리듬을 배음으로 깔고, 역사적 경험을 주선율로 연주했던 것입니다. 

• ‘서로 함께’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는 순례자들의 행렬을 머리에 그려 보십시오. 물론 혼자 걷는 이보다는 누군가와 더불어 걷는 이들이 많겠습니다만 그들은 모두 하나의 지점을 머리에 그리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슬쩍 그 흐름 속에 섞여 들어가 보십시오. 그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일까요?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안도감 같은 것일까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구 가운데는 ‘소속에의 욕구’도 있습니다. 그것은 식물로 비유하자면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열망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소속감은 그러니까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지금 내 옆에서 걷고 있는 이들은 모두 나의 설 땅이 되어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는 사람들, 두런거리는 소리, 모두 정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장 바니에는 “공동체란 모든 사람이―아니 좀더 현실적으로 보아 대다수가―자기중심이라는 그늘에서 빠져나와 참된 사랑의 빛 속으로 들어가는 장소”(<<공동체와 성장>>, 성바오로출판사; 1992, 17쪽)라고 설명했습니다. 

공동체는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의 기본 조건은 공통의 지향입니다. 이해관계도 다르고, 생각하는 바도 다르던 이들이 순례를 통해 자기 정체성을 확인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순례를 통해 출애굽 사건을 기억 속에 소환하곤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회적 약자들의 신음소리를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들은 순례를 통해 시내산 계약을 떠올렸습니다.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으로 부름 받은 자기들의 소명을 재확인했습니다. 순례를 통해 그들은 조상들이 감내해야 했던 광야생활의 고달픔과 그 속에서 맛보았던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기억하며 감사했습니다. 순례는 그처럼 사람들을 마땅히 있어야 할 마음자리로 이끌어줍니다. 

저는 순례의 축제를 가진 나라를 부러워합니다. 시편 기자는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시89:15)이라고 노래합니다. 좋은 나무에서 딴 열매를 가져오고, 종려나무 가지와 갯버들 나무를 꺾어들고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찬양을 통해 그들은 더 깊이 하나로 엮여집니다. 오늘 오후에 있을 찬양의 가을걷이가 우리의 순례축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오늘, 우리의 감사

추수감사절을 맞으면서 감사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고 보니 정말 눈시울이 뜨거워졌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신지요? 예전에는 찬송가 429장을 잘 부르지 않았습니다. ‘받은 복을 세어 보라’는 말에 대한 저항감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자꾸만 받은 복을 헤아려보지 않으면 우리 인생이 고마움임을 망각하게 됩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 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어르신들이 계신 데서 외람된 말입니다만 나이가 들어서인지 이 찬송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약해지고 또 낙심되는 일이 있을 때 주님이 주신 복을 헤아리다보면 지금의 어려움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마음이 듭니다. 그 문제의 크기가 과장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살다보면 어려운 일도 만나지만, 어떤 경우에도 세상이 우리에게서 빼앗아갈 수 없는 한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그 상황에 어떻게 반응할까 결단하는 자유입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살고 있지만 시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에 따라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감사는 꽉 막혀 버린 길을 여는 열쇳말입니다. 불평불만, 절망, 분노의 감정이 우리를 지배할 때, 받은 복을 헤아리다 보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부드러워진 마음으로 바라보면 길이 보입니다. 우리가 다소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고 있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랑의 빚을 진 사람들입니다. 

저는 목사로 살아가는 것이 복이라고 느낍니다. 목사직은 멍에입니다. 때로는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지만 함부로 벗어버릴 수도 없는 게 멍에입니다. 울면서라도 가야 할 길입니다. 아직 멀었지만 예수님의 마음에 조율하며 살게 하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우리 교회에 ‘생명 세상을 여는 녹색 교회’라는 분명한 지향점을 주셨습니다. 비록 더디기는 해도 그 방향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동행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길지 않은 순례 길에서 좋은 길벗을 만나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신 달란트와 은사를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신과 봉사는 교회 안에서 갇혀선 안 됩니다. 저는 우리 교인들을 생각할 때마다 감동합니다. 올해 결혼한 한 부부는 축의금의 십일조를 곤경에 처한 중증 장애인 가정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물론 익명입니다. 

또 다른 한 가정은 아기 백일잔치를 위해 여퉈두었던 돈을 역시 장애인 가정에 위탁하기로 했습니다. 넉넉해서가 아닙니다. 그저 나누고 싶은 마음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그 마음을 주셨습니다. 자기 것을 덜어내 더 필요한 누군가에게 주는 기쁨을 맛본 사람은 우리를 위해 생명까지 내놓으신 예수님의 마음을 조금씩 이해하게 됩니다. 

교회도 많은 재물을 축적하기 시작하는 순간 타락의 길로 떨어지고 맙니다.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자꾸 나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초막에 머물던 시절을 잊어버리는 순간 사람들은 하나님까지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한계입니다. 자신을 위해 덜 쓰고 다른 이들을 위해 더 쓸 때 교회는 건강해집니다. 너무 많은 재물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거리를 멀어지게 합니다. 

• 주인이 누구인지 아는 마음

러시아의 농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민담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가난한 농부가 살았습니다. 그는 이른 새벽부터 밭에 나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쟁기질이 끝나고 시장기가 돌 무렵이면 나무 밑에 놓아둔 빵 한 조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빵이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그는 맹물로 달래며 말했습니다. "오늘 하루 굶는다고 죽지는 않겠지. 누구든 그 빵이 필요했으니 가져갔겠지. 그 사람이라도 잘 먹으면 좋겠군." 근데 그 빵을 훔친 것은 악마였습니다. 

악마는 농부가 죄를 짓게 만들려고 빵을 훔쳤던 것입니다. 하지만 농부는 빵 도둑에게 악담을 퍼붓기는커녕 오히려 축복했습니다. 그 악마는 대장 악마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악마다운 지혜가 부족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악마는 다른 술책을 꾸몄습니다. 농부의 빵을 훔치는 대신 농부의 빵을 늘려주기로 했습니다. 하인으로 변장한 악마의 도움으로 농부는 가뭄이 들거나 홍수가 들어도 많은 수확을 하게 되었습니다. 곡식이 남아돌자 악마는 그것으로 술을 만들라고 부추겼습니다. 마침내 허기를 달래주던 일용할 양식이 쾌락을 위한 도구로 바뀌었습니다. 

술이 생기자 농부는 친구들을 불러들여 먹고 마시며 놀았습니다. 술자리를 마칠 즈음이면 너나할 것 없이 인간의 모습은 간데없고 동물들로 변했습니다. 비책을 묻는 대장 악마에게 악마는 대답했습니다. 자기가 한 일이라곤 농부에게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수확을 준 것 밖엔 없다고 말했습니다. 남아도는 것이 생기자 농부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자신의 쾌락을 위해 쓰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인간의 마음에 묶여 있던 여우와 늑대와 돼지의 피가 다 뛰쳐나오더라는 것이었습니다.(톨스토이, <악마와 빵 한 조각>) 

옛 이야기이지만 역시 우리 삶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말씀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야 감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삶이 하나님의 마음에 잇대어 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김현승 선생님의 시 <감사하는 마음>의 마지막 연은 언제 보아도 감동적입니다. 

감사하는 마음—그것은 곧 아는 마음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그리고
主人이 누구인지를 아는 마음이다.

감사할 줄 아는 이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기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이 늦가을, 우리가 잃어버렸던 감사의 마음을 되찾는 행복을 맛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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