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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혼인잔치 (마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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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잔치 (마 22;1-14)


“예수께서 다시 비유로 대답하여 이르시되 2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3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5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7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8이에 종들에게 이르되 혼인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하지 아니하니 9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한 대 10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11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12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 13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내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하니라 14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14)

우리의 소원은...통일이 아니라 천국(天國)입니다.  영원한 고향,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 곳, 눈물과 슬픔이 없는 곳, 안 간다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곳, 그러면서 평소에는 잊고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천국에 대해서 알려주시는 말씀이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천국에 관한 교훈들을 보면 대부분 비유(比喩)로 되어 있습니다. 비유란 천국의 신비하고 영적인 진리를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일반적인 얘기로,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얘기로 표현한 것이 비유입니다. 사실 비유가 아니면 천국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전에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주인공이 밤에 오토바이를 타다가 그대로 100년 전의 과거로 넘어갔습니다. 들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나타난 오토바이의 불빛과 헬멧을 쓴 주인공의 모습을 보고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는 것입니다. 

하물며 이 땅에 있는 우리가 천국을 어떻게 바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비유로 천국을 알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듣고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이 무척이나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영원한 고향인 천국을 더 잘 알아가고, 더 깊이 사모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에 살펴보려고 하는 천국의 비유도 세상의 혼인 잔치 이야기를 예를 들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일까요?  천국은 ‘혼인(婚姻)잔치’가 있는 곳입니다.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하지 않습니까? 계시록을 보면 천국은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 고 말씀합니다. 

왜 이렇게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도 곡하는 것도 없을까요?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곳이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잔치 중에 최고가 ‘혼인(婚姻)’입니다.  장수를 축하하는 ‘還甲잔치’나, 아이의 건강을 축하하는 ‘돌잔치’도 즐거운 것이지만 새로운 가정이 탄생하는 혼인잔치가 최고 아니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이 혼인잔치에 왕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이 손님을 많이 청합니다. 아들의 결혼입니다. 며느리를 새 식구로 맞이하는 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하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힘껏 손님들을 위한 것을 많이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다 이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석을 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한 분도 예외 되는 분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그런데 본문에는 왕이 잔치를 배설하고 종들을 보냈는데 이들이 오기를 싫어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세상에서도 대통령이 만찬에 초청을 하면 다 갑니다. 국내에 있으면 물론이거니와 국외에 있으면 일정을 당겨서라도 얼른 돌아와서 만찬에 참석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참석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영광이며 또 그런 기회를 통해서 대통령과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왕은 대통령보다 더 권한이 많은 사람인데 이 왕이 초청했을 때 오기를 싫어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서 또 초청했습니다.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내가 이렇게 준비했다,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초청을 받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떤가요? .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거절합니다. 오히려 잔치에 오라는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종들을 모욕하고 죽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직접 준비하신 천국잔치는 정말 좋은 것이지만, 우리를 부르시고 청하시는 말씀에 대해서 거역하게 될 때, 즉 우리들이 핑계하고 불순종하고 거절을 하게 될 때에, 그것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서 이를 가는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성도여러분, 천국 혼인잔치의 초청은 세상의 혼인 잔치 초청과는 다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그것보다 더 중요거나 긴급한  일이 있을 때는 가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왕의 초청은 의무적일 뿐만 아니라 가지 아니하면 반드시 그것에 대한 진노(震怒)의 대가(代價)가 있는 그런 초청입니다. 왕의 부름을 무시하는 사람은 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왕의 분노를 감당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왕의 부름을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는 택함 받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첫 번 째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번만 초청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초청했다는 것입니다.  임금님은 그의 아들의 혼인잔치를 위해 많은 사람을 초청했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두 번을 초청했다고 했습니다. “그 종들을 보내어 그 청한 사람들을 혼인 잔치에 오라 하였더니 오기를 싫어하거늘 4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이르되 청한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찬을 준비하되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혼인 잔치에 오소서 하라 하였더니” 누가 복음을 보면 왕은 3번이나 손님을 모셔오라고 종들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은혜와 긍휼이 많으신지 그를 거역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부르고 또 부르신다는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계속되는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은 무한정(無限定)은 아닙니다. 그들을 두 번이나 초청했지만 오지 않자 세 번째는 사거리로 가서 누구나 다 오도록 초청을 했습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거절을 했습니다. 또다시 간절하고 정중하게 청했습니다. 또 거절을 했습니다. 심지어 잔치에 오시라고 권하는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악한 사람이 어디 있느냐 하겠지만 있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듭되는 초청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두 번 째로, 초청받은 사람과 택함을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에 보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고 했습니다. 잔치에 청함을 받은 것과 잔치에 참여하는 택함을 입은 사람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택함 받은 사람은 오히려 소수라고 했습니다. 왜 택함을 받은 사람이 작으냐!! 본인들이 거절을 해서 그렇습니다. 

성도여러분,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혼인잔치가 있는 곳이며, 그 찬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오기를 거절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여러 번 청했으나 여러 번 거절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그냥 거절이 아닙니다.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한 사람은 자기 밭으로, 한 사람은 자기 사업하러 가고 6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니”  천국을 싫어하는 사람들, 잔치에 참석하기를 거절하는 사람들이, 왕의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곳이 천국입니다. 

본문에 보면 한 사람은 자기(自己) 밭으로 가기 위해서, 또 한사람은 자기(自己) 사업차 가기 위해서, 거절을 했습니다. 

누가복음 14장에 보면 그들이 핑계까지 댑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으니 가봐야 하고, 또 한 사람은 소를 샀으니까 가야하고, 또 한 사람은 장가를 들었으니 불가불 가야 한다고 핑계를 합니다. 사실 전도를 해보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부하고 거절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또 총동원 주일 같은 경우에 교회를 왔더라도  ‘1년에 한번 간다면 모르지만 자주 갈 수는 없다’ ‘하도 권해서 억지로 간 것이지 계속 예수 믿을 마음은 없다’ 하고 여러 가지 핑계를 대는 것을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성도여러분, 못 간다는 사람들은 못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사람들이 못 가는 핑계를 댑니다.   밭을 샀으니까 못 간다, 즉 不動産입니다. 사실 부동산에 정신을 빠져놓으면 다른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또 한 사람은 사업차 간다고 그랬습니다. 事業問題로 못 간다는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은 장가를 갔기 때문에 못 간다,   즉 세상적인 快樂 때문에, 가정문제로 못 간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핑계의 공통점은 하나님의 일보다는 자신의 일에, 하나님 일보다는 세상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일보다 더 앞세우지는 않습니까? 또 세상일을 천국의 일보다 앞세우지는 않습니까? 혹시 이미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도 우리도 신앙의 성장이나, 전도나 봉사의 일에 핑계를 대며 ‘나는 못 한다’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섬김’은 축복의 기회입니다. 그것을 거절하는 우리들의 핑계를 무엇입니까? 결국은 내일이 더 바빠서 아닙니까? 하나님일, 교회일은 뒷전 아닌가요? 그러나 이런 핑계는 하나님 앞에 복(福)을 받지 못합니다. 복의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잔치에 오시라고 권하는 “종들을 잡아 모욕하고 죽이기” 까지 했던 사람들은 임금의 진노를 받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진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기회를 잃어버린 것도 너무 아까운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종들에게 악하게 대한 사람들은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왕의 초청을 거절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절하지 않는 것...’ 이것이 우리의 큰 교훈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딴 것이 아닙니다. 초청의 말씀에 “예 갑니다”하는 것이 택함을 받은 것입니다. 택함을 받았다는 말씀을 좀 더 깊이 살펴봅니다. 장로교에서는 예정론(豫定論)을 많이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이미 나를 택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반드시 다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은 택자입니까? 아니면 불택자입니까?  먼저 예배를 드린다는 것 자체가, 이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청함을 받은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청함을 받았다고 다 택함을 받은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혹시 내가 택자냐 불택자냐 하는 고민을 하신 분이 있을 줄로 압니다. 택함을 받았다고 한다면 무엇으로 우리가 택함을 입었는지 압니까? 택함을 받은 증거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간단합니다. 

여러분은 한국 사람입니까? 외국 사람입니까? 내가 한국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주민등록증(住民登錄證)’이 있느냐 없느냐로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외국 사람은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여권(旅券)(패스포트)을 가지고 다니지 주민등록증이 없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주민등록증이 있으면 나는 택함을 받은 사람이 맞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내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다. 예수님은 내 구주시다.’라고 마음속에 믿는다면 그 믿음이 바로 여러분의 주민등록증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택함 받은 자들에게 주시는 선물(膳物)입니다. 그런 사람이 선택함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이런 믿음을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복 받으려고만 다니는 곳이 아닙니다. 

노아의 방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어갈 때 노아와 그 식구들은 안 죽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배’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유람선(遊覽船)이 아니라 구원선(救援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을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분으로 믿어지면 됩니다. 복은 구원 뒤에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또 안 따라와도 상관없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얼마나 많이 스스로 자원해서 선교사로 가고, 무료 급식 봉사를 하고, 헌금을 하거나 헌신을 합니까? 사서 고생을 하지 않습니까!! 자기 재물을 스스로 내어 놓지 않습니까!!  ‘구원받은 믿음’이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물어 보십시오. 나는 영적인 주민등록증이 있는가? 변하지 않는 확실한 구원의 신앙이 있는가!! ‘아멘 당연히 있습니다.’ 라는 대답이 저절로 속에서 나옵니다. 

 
세 번 째로,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은 예복(禮服)을 입어야 합니다.

군인(軍人)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해서는 군복(軍服)을 입었느냐 안 입었느냐 로 압니다.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가려면 천국의 유니폼이 있습니다. 열왕기하 10장에 보면 “예후가 온 이스라엘에 사람을 두루 보냈더니 바알을 섬기는 모든 사람이 하나도 빠진 자가 없이 다 이르렀고 무리가 바알의 신당에 들어가매 바알의 신당 이쪽부터 저쪽까지 가득하였더라 22예후가 예복 맡은 자에게 이르되 예복을 내다가 바알을 섬기는 모든 자에게 주라 하매 그들에게로 예복을 가져온지라”(왕하10;21,22)

바알을 섬기는 사람들도 예복을 입고 있지 않습니까?  천국의 잔치에 참석한 사람은 더군다나 예복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복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잔치에서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 예복, 천국의 유니폼이 ‘너는 이제 의롭다’ 하는 ‘의(義)의 옷’입니다. 이 ‘의의 옷’은 ‘믿음의 옷’입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롬13;14)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갈3;27) 예수님이 우리의 옷이 되십니다. 

절대로 율법을 행함으로 받는 옷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다윗도 성경의 그 누구도 율법으로나 행함으로 ‘의의 옷’을 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반드시 인도하신다’이 믿음이 없으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힘(力)으로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3가지의 대표적인 힘이 있지요. 지력(知力), 금력(金力), 권력(勸力)이 그것입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이 인생의 고비 고비마다 이 3가지의 힘 인 지력(知力), 금력(金力), 권력(勸力)을 문제 해결의 열쇠라고 믿고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면 살아간다면 저와 여러분은 ‘믿음이라는 의의 옷’을 입고 있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지력(知力), 금력(金力), 권력(勸力)은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몇 가지 본문에서 받은 교훈을 더하고 싶습니다. 

성도여러분, ** 늦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배설한 천국잔치에 늦지 말아야 됩니다. 절대로 늦으면 안 됩니다.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의 문은 시간이 지나면 닫혀집니다. 또 생명이 있는 동안에만 우리에게 기회가 있습니다. 죽은 뒤에는 기회가 없습니다. 나중에 믿어도 되겠다고 생각하는 생각을 합니까?  참 잘못된 생각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연세가 90이 넘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나중에 믿겠다고 합니다. 제가 목사 아닙니까? 목사로서 병원에 자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이 있는데요.. 목사가 아닐 때는 깨닫지 못했던 것을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죽음은 절대로 나이순서가 아니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죽음은 나이순서라고 많이 착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은 ‘미래(未來)’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 시간만이 내 시간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간에 믿고, 지금 이 시간에 선택(選擇)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가 천국잔치에 늦지 말아야 되겠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항상 늦다가 나중에 천국에 갈 때도 늦어지면 어떡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은 항상 시간을 잘 지켜야 합니다. 특별히 예배 시간에 늦는 버릇은 빨리 고칠수록 복을 받을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은 버릇을 들이기에 달렸습니다.

그리고 성도여러분, 우리는 **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보면 천국잔치에 초청받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핑계를 댑니다. 우리도 자주 핑계를 댑니다. 그러나 어떤 핑계도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사업 때문에, 가정 때문에, 부동산 때문에 등등 이런저런 핑계가 많습니다만 그 핑계를 분석하면 전부 자신의 일, 세상 일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공 때문입니다. 

무엇이 성공입니까? 사람들은 성공이라는 것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다, 돈을 많이 버는 것이다, 권력을 가지는 것이다 라고 여러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공은 자기의 뜻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요.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실패자입니다. 억울하게 붙잡혀서 십자가 위에서 사형을 당했으니 그것보다 더 큰 실패는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그 당시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국회의원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다면 바리새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위대한 학자요 정치가로 성공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버렸습니다. 참 성공이라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이루다가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사람들을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성공입니다. 그래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명히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때로는 이름도 없고 빛도 없는 자리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라면 그것이 바로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인간적으로 성공이냐 실패냐 계산하는 것은 버려야 합니다. 어떻게든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그 뜻을 깨닫고 그 뜻을 이루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혼인잔치의 비유에서 저와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선물(膳物)입니다. 본래 혼인 잔치에 선물을 가지고 가야하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초청했을 때 우리가 빈손으로 가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가 가지고 가야할 예물, 선물이 무엇인가요?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옥갈 수밖에 없는 것, 교양도 없고, 인격도 부족하고, 믿음도 부족한 나를 불러주셨으니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그 마음을 가지고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감사를 하시나요?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너무 감사가 부족합니다. 항상 불만이요, 불평일 때가 더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제 하루 얼마나 감사를 하셨습니까? 정말 감사할 것이 없습니까? 감사는 만병을 치료합니다. 마음의 병도 치료하는 것이 감사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조금만 더 감사를 한다면... 우리의 인생은 많은 부분이 이미 변했을 것입니다. 빈손이 아니라 ‘감사’라는 예물을 가지고 천국을 향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천국잔치에 사람들을 초청하는 일을 잘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초청장을 많이 주시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전달하라고 했는데, 빈자리가 있는 것은 우리들이 사명을 잘 감당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그날에 부끄럼이 없도록 우리의 믿음을 준비하고,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하나님의 집을 채우고 더 나아가 땅끝까지 이르러 주님의 증인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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