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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버가모교회 (계 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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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가모교회 (계 2:12-17)

 
내 용 요한계시록의 세 번째 교회가 버가모 교회입니다. 이 교회는 일곱 교회 가운데 건물보존이 지금까지 가장 잘된 교회로서 헐어지긴 했어도 웅장했던 버가모 교회 원형 모습이 그대로 현재까지 남아있습니다. 성지순례 가시면 보실 수가 있습니다. 이 지역에 대한 주님의 평가가 13절입니다.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왜 버가모 교회가 사탄의 권좌인가? 버가모 지방에 제일 유명한 신전이 있었는데 에스쿨라피우스 신전이 거기 있었습니다. 이것은 제우스 신전입니다. 이 신전이 왜 사탄의 권좌인가? 신의 모습이 뱀의 형상입니다. 뱀의 사탄 상징은 창세기 때부터 나오는 성경기록으로서 뱀이나 바다의 용 모두다 악령의 상징으로 표현이 됩니다. 뱀을 신으로 섬기는 문화는 고대 이집트에서부터 성행하였습니다. 이집트에 가시면 스핑크스 이마에 붙어있는 형상이 코브라 뱀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중국도 한국도 일본도 용 문화가 발전을 했습니다. 그 원조 모습이 에스쿨라피우스 신전인데 버가모에 원형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여러분이 피곤할 때 마시는 피로회복제 ‘박카스’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도 신의 이름입니다. 박카스 신전도 버가모에 가면 있습니다. 그 다음에 아폴로비로스 신전이 그곳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 신전들이 가득한 곳이기 때문에 사탄의 본좌라고 부른 것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신전에 소를 끌고 와서 제사를 지냈기 때문에 버가모 시장의 식용고기들은 그곳 신전에 바쳤던 고기들이 됩니다. 

그런데 이 버가모 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이 바로 13절 하반절에 나타났습니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이 버가모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 안디바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지금 버가모에 가시면 안디바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이 안디바는 예수 믿는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하다가 순교를 당했는데 그를 죽이는 방법이 너무 끔찍해서 교회사에 전해 내려왔습니다. 야외에다 청동 가마솥을 걸어놓고 거기에 물을 가득 채우고 벌거벗겨 그 안에 집어넣고 밑에다 장작불을 때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삶아 죽였습니다. “누구든지 예수를 끝까지 믿겠다고 하면 이렇게 죽을 것이니까 이것을 보고 너희 마음을 결정하라.” 이렇게 핍박했는데 안디바가 끝까지 주님을 버리지 않고 그 고난을 이겨냈기 때문에 주님이 그 이름 고유명사까지 기억하시면서 버가모 교회를 칭찬하신 것입니다. “사탄의 소굴 안에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고 믿음을 지킨 안디바와 같은 지도자가 있는 버가모 교회” 이렇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핍박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의 소리를 들을 때 사실성에 대해서 의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이 굳세다 하여도 그러한 견딜 수 없는 신체적 고통 앞에서 과연 그렇게 죽어갔을까?’ 의심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핍박을 당한 사람은 고사하고 우리나라에서 있었던 일도 있습니다. 

미국에서 미국인 목사들이 모였을 때 한국 교회에서 있었던 기독교 핍박 역사를 보고하는 순서가 있었습니다. 영어 잘하는 1.5세 한국인 목사가 미국인 목사 앞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 하면 제암리 교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제암리 교회는 그 동네에 사는 안종후라는 사람이 아펜젤러의 전도를 통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첫 번째 예배드리기 시작한 교회입니다. 일본 경찰이 이 제암리 교회에 교인들을 다 몰아넣고 밖에서 무차별 사격하고 불 질러서 29명이 참혹하게 타죽은 사건입니다. 더군다나 불타는 그 건물 속에서 창문을 열고 한 부인이 나는 죽을 테니까 내 어린아이는 살려달라고 내밀었을 때 일본 경찰이 그 어린아이를 반 토막을 내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우리 1.5세 한국인 목사가 미국 교인들과 목사들 앞에서 이야기 하니까 모두가 믿지 않는 표정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이 사람을 잔인하게 할 수 있는가?” 안 믿는 겁니다. 그런데 과거에 있었던 우리 신앙 선배들은 정말 우리가 안 믿어질 만큼 순교를 당했는데 이 버가모 교회 안디바 감독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하나님께 가장 큰 일을 한 사람이 누군가?’ 저는 순교자라고 생각합니다. 주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을 바꾸겠느냐?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생명이니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자기 생명을 믿음을 얻는 일에 가장 귀한 일로 여겨서 바꾸는 순교자는 정말 하나님 앞에 가장 훌륭한 사람들이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기 보면 버가모 교회에 대한 책망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교회일지라도 한쪽에는 책망 부분이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신앙인일지라도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한 부분은 하나씩 또 가지고 있습니다. 불완전한 인간이 완전한 인간을 푯대로 정하고 달려가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미완성 단계에서 완성의 세계로 가는 것이 세상과 천국의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이 버가모 교회의 책망 부분은 뭔가? 여기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의 교훈이 도대체 뭔가?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출애굽해서 모압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모압의 왕이 발락이라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 발락과 발람이 같이 한 시간에 나오기 때문에 혼돈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발락이라는 모압 나라의 왕은 큰 걱정이 생겼습니다. ‘이스라엘 나라 백성이 자기 나라 앞에까지 왔는데 이 백성이 얼마나 강인한지 40년 동안 전쟁에서 실패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러면 우리 모압 나라는 빼앗기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점쟁이 발람을 불러서 의논을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벌이 내려질 수 있을까?” 이 발람이 얼마나 유명한 점쟁이인지 꾀를 냈습니다.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바알 신자들을 대량 투입하되 젊은 신자들을 투입하십시오. 그리고 이스라엘 남자들과 함께 바알 예배에 참석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참석한 모든 남자들과 바알 제사의 의식대로 행음을 시켜 잠을 자게 만드십시오.” 그래서 성공합니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40년 광야 역사에 가장 큰 불행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절대적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서 2만3천명이 죽었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에베소 교회에서 니골라 당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났는데 버가모 교회에서도 똑같이 나타났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이 발람의 바알 제사 사건은 민수기 25장입니다. 민수기 25장 1~3절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 여자들이 자기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이스라엘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가담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민수기 25장에 이렇게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요한계시록은 신약에서도 제일 마지막입니다. 그러면 민수기 시대에서 요한계시록 일곱 교회는 시간적으로 천년이 넘는 시간입니다. 그런데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끈질기게 이 바알 종교가 따라다니면서 계속 문제를 일으킵니다. 더군다나 이 버가모 교회, 에베소교회의 니골라당 유대인들은 모압의 바알 사건으로 인해서 2만3천명 심판받은 것을 다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문제가 되어서 바알 종교를 끊어버리지 못하느냐고 주님의 책망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고대 사람이나 현대 사람이나 똑같은 심리적 상태가 하나 나타나는데 우상 숭배에 대해서 큰 매력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이단은 사람들이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유지되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논리 하나만 잘 만들면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붙도록 되어 있습니다. 50년 전 한국교회 안에서 이 문제가 “혼음사건”이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아주 크게 나서 예배 후 집단 혼음 피가름 했다고 한국 교회가 뒤집어엎어진 적이 있습니다. 버가모, 에베소 교회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 적이 있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내가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이러한 신앙 지키기 싸움에서 지는 자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기는 자들, 안디바 같이 죽음으로 신앙을 지키는 자들에게 약속 몇 가지를 주겠다.” 약속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그런 사람에게는 감추었던 만나를 주겠다.” 

만나는 40년 광야 생활에 하나님이 내려주셔서 먹게 하신 양식입니다. 그런데 왜 감추었던 만나라고 했는가? 출애굽 시절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을 상징하는 언약궤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 언약궤 하나가 이 만나 항아리 하나를 갖다가 감추어 두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 33절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리신 생명의 근원적 물질을 보관하도록 그렇게 감추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전쟁 과정에서 이 언약궤 보존이 어려웠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디로 갔는지 모릅니다. 수많은 전쟁에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사회에 전설이 하나 생겼습니다. “만나는 지금 감추어놨다. 엘리야가 감추어놨다. 그런데 이 만나를 찾아낼 사람이 메시야이다. 메시야가 오시면 꺼내서 또다시 만나를 나누어주실 것이며 곧 영생의 선물이 될 것이다.” 전설이 퍼졌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감추었던 만나를 준다는 말의 의미를 잘 알지만 로마 사람들은 이게 무슨 말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인 것입니다. 모두다 굶어죽을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서 굶어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것과 같이 신앙을 굳게 지킨 자는 메시야가 생명의 만나를 주어 영생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들이 감추었던 만나를 먹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은 감추어진 비밀이라고 하셨습니다. “택한 백성만이 아는 생명의 떡이라.” 여러분! 이 생명의 말씀인 성경은 지금 책방에 나가면 많이 팔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책을 날마다 팔고 있는 사람도 그것이 생명의 떡인 줄 알겠습니까? 왜 모를까요? 감추어진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비밀을 알고 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흰 돌을 주시겠다고 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의미인가? 옛날 로마 법정은 배심원 제도였습니다. 피고인에 대해서 자기 의견을 표시할 때 흰 돌과 검은 돌 두 가지를 놓고 판결을 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법정은 배심원 제도가 아니라서 이해가 어려우실 것입니다. 미국과 서구 나라들을 배심원 제도입니다. 저 같은 사람도 재판의 배심원으로 나오라는 통보를 10번도 더 받았습니다. 그러면 거기 가서 어떻게 하라는 교육도 받습니다. 

아무 법적인 관계가 없는 시민을 무작위로 뽑아서 “이번 사건에 당신이 배심원이 되었다.” 통보 받으면 나가야 합니다. 정당한 이유가 없으면 의무적으로 나가야 하는데 잘못 걸리면 피해를 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재판이 몇 년씩 걸리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판 때마다 계속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목사 같은 사람이 그런 재판에 걸리면 목회는 어떻게 합니까? 아주 엉망이 될 수가 있습니다. 목사는 배심원에서 제외하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목사가 정의로운 사람인데 재판을 더 잘하지 왜 부적격인가? 

목사가 배심원이 되면 재판이 잘 안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용서해주라는 반응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배심원에서 가능한 빼버립니다. “예수님은 원수도 사랑하라 하셨는데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하셨는데 기독교 국가에서 한번 죄 지은 거 가지고 뭘 그러느냐? 죄 없는 것이다.” 이런 반응을 보이니까 재판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변호사가 설명하고 검사가 설명하고 주민들이 나와서 증언하는 소리를 배심원들이 듣고 “이 사람은 죄가 있다, 없다” 둘 중에 하나만 표시하면 됩니다.

어떤 때는 배심원이 10명이면 5:5도 될 수 있고, 7:3도 될 수 있는데 판사와 변호사, 검사가 모여서 죄의 양을 조정해서 판결하는 제도입니다. 그런데 흰 돌은 뭐냐? 죄가 없다는 표시입니다. 로마에서 했습니다. 그래서 다 들어보고 흰 돌을 갖다 놓으면 “이 사람은 죄가 없다.” 누가 죄가 없느냐는 그것을 보고 판사가 판결을 합니다. 또 다른 문화가 있는데, 로마에서는 테헤세라 제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테헤세라는 아름답게 잘 다듬어진 흰 돌입니다. 큰 권력자나 부자가 테헤세라를 발행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흰 돌에다가 발행자의 이름과 고유 문장을 새겨서 줍니다. 국가를 위해서 큰 공로가 있는 사람이거나 부자가 자기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줄 수 있는 흰 돌 증서입니다. 

이것을 받는 사람은 무슨 혜택이 있는가? 크레디트 카드 같은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건 3년짜리이다. 1년짜리이다. 아니면 10년이다. 때로는 평생 쓸 수 있다.” 공로에 따라서 줍니다. 그러면 받은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어느 식당에 들어가든지 식사와 술을 마셔도 공짜입니다. 테헤세라를 발행하는 사람이 지불하는 제도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것을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원형 극장의 격투사들입니다. 흰 돌에다가 황제의 암호 문자 SP를 적어주는데 이 문자는 라틴어의 ‘스펙텍터스’라는 말인데 ‘용사’란 뜻입니다. “너는 이것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일평생 아무 식당에 가서 밥 공짜로 먹고 최고의 영광스러운 명예를 얻고 운동경기장, 극장을 평생 무료입장하는 흰 돌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흰 돌을 주겠다고 하면 성도들은 금방 알아차립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것이 주어지는 것인데 값없는 은혜, 공짜로 먹는 생명의 떡이란 의미가 있습니다. 

같은 맥락의 뜻이 요한계시록에 많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앞으로 나올 3장에 사데 교회에게 주시는 말씀 “이기는 자는 흰 옷을 입을 것이요.” 19장에 “흰 세마포를 입을 것이요” 20장에 “크고 흰 보좌” 이렇게 흰 색깔이 나오는데 하나님의 색깔로 흰 돌은 속죄의 표시, 영생의 약속으로 “내가 이것을 주리라” 이렇게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은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성경에 이름 바꾼 사람 많습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었고, 사래도 사라가 되었고, 야곱도 이스라엘이 되었고, 사울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바꿔주셨습니다. 

개신교회는 없지만 가톨릭교회에서는 영세 받으면 누구든지 이름 하나씩 새로 받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 멘토로 대부 제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국 시민 자격의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다 그런 뜻입니다.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땅과 처음 하늘이 없어졌다”는 말입니다. 새 예루살렘과 새로운 세계입니다. 

이사야 62장에도 있잖아요? “시온의 의가 빛 같이, 예루살렘의 구원이 횃불 같이 나타나도록 시온을 위하여 잠잠하지 아니하며 예루살렘을 위하여 쉬지 아니할 것인즉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한계시록 5장 9절에 가보면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라는 말이 나옵니다. 뭐든지 새것입니다. 완전히 새것으로 다 바뀐 의미로서 “내가 새 이름을 그 돌에 새겨 주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새 이름은 온 우주 만물도 똑같이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십시오. 현재 많은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빨리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그래야 자신들도 하나님의 창조의 본래 목적대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그러면서 새로운 세계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0절에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것이 비밀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는 “받는 자 외에는 이 비밀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이것은 다 계시에 의해서 영적으로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에 아무리 설명을 해도 계시를 못 받으면 알아듣지 못합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모든 것을 다 비밀로 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을 ‘계시록’이라고 했습니다. 계시를 받은 자만이 알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자연과학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일어나서 새롭게 산다는 것을 믿겠습니까? 절대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비밀이어도 하나님이 알려주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너희에게는 이 하늘 문의 비밀을, 내가 감추었던 것을 이렇게 알려줄 것이니라. 흰 돌을 너희에게 줄 것이며 새 이름을 줄 것이다.” 그러니 어느 국문학자가 이 요한계시록을 알 수 있겠습니까? 어느 논리학자가 이 요한계시록을 풀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수사학자가 이 비밀을 자연스럽게 풀 수가 있겠습니까? 어느 누구도 못합니다. 받은 자만이 압니다. 그래서 이 흰 돌과 흰 세마포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계시로 주어졌는데 “이것을 굳게 잡으라. 그러면 너희가 영생하리라.” 버가모 교회의 안디바를 칭찬하면서 “너희가 믿음의 싸움에서 진 사람도 많고” 이렇게 책망도 칭찬과 동시에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 복음의 성격을 알아야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다. 구원의 속죄, 죄 사함이란 무슨 능력인가? “너희 죄가 주홍 같은 지라도 흰 눈 같이 될 것이요” 없어졌습니다. 이번 추석에 교통법규 위반 범법자 430만 명을 사면해 주었다고 신문에 났습니다. “당신의 죄는 다 사해졌습니다.” 정부에서 그렇게 사면령을 내리면 혜택을 누리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범법자가 경찰서를 찾아가서 “이보시오! 나는 사면령 안 받겠습니다. 내 죄는 그대로 두십시오.” 청와대에 가서 “나라 일 좀 똑바로 하십시오. 나는 죄가 있는데 왜 죄가 없다고 합니까?” 따지는 사람 있습니까? 죄가 하도 커서 세상에 살려둘 수 없는 흉악범도 사면령을 내리잖아요?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러면 누리면 됩니다. 그 이상 묻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재판관의 절대 권력, 판결의 권위입니다. 비록 죄가 있어도 “당신 이 시간부터 죄가 없어!” 그러면 아무 소리 말고 그냥 나오면 됩니다. 

전에도 제가 수요 예배 때 한번 예화를 한 거 같은데, 모르는 여자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저는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죄를 지어서 재판 받으러 가는데 목사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으니 남의 집에 그냥 들어갔다는 겁니다. 
“왜 남의 집에 들어갔나요? 도둑질 하셨나요?” 
“아닙니다. 미국 사람과 살다가 이혼했는데 내 아이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 집 들어가지 못하게 금지령이 내렸는데도 너무 보고 싶어서 법을 어기고 들어가서 봤습니다. 그래서 재판 받는데 목사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판사 앞에 재판 받으러 가는데 아무도 없고 그 여자와 저만 앉았습니다. 판사가 그 여자에게는 묻지도 않고 저만 쳐다보고 묻는 겁니다. 
“누구십니까?” 
“목사입니다.” 
“왜 오셨습니까?” 
“이 여자분 도와주러왔습니다.” 
“뭘 도와줄 수 있나요?” 
“여기서 명령하는 거 뭐든지 제가 도와줄 수 있어서 따라왔습니다.”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면 여기 사인하실 수 있나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다시는 이 여자가 그런 죄를 짓지 않도록 사인하고 교육시킬 수 있나요?” 
“하겠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인했더니 
“나가십시오. 석방입니다.” 그래서 그 여자 분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러니 저는 교육시킬 책임이 있잖아요? 
“나는 책임이 있으니까 교육하겠습니다.” 

여자 분을 세워놓고 
“다시는 그 집에 몰래 들어가지 마십시오. 이제 집에 가십시오.”

하지만 일주일은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한답니다. 그래도 좋아서 감사하다고 가는데 좀 섭섭한 게 냉면이라도 한 그릇 사주고 가야지 그냥 가느냐 말입니다. 재판관이 이제 죄가 없다고 하면 죄 없는 겁니다. 

성경에 보십시오. “하나님이 죄 없다고 하신 자를 누가 정죄하리요?” 괜찮은 겁니다. 무슨 죄가 과거에 많던지 “너는 이제부터 괜찮아.” 그러면 괜찮은 겁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힘입니다. 나는 완전히 의인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 흰 돌은 “너는 죄 없어! 이 약속의 흰 돌을 줄 테니까 어디 가서 이것만 내밀어. 너는 이름이 새로워졌어.” 이렇게 된 겁니다. 이 버가모 교회 안디바와 같이 믿음을 지키고 주님이 주시는 흰 돌을 굳게 잡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지키라고 흰 돌과 흰 세마포를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죄가 없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죄 없다고 판결해 주셨기 때문에 죄가 없어졌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흰 돌을 굳게 잡고 믿음의 승리자가 되어서 하늘나라의 영생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필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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